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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국왕 센나케립 Sennacherib | |
<colbgcolor=#8B0000><colcolor=#fff,#fff> 칭호 |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왕 세계 네 귀퉁이의 왕 세상의 왕 |
출생 | 기원전 745년 |
아시리아 님루드 | |
사망 | 기원전 681년 10월 20일 (향년 64세) |
아시리아 니네베 | |
재위 기간 | 아시리아 국왕 |
기원전 705년 ~ 기원전 681년 (24년) | |
전임자 | 사르곤 2세 |
후임자 | 에사르하돈 |
부모 | 아버지 : 사르곤 2세 어머니 : 라이마 |
왕조 | 사르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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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이자 정복군주. 손자인 아슈르바니팔과 함께 신아시리아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2. 생애
부왕인 사르곤 2세가 수도를 님루드에서 두르샤루킨으로 천도하고 타발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센나케립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센나케립은 부왕인 사르곤 2세의 사망 이유가 신들의 분노라고 여기며 수도를 니네베로 천도했다.즉위하자마자 전쟁의 신이자 역병의 신인 네르갈의 신전을 재건하고 사르곤 2세의 사후 혼란스러워지던 아시리아의 패권을 다시 공고히 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들을 치르게 된다. 즉위하자마자 시작한 최초의 원정은 바빌론 남부에서 벌어진 칼데아인의 반란이었는데 사르곤 2세의 치세부터 계속 반란을 일으켜왔던 칼데아인의 족장 마르둑 아플라 이디나 2세[1]를 다시 격퇴하여 그를 엘람으로 쫓아낸다. 센나케립은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동안의 아시리아 왕들과 마찬가지로 바빌론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다.[2]
그러나 마르둑 아플라 이디나 2세는 이후 바빌론을 탈환하기 위해 근동의 여러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외교전을 펼쳤고 이에 응한 이집트가 가나안-시리아 지방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센나케립은 기원전 701년 이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조공을 중단한 유다 왕국도 다시 복속시키기 위해 공격했고 이때 유다 왕국의 대표적인 전략적 요충지였던 라기스를 점령한다.
하지만 어떤 알수 없는 이유로 센나케립은 유다 왕국의 조공만을 받고 철군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근동 국가들의 지원속에 여러 차례 마르둑 아플라 이디나 2세의 바빌론을 탈환하려는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기원전 694년 센나케립을 대신해 바빌론의 왕으로서 통치하던 장남이자 세자였던 아슈르나딘슈미가 엘람-칼데아인 연합군에게 처형당하자 센나케립은 복수를 위해 아예 엘람까지 쳐들어가 약탈했고 그동안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던 바빌론도 이때 완전히 파괴하면서 칼데아인과 아람인들을 강제로 아시리아로 끌고온다.
2.1. 성경에서
성경에선 산헤립(Sanherib)이란 이름으로 열왕기에서 언급되며 이로 인해 국내에선 센나케립이 아니라 산헤립이라 표기하는 서적들도 많다. 성경에선 위에서 언급된 701년 가나안-시리아 반란 진압의 일환이자 조공을 중단한 유다 왕국을 다시 한 번 복속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며 이때 하나님을 모욕했다가 18만의 군대가 하룻밤 만에 천사들에 의해 몰살되어 퇴각했다고 전해진다.해당 전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대한 내용은 히즈키야 항목 참고.
제2경전 토빗기에서는 살마네세르 5세(살만에셀, 살만에세르)는 선하여서 토비트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선했으나 그의 아들[3] 센나케립은 메디아를 가로막아 그들을 봉쇄하고 아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 대다수를 학살했는데 이때 토비트가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시체를 훔쳐 몰래 매장해줬다는게 발각되자 이 혐의로 센나케립은 토비트 가족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언급된다. 토빗기에서도 훗날 센나케립이 두 아들들에게 암살당했음이 언급된다.
3. 사망
기원전 681년 센나케립은 니네베의 신전에서 니스록에게 기도를 하던 중 자기 아들이던 아르다무리수와 나부샤르우수르[4]에게 뒤에서 단검에 찔려 암살당한다.암살당한 배경은 후계자 분쟁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장남이자 세자였던 아슈르나딘슈미가 기원전 694년 반란으로 사망한 후 차남인 아르다무리수가 세자가 되었지만 센나케립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르다무리수를 폐위하고 다섯째 아들인 에사르하돈[5]을 세자로 책봉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아르다무리수가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
아르다무리수는 암살 직후 즉위를 준비했지만 에사르하돈이 혼란스러운 왕실을 진정시키고 반란을 진압하며 부왕의 암살에 관여한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하자 동생인 나부샤르우수르와 함께 우라르투로 망명했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한 에사르하돈은 센나케립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왕으로 즉위한다.
[1] 성경에선 메로다크-발라단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2] 아시리아를 비롯해 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은 바빌론을 일종의 종교적 성지이자 문화의 중심지로서 존중했는데 이는 훗날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도 똑같이 바빌론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제국의 수도로 삼기도 했다.[3] 토빗기에선 아들이라 기록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손자이다.[4] 성경에선 아드람멜렉과 사레살이라고도 한다.[5] 성경에선 에살핫돈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