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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5:07:02

송가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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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송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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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가오 | 아가데즈 | 사하라 종단 무역
후계 국가 덴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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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이 제국[1]
Songhai Empire
1464년 ~ 1603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말리 제국 사드 왕조
덴디 왕국
팀북투
위치 서아프리카
수도 가오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손니→아스키아[3]
주요 황제 아스키아 무함마드
언어 중세 송가이어
민족 송가이족 외 여러 서아프리카 부족들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국교)
아프리카 토착신앙
면적 800,000km2 (1550년)
주요사건 1464년 건국
1591년 모로코의 침공으로 쇠락
1603년 봉기 실패와 강제 분할 독립으로 멸망
통화 조개껍데기, , 소금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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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이 제국을 건국한 손니 알리 베르와 송가이의 도시, 군대[4]

1. 개요2. 역사
2.1. 건국 이전2.2. 건국2.3. 아스키아 무함마드2.4. 쇠퇴와 멸망
3. 역대 국왕4. 기타5. 각종 매체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5~16세기 서아프리카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이슬람 제국이다.

2. 역사

2.1. 건국 이전

송가이 제국이 발흥하기 이전 서아프리카 지방에서는 말리 제국이 13세기 이래 패권을 잡고 주변 지역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한창 시절의 말리 제국은 전세계 황금 생산량의 절반을 담당할 정도로 강성한 국가였으나, 워낙 분열하기 쉽고 내전이 자주 일어나는 부족 중심국가라는 체질상의 한계 탓에 결국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변의 소왕국과 부족들에게 사하라 사막과 지중해, 아랍권을 잇는 교역권을 빼앗겼고 말리 제국은 본거지인 만딩 지역만을 겨우 부여잡고 있는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말리 제국의 유산을 이어받아 새로운 서아프리카의 패자로 떠오른 것이 바로 송가이 제국이었다.

송가이 제국을 세운 송가이족은 제국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니제르 강가오 지방 주변에 부락을 세우고 살아가는 부족이었다. 초창기에 송가이족을 다스린 왕조는 '주와 왕조'라고 따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워낙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어쨌든 사하라 사막의 주요 교역 요충지들 중 하나였던 가오 지방에 자리를 틀고 앉았던 덕분에 송가이족은 이 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대상인들과 카라반들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거나 통행세를 받으며 세를 불려나갈 수 있었고, 10세기경에는 이렇게 축적한 부를 발판삼아 가오 왕국을 세웠다. 주된 교역품은 상아, 황금, 노예, 가죽, 대추야자 등이었다고 한다. 1300년대에 이르자 서아프리카 내에서 가오 왕국의 부유함을 모르는 국가가 없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이는 당시 활발히 정복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말리 제국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말리 제국은 곧 가오 왕국을 침공하여 복속, 지배했고 말리의 지배는 약 14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말리 제국 황실내의 내분과 제국의 쇠퇴로 인해 말리 제국의 식민지배는 오래가지 못했고, 송가이족은 점령당한 지 약 100여 년 후 말리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했다.[5]

2.2. 건국

말리 제국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끌었던 만사 슐레이만이 1360년경 세상을 하직한 이후 연이어 암군들이 즉위하면서 말리 제국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였으며 수많은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갔다. 무너져가는 제국을 어떻게든 부여잡기 위해 노력했던 마리 자타 2세는 투아레그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타케다 지역을 복속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송가이족이 일으킨 반란은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가오 지방과 송가이족은 100여 년 만에 말리 제국의 억압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말리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끈 왕은 손니 왕조의 손니 알리였다. 1464년부터 1492년까지 30여 년 가까이 재위한 손니 알리는 무슬림 국왕으로, 독립 직후부터 활발한 교역을 통해 부를 착실히 쌓아가는 동시에 인근의 부락과 마을들을 정벌하며 송가이족의 힘을 키웠다. 특히 군사적인 분야에서는 거의 천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오로 쳐들어오는 온갖 침입들을 물리쳤으며 1468년에는 대도시인 팀북투를 병합했다. 다만 또다른 대도시인 젠네를 함락하는 데는 꽤나 애를 먹어서 거의 7년 가까이나 되는 오래디 오랜 공성전을 펼쳐 시민들을 거의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며 1473년에 겨우 함락시켰다. 이렇게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친 손니 알리는 기본적으로 상당한 무자비한 군주였다고 전해진다. 이슬람 학자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팀북투를 함락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불태웠으며, 당시 아프리카 최고의 교육기관들 중 하나였던 상코레 대학을 파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합한 후에는 교육을 장려하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공과가 공존하는 군주였다.

손니 알리 이후 송가이의 국왕에 즉위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손니 바루였다. 그러나 손니 바루가 즉위하고 반 년 정도도 되지 않아 손니 알리 휘하의 장군들 중 하나였던 아스키아 무함마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손니 바루는 비참하게 목숨만 건진 채로 도망갔다. 손니 바루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 동안 송가이족들을 다스려온 손니 왕조의 마지막 왕인 손니 바루가 쫒겨나면서 송가이에는 새롭게 아스키아 왕조가 들어섰다.

2.3. 아스키아 무함마드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본디 왕위 계승권이 없었으나 손니 왕조의 손니 바루를 쫒아내고 왕위에 오른 탓에 굉장히 입지가 불안한 편이었다. 게다가 송가이족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들 중 하나도 아니었고, 소닝케족과의 피가 섞인 혼혈이라는 말도 돌고 있었기에 더욱 왕권이 위태위태했던 것이다. 때문에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즉위 직후 약간 입지가 흔들리는 듯 했지만, 그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결국 왕좌를 사수하고 송가이를 본격적인 대제국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새롭게 즉위한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손니 알리가 정복한 지역들의 행정을 재편성했고, 남쪽과 동쪽으로 활발한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는 민간인과 군인들을 철저히 구분하여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상비군의 개념을 송가이족에 도입했으며 그 덕에 당시 송가이족은 서아프리카 부족들 가운데 최강의 세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손니 알리에 비해서 군사적 재능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인근 소왕국들과 동맹을 맺고 적절한 외교술을 펼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덕분에 아스키아 치세의 송가이 제국은 손니 알리 시기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독실한 무슬림이기도 했던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각지에 여러 종교학교들을 건립하고 모스크들을 신축했으며, 사람들에게 이슬람 율법과 문학을 반강제적으로 주입하는 등 열성적으로 이슬람을 포교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저 옛 시절 만사 무사가 그랬던 것처럼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 왕국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옛날 만사 무사는 순례길 도중 들른 이집트카이로에서 엄청난 양의 금을 물쓰듯이 뿌려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자신의 부를 만천하에 과시했는데, 이를 똑같이 따라했던 것이다. 아스키아 무함마드 역시 메카로의 순례길에 막대한 양의 금을 지참하고 떠났고, 이를 메카의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인품을 알리는 동시에 아랍인들에게 송가이 제국의 부유함을 자랑했다.[6] 또한 가지고 간 금을 이용해서 돌아오는 길에 모로코이집트의 학자들을 꼬여와 당시 송가이 내 최고의 대학이었던 상코레 대학에 초청해 교수로 일하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지중해, 아랍권에서 유행했던 천문학 열풍을 그대로 제국 내부로 들여와 수도인 가오에 수많은 천문대를 지으며 송가이의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업적을 남겼다.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그 외에도 세제를 정리하고 행정제도 정비, 운하 정비, 무역 장려, 염전 생산 장려 등 수많은 업적들을 남기며 송가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4. 쇠퇴와 멸망

다만 이렇게 강력하고 많은 업적들을 남겼던 아스키아 무함마드 역시 나이가 들면서 국정 장악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1528년에는 그의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스키아 무함마드를 폐위하고 아스키아 무사를 새로운 황제에 올렸다. 이를 기점으로 송가이 제국은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아스키아 무함마드의 후손들은 필사적으로 무너져가는 제국을 되살리려 노력했으나 이미 한 번 시작한 망조의 흐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수많은 내전들이 연이어 겹쳐 일어났고 왕위 계승 문제로 왕족들 간의 권력다툼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모로코 사드 왕조의 만수르 1세가 송가이 제국에 쳐들어왔다. 송가이 제국 정벌을 통해서 사하라와 지중해권을 잇는 교역로를 독점하고 황금과 노예 무역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모로코는 상대적으로 유럽과 가깝다는 이점을 이용해서 수천 정의 핸드캐논과 8문의 거대한 영국제 대포를 몰고 송가이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아스키아 무함마드 이래 무기 근대화에 관심이 없어 칼과 창, 활 같은 원시적인 무기들만을 가지고 있었던 송가이 제국은 모로코의 근대식 군대에 맞설 힘이 없었다. 결국 1591년 3월 13일에 일어난 톤디비 전투에서 송가이족이 대패했고[7], 이로 인해 송가이 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송가이 제국이 멸망한 직후, 아스키아 황족과 일부 가신들은 남쪽으로 도망쳐 여러 망명 소왕국들을 세웠다. 다만 이 지역에는 이미 옛날에 아스키아 왕조에 쫓겨나 도망쳐온 손니 왕조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고, 또 이들끼리 분탕질을 치며 내란이 일어났다. 송가이 제국 멸망 이후 상당한 수의 왕국들이 송가이 제국의 후계를 주장했으나 그 어떠한 왕국도 송가이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조금 세를 불렸던 것이 덴디 왕국 정도? 그러다가 덴디 왕국도 1901년 프랑스에 합병당했다.

3. 역대 국왕

4. 기타

사회 최상층은 귀족, 그 다음으로 송가이족 자유민과 상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아래 계층으로는 수공업자, 어민, 목공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민자들이 있었다. 최하 신분으로는 농업에 종사하는 전쟁포로나 노예가 있었다.

말리 제국처럼 이 미친 듯이 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금을 수출해 많은 부를 얻었다. 하지만 소금을 800km밖에서 가져온것을 보면 소금은 매우 귀했다는 듯하다.. 그 때문인지 1590년 모로코군에게 테가자의 소금 광산이 털리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5. 각종 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송가이어로 soŋaj라 발음한다.[2] 1500년경의 최대 강역[3] 군주 칭호가 '손니'에서 '아스키아'로 바뀐걸 기준으로 손니 왕조와 아스키아 왕조를 구별한다. 제국의 군주라는 의미에서 황제로 번역해도 무방하나, 서아프리카 제국들은 딱히 왕과 황제 칭호의 구별이 없어서 왕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4] 앤하이저부시의 협찬으로 제작된 Great Kings and Queens of Africa 시리즈의 일부분이다. 손니 알리 베르 부분을 그린 사람은 레오 딜런. 만사 무사말리 제국의 도시를 그린 그림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일러스트이기도 하다.[5] 1353년 당시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송가이족의 본거지인 가오를 방문했을 때 송가이족은 여전히 말리 제국 치하에 있었다.[6] 참고로 아랍인들은 옛 만사 무사 시절만큼 아스키아 무함마드의 순례에 열광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때보다 서아프리카 지역이 더 잘 알려져서 이쪽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깨졌기도 했었고, 기본적으로 아스키아 무함마드가 가지고 간 금의 양이 만사 무사의 것보다 확연하게 적었기 때문에....[7] 모로코 군대가 쏘아대는 대포의 포탄 소리를 듣고 송가이 군대 후방의 소떼가 놀라서 미쳐 날뛰는 바람에 송가이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던 기병들의 말들도 놀라서 동요했고, 그로 인해 모로코 군대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