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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18:56:37

에사르하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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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국왕
에사르하돈
Esarhaddon
파일:에사르하돈.jpg
<colbgcolor=#8B0000><colcolor=#fff,#fff> 칭호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왕
세계 네 귀퉁이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이집트와 쿠시의 왕 중의 왕
세상의 왕
출생 기원전 713년
아시리아 니네베
사망 기원전 669년 (향년 44세)
아시리아 하란
재위 기간 아시리아 국왕
기원전 681년 ~ 기원전 669년 (12년)
전임자 센나케립
후임자 아슈르바니팔
부모 아버지 : 센나케립
어머니 : 나키아
부인 에사라-하메트
자녀 아슈르바니팔, 사마쉬슈므킨
왕조 사르곤 왕조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즉위 및 반란 진압2.3. 바빌론 복구와 이집트 정복2.4. 후계 지명 및 사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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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리아 제국의 왕이자 정복군주. 아버지 센나케립의 암살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아들 아슈르바니팔시대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일조하였다.

2. 생애

에사르하돈은 BC 713년 수도 니네베에서 아버지 센나케립, 어머니 니키아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 이미 센나케립의 장남 아슈르-나딘-슈미가 바빌론의 통치자로 지명되어 실질적인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외에 3명의 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1. 유년기

그의 유년기에 대해 남겨진 이야기는 많지 않다. 그러나 BC 694년 바빌론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첫째형 아슈르-나딘-슈미가 피살되며 센나케립의 휴계 구도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본래대로라면 차남, 즉 둘째형인 아르다무리수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어야 했으나 센나케립은 왕비 니키아 사이의 막내 아들, 에사르하돈을 후계자로 BC 684년에 지명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은 아버지 센나케립과 둘째 아르다무리수, 셋째 나보사르우스르 사이의 갈등을 촉발시켰고 결국 BC 681년 신전에서 기도를 하던 센나케립은 결국 아들들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2.2. 즉위 및 반란 진압


아버지를 죽인 아르다무리수는 동생을 제치고 왕위를 취하려 시도하게 된다. 이때 벌어진 사태는 추후 에사르하돈에게 일종의 PTSD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남성 왕족과 관료들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1]

아르다무리수는 왕위를 주장하였지만 에사르하돈은 부왕 센나케립 생전에 지명된 후계자였기에 비록 6주 간 내전이 지속되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살인자들을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한 뒤 그해 니네베에서 즉위하게 된다.

2.3. 바빌론 복구와 이집트 정복


즉위 후 에사르하돈은 부왕 통치 시 반란으로 파괴된 바빌론에 대한 복구 사업을 명령하게 된다. 이는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바빌론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부왕 센나케립은 장남 아슈르-나딘-슈미가 바빌론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바빌론을 파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에사르하돈은 바빌론을 복원함으로서 자신이 수메르의 적법한 통치자임을 공표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그의 명령으로 복원된 건축물은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인 에사르길라, 그리고 지구라트로 알려진 에테메난키, 그리고 도시의 이중 성벽 등이 있었다. [2][3] 그가 명령한 복원 사업은 그의 즉위 기간 중 계속 진행되었고, 장남 사마쉬슈므킨이 바빌론을 통치할 때에도 계속 진행되게 된다.

물론 그는 선대 아시리아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정복 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정복 사업은 BC 673년부터 시작된 이집트 및 쿠시 왕국 원정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누비아 출신의 쿠시 왕국에게 정복되어 흑인파라오의 통치를 받는 제25왕조시대였다.[4] 이는 본토 이집트인들의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고 이는 에사르하돈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집트의 파라오는 쿠시 왕국의 타하르카 왕이었는데, 그는 즉위한 BC 690년 이래 나일강의 적절한 범람 등 행운이 더해져 제25왕조 최전성기를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사르하돈은 BC 673년 이집트로의 원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 아시리아는 이집트 외에 우르라투, 엘람, 시돈 등 주변 왕국과의 분쟁 등이 겹쳤으며 이는 이집트 원정의 실패에 기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에사르하돈은 건강을 해치게 되었고 후일 그의 죽음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그는 1차 원정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BC 671년 2차 원정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때 하이집트[5]를 정복하게 된다. 이때 에사르하돈은 정복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하이집트 사이스의 지방관이었던 네코 1세를 파라오로 지명한 뒤 이집트를 조공국으로 삼아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6]

이때 하이집트를 빼앗긴 타하르카 왕은 상이집트를 방어했으나 에사르하돈의 후계자,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BC 667년에 상이집트까지 빼앗긴 뒤 본국 쿠시 왕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7]

2.4. 후계 지명 및 사망


부왕의 암살, 그리고 자신의 건강 악화는 그의 후계 결정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특히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된 당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그가 후계 지명에 신중하게 대응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당시 그는 아시리아 귀족 출신의 왕비
와 바빌론 출신의 왕비 에사르-하메트 등 후궁에 많은 부인을 둔 것으로 보이나 후계자로 내세울 자녀는 아시리아 출신 왕비 소생의 차남 아슈르바니팔과 에사르-하메트 소생의 장남 사마쉬슈므킨 뿐이었다. 일반적이라면 사마쉬슈므킨이 왕위를 계승했어야 했으나 생모 에사르-하메트가 바빌론 출신이라는 점이 안 그래도 왕비가 정치에 개입하는 데 불만이 컸던 아시리아 귀족들은 사마쉬슈므킨의 계승에 문제를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에사르하돈은 장남 사마쉬슈므킨에게 자신의 칭호 중 하나인 바빌론의 왕을 승계하고, 차남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왕으로 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거기에 아들들을 불러 모은 뒤 자신의 결정에 반하는 행위, 즉 반역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아들들간의 후계 문제로의 갈등을 제거하였다고 판단하게 된다. [8]

BC 669년 바빌론력 8월 10일[9], 그는 당시 반란이 발생한 이집트에 대한 3번째 원정을 가던 중 하란[10]에서 사망하게 된다. 당시의 기록은 그가 자연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행히 그는 생전에 이미 후계 문제를 모두 정리한 상태였고 그의 두 아들, 아슈르바니팔사마쉬슈므킨은 아시리아,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3. 여담


그는 부왕 센나케립, 그리고 할아버지 사르곤 2세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에 비해 편안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애 초기에 발생한 사건들로 인해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받은 것은 그가 부왕(64세)과 할아버지(55~65세)에 비해 이른 나이에 사망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버지, 아들의 업적에 비해 업적이 가려진 측면이 있어 후대의 청나라 옹정제, 프랑스 루이 13세 등과 비슷한 측면이 있으나 그의 재위 12년 동안 벌인 정복 사업과 바빌론 복구는 후일 아들 아슈르바니팔 시대의 전성기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한글 번역 성경에서 그는 에살핫돈 혹은 에사르 하똔 [11]으로 기술하고 있고, 성경 상의 그는 아버지 센나케립 [12]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명군으로 칭송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당시 남유다 왕국의 므나쎄 왕이 성경의 기록 상 하느님을 저버린 자이기에 그를 심판하기 위해 하느님에게 선택받아 유다 왕국을 정복하였다는 프레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 이로 인해 그의 즉위 연간 중 궁전의 경비 수준은 상당히 높았으며, 어머니 니키아, 누이 사리트라, 아내 에사르-하메트를 통해 통치를 대행하게 되며 아시리아 역사 상 여성의 권력이 가장 강해지게 된다.[2] 이에 대한 기록은 BC 670년에 제작된 에사르하돈의 바빌론 복원 기록 테라코타를 통해 확인되었다.[3] 다만 부왕의 바빌론 정복 당시 탈취했던 주신 마르두크의 신상은 돌려주지 않았다. 신상은 그의 아들 사마쉬슈므킨 통치 시 돌아오게 된다.[4] 해당 분류는 프톨라마이오스 시대 마네토에 의해 정리되었다.[5] 오늘날 나일강 하류 일대 등[6] 이를 제26왕조로 분류되는데, 일반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프삼티크 1세를 첫번째 파라오로 본다.[7] 이후 타하르카, 그리고 그의 후계자 타누타멘에 의해 일부 수복에 성공했지만 결국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결국 쿠시 왕국은 이집트를 잃게 된다.[8] 물론 이는 BC 652년 사마쉬슈므킨의 반란으로 깨지게 된다.[9] 율리우스력 11월 1일 추정[10] 오늘날 튀르키예 샨르우르파에 위치[11] 전자는 공통 번역 성경, 후자는 한국 천주교회 공용 번역 성경[12] 성경에서는 산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