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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5:08:36

성스차이

성세재에서 넘어옴
파일:盛世才.jpg
중화민국 신강성 정부주석
한문 盛世才
한국식 독음 성세재
영문 Shèng Shìcái
진용(晋庸)
출생 1897년 1월 8일
청나라 봉천성 개원현
사망 1970년 7월 13일 (향년 73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대만)
학력 메이지대학 문학부 중퇴
운남강무당 소주분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정부에 합류2.3. 신강성의 지배자2.4. 소련과 협약2.5. 중일전쟁2.6. 몰락2.7. 말년
3. 매체에서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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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군벌. 1933년부터 1944년까지 11년 동안 신강성의 지배자로 군림하였으나 소련중화민국(장제스) 사이에서 우세한 진형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로 완전히 찍혀 몰락한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7년, 청나라 봉천성 개원현에서 태어났다. 상하이 오송의 중국공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 메이지대학 문학부에 들어가서 문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로 큰 충격을 받고 독대관이 되어 유학생 대표를 맡아 유학 중단운동을 벌이고 유학생들의 귀국을 호소했다. 그리고 자퇴를 꺼리는 학생들을 구타하며 학생조직을 이끌었고 1919년에 귀국했다.

귀국한 성스차이는 험난한 정세 속에서 중국이 살아남는 길은 군사력을 키우는 것 뿐이고 고로 현재 중국에 필요한 것은 문이 아니라 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광동성 소주에 있는 운남강무당 소주 분교 2기 보병과에 입학하여 군문에 들게 되었다. 여기서 변방독판 이근원 밑에서 배웠으며 이근원에게 궈쑹링을 소개받게 되었다. 궈쑹링은 쑨원호법운동에 호응하여 호법전쟁에 참여하였지만 쑨원이 축출되자 실망하여 고향인 봉천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궈쑹링은 성스차이를 자신 휘하의 소배장을 삼았고 궈쑹링이 장쭤린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성스차이 역시 봉천군벌에 합류하게 되었다.

2.2. 국민정부에 합류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장쭤린은 사천성의 류샹, 의창에 주둔하고 있던 쑨촨팡 등과 연계하여 직예군벌을 타도하려 했다. 궈쑹링이 과거 사천성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궈쑹링은 류샹, 쑨촨팡 등과 인맥이 있었다. 이에 장쭤린은 궈쑹링의 부하 성스차이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 독대하며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네가 이번에 가지고 갈 임무는 아주 중대한 것이다. 내가 너에게 부탁할 말은 이미 직속상관인 궈쑹링에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는 길이 매우 험하기 위험하니 무리하지는 말라. 모험하지 말라."

일개 장교에 불과한 자신을 불러 친히 명령을 내리고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고 걱정해주는 태도에 성스차이는 매우 감동하여 장쭤린에게 큰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사천성의 군벌들을 포섭하려는 임무는 끝내 실패하였으나 장쭤린은 성스차이를 신임하여 1923년 육군대학교 유학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1925년 반봉사건이 일어나자 성스차이는 궈쑹링의 명령에 따라 귀국하여 참여했는데 궈쑹링은 장쭤린 타도에 실패하고 총살되었다. 성스차이는 일본 제국으로 도주하여 육군대학교에 복학했지만 장쭤린에게 제대로 찍힌 상태였다. 장쭤린은 육군대학교 측에 성스차이를 퇴학시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육군대학교가 거절하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져 공산주의 연구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다.

허나 장쭤린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성스차이는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에 성스차이는 중산함 사건으로 중국국민당의 최고 실력자가 된 장제스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눈여겨보고 성스차이의 학비를 대주어 그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게 해주었다. 성스차이는 매우 감격하여 장제스를 선생이라고 깍듯이 존대하였고 1928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주사오량의 소개로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상교참모로 발탁되었다.

2.3. 신강성의 지배자

파일:신강군벌 기.svg
신강군벌 기

국민혁명군 합류 후, 성스차이는 참모로 일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친공성향을 보였다. 허나 1930년 중원대전, 이어 창사 폭동초공작전이 시작되면서 국민정부 내부에는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친공성향이 강한 성스차이는 군부 내부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데 야망이 컸던 성스차이는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가서 몽골족으로 위장하고 몽골의 칸으로 등극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신강성 독판 진수런의 비서 노효조가 난징을 찾아 신강성 군대를 훈련시키고 전법을 연구할 장교를 찾으면서 성스차이는 신강성으로 갈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성스차이는 마지막으로 장쉐량을 찾아가서 국민정부 강무당 교육장 자리를 자신이 맡을 수 없겠냐고 최후의 로비를 하였으나 장쉐량은 성스차이에게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고 실망한 성스차이는 신강성에 가서 1930년 가을 신강성 독판공서 참모주임에 임명되었다. 자신의 전임자 양쩡신이 피살된후 어부지리로 권자에 오른 진수런은 권력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신강성 내부에 연고가 없고 권력욕이 없어 보이는 성스차이를 신임하였다. 성스차이는 신강육군군관학교 교장을 겸하며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신강육군군관학교의 기풍을 혁신하여 젊은 장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스차이는 생도들의 정치화 교육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1931년, 진수런의 폭정에 반발하여 투르판과 하미에서 위구르족 지도자 호자 니야즈율바르스 칸이 반란을 일으키자 간쑤성의 회족군벌인 국민혁명군 36사단장 마중잉이 일본의 지원을 얻어 합세하여 신강성의 성도 디화(현재의 우루무치)로 쳐들어오자 성스차이는 동로 초비총지휘에 임명되어 마중잉 격퇴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수런의 최대 기반인 성스차이가 출격한 사이에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나면서 진수런이 축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쿠데타군은 성스차이를 제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성스차이에게 우루무치의 혼란이 정리되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성스차이는 즉각 부대를 이끌고 우루무치로 돌아갔다. 쿠데타군이 추대한 신임 신강성 정부주석 유문룡은 성스차이를 신강성 임시독판에 임명하였다. 성스차이는 소련과 협상을 통해 소련의 원조를 얻어 마중잉을 완전히 격퇴하였고 1934년 6월 27일, 2차 정변을 일으켜서 쿠데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신강성의 지배자로 등극하였다.

2.4. 소련과 협약

1934년 8월 1일, 성스차이는 일본 유학 시절의 동창들과 고향 사람들을 신강성에 초빙하여 신강민중반제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허위주(何語竹), 랑다오헝(郎道衡), 왕서우청(王壽成), 왕바오첸(王寶乾), 황화칭(黃火青), 자오지원(趙繼文), 위춘(于村), 다이펑인(戴彭蔭), 한위린(韓毓麟), 마오둔(茅盾), 자오단(趙丹) 등 10명으로 구성되었다. 반제회는 위원장제로 시작되었다가 회장제로 변환되었으며 성스차이가 반제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반제회는 신강 지배의 핵심기구로 사용되었으며 성스차이당, 6대정책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반란 지도자였던 호자 니야즈(和加尼牙孜)와 합작하여 그를 신강성 정부 부주석에 임명하여 민족평등을 추구했다.

1934년 9월, 소련과 신강은 밀약을 체결하여 신강성에 대한 소련의 종주권을 공고히 하였고 대신에 신강성 개발을 위한 경제, 군사, 기술 원조를 실시하고 차관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1935년 5월 16일, 소련과 신강성은 500만 루블 어치의 차관협정을 체결하였고 1937년 1월 27일, 다시 250만 루블의 차관협정을 체결하였다. 성스차이는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행정조직을 신설하고 성의원, 신강일보 등을 창설했으며 교통수단, 인쇄기, 의료기재, 약품을 구입하여 신강성의 근대화를 실시하였다.

성스차이는 신강성 전역에 자신의 초상화와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었으며 신강의 상점에는 일용품, 옷감, 담배, 술, 사탕 등 소련제 제품들로 가득했다. 1935년, 붉은 군대와 정치, 군사, 재정 고문들이 도착하여 신강성의 개발에 착수했으며 신강성 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독산자 유전을 비롯하여 각종 지하자원을 개발하고 여러 기계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성스차이는 소련 물품에 5%의 관세만을 부과하였으나 소련은 최소 34%,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또한 텅스텐, 알루미늄, 주석, 동유, 저종, 차, 모피 등 광물과 농작물을 대가로 요구하였다. 또한 신장 북부 중가리아 지역의 채굴권을 획득하여 장악하였다. 대신에 이러한 도움을 바탕으로 1936년 시점에서 신강성은 1931년부터 시작된 내전의 피해를 모두 회복하였다. 1936년 6월, 중국 공산당 당중앙위원회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서북판사처 식량부장 등발을 신강성을 거쳐 코민테른에 파견하는 등 신강성을 혁명근거지로 활용하게 되었다. 1936년 서안 사건 이후 공산당은 신강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1937년 봄, 위구르족들이 국민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적발되었고 10월, 신강성 정부 부주석 호자 니야즈가 체포되었다. 이어 위구르족, 카자흐족, 몽골족 등의 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이틈을 타서 성스차이는 코민테른 요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공격하여 추방했다. 코민테른 요원들을 숙청했음에도 성스차이는 그 핑계를 트로츠키주의로 대면서 오히려 스탈린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2.5. 중일전쟁

성스차이는 중국공산당과 본격적인 접근에 들어갔다. 서안 사건 이후 초공작전이 중단되어 숨을 돌린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 발발 후 공식적인 2차 국공합작을 실시하여 국민정부 산하에서 항일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강성으로 여러 간부와 당원을 파견할 여유가 있었떤 중공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신강성까지 확대하기 위해 성스차이의 초청에 응하여 1937년 12월 서몽추, 마오쩌민 등을 파견하였다. 서몽추는 신강성 교육 부관장에 임명되었으며 마오쩌민은 재정청 부청장이 되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 선전을 하는 한편 행정, 교육, 문화 방면에서 활동했다.

1938년 8월, 성스차이는 스탈린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등 소련의 고위 정치가들을 접견했고 스탈린에게 소련의 더 많은 지원을 통해 신강성을 모범적인 사회주의 정권으로 만들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정부가 신장에 개입할 틈이 없을 것이라 확신한 성스차이는 아예 소련 공산당중국공산당에 모두 가입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스탈린은 이를 승인하여 성스차이의 소련 공산당 입당을 허락하였다. 허나 스탈린이 국민정부를 지나치게 자극할 가능성이 있으며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필요성, 일국 사회주의론을 이유로 성스차이의 중국 공산당 가입 허가를 번복하면서 성스차이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진 못했다.

귀국한 성스차이는 국민정부와 완전히 단절하기로 마음먹고 중국 공산당과의 접촉을 강화하였으며 반제회와 6대정책을 내세웠으며 국민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관리하였다. 이때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신강성에 진주하여 디화, 란저우 등에 기지를 건설하였다. 1938년에는 신강성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와 4차례 회담했다. 1940년 11월 26일, 성스차이는 소련과 50년 기한의 <신소조차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에게 신강 경내의 주석광산 조사, 채굴권, 부속권리, 채굴에 상관된 설비, 각종 채광소의 토지, 설비, 재료의 사용권리와 면세특권을 부여하였다. 성스차이는 1940년대에 위구르족 지도자들이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대숙청을 실시했다.

2.6. 몰락

독소전쟁의 발발 후 소련이 수세에 몰리자, 성스차이는 1942년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을 일으켜 마오쩌민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장제스에게 붙었다. 미국이 국민정부를 지지하자 소련은 신강성에서 군대와 고문단을 철수시켰다. 성스차이는 성공적으로 신강성에서 자신이 1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국민정부의 목적은 신강성의 주권을 중앙에 귀속시키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성스차이는 어디까지나 잠시 써먹는 도구에 불과했다. 신강성에 미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중앙군이 진주하는 등 국민정부의 입김이 세지자 1943년 10월, 충칭의 국민당 5기 11중전회에 참석했던 성스차이는 격렬히 반발했다. 게다가 국민정부는 항일전쟁으로 인하여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고 있어서 성스차이에게 소련처럼 대량의 원조를 제공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파일:성세재일가.jpg
1943년의 성스차이 일가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와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으로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이자 성스차이는 다시 소련에 붙기 위해 소련 측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소련 측은 한번 자신들을 배신했다가 다시 꼬리를 치는 성스차이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였고, 주중 소련대사 판유스킨은 장제스를 접견하여 소련은 성스차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다.

1944년 8월 29일,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신강성 독판에서 해임하고 농림부장에 임명하였다. 멀리 떨어진 그를 영지에서 끌어 내리고 중앙정부로 불러들임으로서 자신의 통제 하에 두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미 국민정부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성스차이는 1944년 9월 11일 농림부장에 취임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충칭으로 이동했고 다시는 신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로써 11년간 유지되었던 성스차이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중일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30일까지 농림부장으로 있다가 곡정강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해임되었다.

2.7. 말년

중일전쟁 승리 후 성스차이는 서북행영 참의로 임명되었으나 자신의 신강 통치 기간 동안 원한이 있던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재산을 약탈당했다. 1947년, 감찰원은 성스차이를 부패 혐의로 탄핵하였다. 1949년 5월에는 란저우에서 성스차이의 처가 식구들이 모조리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949년 국부천대가 단행된 후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며 총통부 국책고문, 국방부 고급참모, 행정원 설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만에서도 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암살의 공포에 시달렸으며 장제스가 특별히 파견한 병사들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말년에는 요식업에 투자하며 먹고 살았고 사업이 잘 안풀렸는지 생계 걱정까지 했다는 말이 있다.

신강성을 지배했던 세월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는데 1958년 미시간 주립대의 지원으로 영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제목은 "Sinkiang: Pawn or Pivot?" 1970년 타이베이 공군총의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명목상 국민당의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정부에서 나름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파일:성세재장례식.png
성스차이의 장례식

3. 매체에서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