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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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남베트남 관계 |
1. 개요
송나라와 베트남 간의 관계를 다룬 문서이다.2. 역사
2.1. 초기
베트남은 939년 오랜 시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당시 중국은 오대십국의 혼란이 지속되었다. 응오 꾸옌은 십국 정권 중 하나인 남한의 간섭을 뿌리치고 응오 왕조를 세운다.그러나 1000년 이상 지속된 중국의 지배로 인해 베트남 사회에 중국의 영향이 너무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토착 사회에도 중국과 연계된 세력이 많았다. 또한 각 정치 집단 간 경쟁과 지역 간 대립도 치열했다.
939년 응오 왕조 성립 이후 1009년 리 왕조가 세워질 때까지 베트남에는 12사군의 동란시대, 딘 왕조, 띠엔 레 시대 등으로 격변을 겪었다.[1]
980년 레 호안이 레 왕조를 세우고, 송 태종은 대군을 파견해 베트남을 복속시키고자 하나 베트남 정벌군 사령관인 후인보가 죽는 등[2] 실패한다.
레호안은 송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침략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포로로 잡힌 송나라 병사와 함께 조공(선물)을 송나라에 보내는데, 이에 송나라는 못이기는 척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화친을 맺은 후, 991년 레 왕조에 방문한 송나라 사신이 온갖 푸대접을 받고 베트남 사람들의 해괴한 기행에 시달렸다.
북송 사신은 칙서를 가지고 왔으니 베트남 왕은 무릎을 꿇어 받으라고 하였고 레호안은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하자 사신이 우물쭈물했다.
이후 식사 시간이 되자 레호안은 직접 물고기를 대접하겠다고 하고 북송 사신은 당황한다. 레호안은 이에 아랑곳 않고 사신과 베트남 신료들을 강둑으로 데려간 뒤 레호안은 작살을 들어 물고기를 잡았고 물고기가 잡힐 때마다 조정대신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후 레호안은 송나라 사신에게 거대한 뱀을 떨궈놓더니, 송나라 사람들의 취향을 몰라서 각자의 기호와 취향에 맞게 요리하라고 말하였다.
송나라는 앞선 침략전쟁에서 대장이 죽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태였던 데다가 북쪽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압박이 심해진 상황임에도 애써 베트남인들에게 당한 굴욕을 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 이후, 평온한 관계가 지속된다. 송 진종과 송 인종 시대까지는 베트남과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후에도 소규모 분쟁과 전투가 있었다. 특히 이들이 광원주 일대의 농씨 세력에 많았다. 광원주[3]에는 금과 은이 많아 북송과 베트남이 이 곳으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은 북송과 베트남의 압박을 받으며 양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송 진종과 송 인종은 베트남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광원주의 농존복, 농지고 부자가 1040년 반란을 일으키고 이는 1053년 적청에 의해 평정되었다.
2.2. 송월희녕전쟁 시기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 시기 모든 것이 변하였다. 왕안석과 송 신종은 대외정벌을 통해, 공업을 이루고 송조의 국세를 떨치고자 하였다. 북송 정권은 1073년 광서 지역에 심기와 유이를 파견하여 베트남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군사적 대비를 증강시켰다.그러자 이에 위협을 느낀 베트남이 북송군을 선제공격하였다.
여기서 북송과 리 왕조 간 전쟁이 벌어진 데는 서백상이라는 관리가 리 왕조에 편지를 보낸 것도 한 몫 했다고 한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篇》에 따르면, 희녕(熙寧) 연간 교지국의 국력이 강해지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심기(沈起), 유이(劉彝) 등을 파견하여 서남쪽을 관리하며, 군대를 정비하고 군량을 결집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남 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송나라의 군사 활동은 염주(廉州)[4] 출신의 서생 서백상(徐伯祥)의 주목을 끌게 하였다.
서백상은 10년이 넘도록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으나, 계속 낙방하였다. 서백상은 나이도 들어가면서 과거 시험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서백상은 허송세월과 헛공부에 울분과 원한이 쌓여갔다. 서백상은, 송나라 황제나 관리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믿고 있었다.
서백상은 북송과 교지국의 관계가 일촉즉발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송나라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송나라의 관가[5]가 나를 중용하지 않겠다면, 이제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다.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있을 것이다.
서백상은 붓을 들어 교지국의 왕에게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記聞》 등 여러 기록에는 서백상의 서신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교지국) 대왕의 조상들은 민(閩)[6] 지방에서 오셨고, 대왕의 대신들은 대부분 중원(中原)에서 왔습니다. 소인이 외람되게 서신을 드리는 것은, 중원의 황제[7]가 소인을 중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대왕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할 것이옵니다. 현재 두 나라의 형세는 매우 긴장되어 있는데, 대왕께서 먼저 손을 쓰시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며, 소인은 송나라 쪽에서 호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편지 한 통에 이건덕은 크게 고무되었다. 당시 리 왕조의 군대는 매우 강하였다. 리 왕조의 이건덕은 대신들을 불러 송나라를 토벌하는 일을 상의하고 출병을 결정하였다. 리 왕조는 1075년 두 갈래로 나뉘어 광서 지역을 침공하였다.
리 왕조의 선제공격에 송나라의 지방 수비군은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교지국이 이렇게 대규모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리라는 것을 송나라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교지국의 8만 대군은 연전연승을 하며 많은 성(城)을 점령하였다.
그해 11월, 리 왕조의 대군은 연속하여 흠주(欽州)[8]와 염주(廉州)[9]를 돌파하고, 옹주(邕州)[10]를 포위하였다.
옹주를 수비하던 장군 소함(蘇緘)은 전투에 능하고 용감하였는데, 그는 2800명의 병사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교지국의 대군은 밤낮으로 맹공을 퍼부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옹주(邕州)의 약한 병력으로 대군을 막아내기 어려웠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불리해기 시작하였다. 송나라 조정에서 보낸 구원군은 천리 밖에 있었다. 소함(蘇緘)이 결사 항전 중인 옹주성의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났다. 옹주성은 42일 간의 항전 끝에 결국 함락되었고, 소함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
그러나 리 왕조의 지휘관인 이상걸(李常杰)도 송나라 군대의 결사 항전에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이상걸은 이 결과에 분노하며, 흠주(欽州), 렴주(廉州), 옹주(邕州) 세 곳의 백성들을 상대로 피의 보복을 시작하였다.
군민(郡民) 5만여 명을 죽였다. 100명을 한 단위로 하여 580여개의 단위로 죽였는데, 3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강을 메웠다.
《송사/宋史》
북송 정권은 11월 5일이 되어서야 베트남이 군대를 결집시키고 두 갈래로 침공한다는 보고를 받는다. 한 부대는 해로를 통해 흠주와 염주로 진격하고 다른 부대는 육로를 통해 옹주를 공격했다.《송사/宋史》
리 왕조의 군대는 점령지마다 주로 가로에 방문을 내걸고 침입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왕안석의 신법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중국에서 청묘법과 모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이 곤경에 처해 있다. 우리가 지금 군대를 내는 것은 그 난리에서 구해내고자 함이다.
리 왕조의 군대가 옹주로 진격하나 북송군의 방비는 빈약했고 병사의 수는 금군과 상군을 포함해 2,800명이었다. 12월에 베트남 군대가 옹주를 포위한 이래 북송의 군대가 이에 맞섰으나 1076년 정월 23일 함락당하고 만다. 그 이후 흠주와 염주를 함락시킨 뒤 참혹한 살육, 약탈을 자행하는 등 북송 측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북송 왕조는 징벌 및 이 기회를 틈타 베트남을 정복하여 도로 중국에 편입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전면적인 베트남 원정을 일으키게 된다.1075년 12월 북송 정권은 각지에서[11] 군대를 차출하여 베트남 정벌군을 편성하였고 점성 및 진랍 지역에 사자를 파견하여 베트남 전선에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모집한 군대가 1076년 진군하자 리 왕조의 광원주 관찰사 유기가 항복한 뒤 이어 인근 소수민족들이 연이어 투항했다. 이어 1077년 사령관 곽규[12]의 군대도 베트남 영역에 진입하였다. 리 왕조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우고 저항하나 북송군은 화살을 발사하고 코끼리 코를 베어 가며 전투를 벌이자 리 왕조의 부대는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다.
곽규의 군대가 1076년 12월 21일 부양강에 도착하였고 리 왕조는 모든 배들을 강 남쪽에 집결시켜 정박해 두었다. 북송군은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태였는데, 북송 측의 연달[13]이라는 장수가 선봉을 자청하였고 자신이 소규모 부대로 전투를 벌였다가 계속 달아남으로써 리 왕조 측을 유인하겠다고 했고, 최후의 전투 부량강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중국 측 기록과 베트남 측 기록이 다르다.
송 측 기록은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홍진태자[14]가 전사할 정도로 대패를 당했다는 기록과 적이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아 강물이 3일 간 흐르지 않았고, 1000여 명을 참하는 대승을 거둔 데다가 수많은 적의 장수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 기록이었다.
반면 베트남 측 기록에서는 리트엉끼엣이 송군이 지친 걸 알고 밤에 강을 건너 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고 송의 전사자가 10에 5,6이 되었고 광원주를 되찾았다고 한다.
리트엉끼엣은 송의 군대가 지친 것을 알고 밤에 강을 건너 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송의 전사자는 10에 5,6명이나 되었고 결국 광원주도 되찾을 수 있었다.
《월사략》
《월사략》
그 뒤 북송군이 부량강 전투 이후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고 곽규는 철군 전 이렇게 한탄했다.[15][16][17]
나는 결국 적의 소굴을 뒤엎고 이건덕을 포로로 잡지 못한 채 되돌아간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내 일신으로 모든 전쟁의 책임을 지고 10여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
북송군은 당시 군대와 식량이 바닥났고, 전체 병사들 대부분이 더위와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베트남 측이 북송에 강화를 요청했다. 베트남은 접경 지역 5개 주[18]를 할양하겠다는 것을 약속한다. 북송은 이 5개의 주를 할양받아 이 5개의 주에 대한 통치 및 내지화를 진행시켜 나가지만 현지의 습속 및 풍토가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관리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1077년 여름 이래 지속적으로 리 왕조의 침공을 받았는데, 기랑 현과 광랑 현이 점령당하였음에도 북송 정권에서는 5개주를 유지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리 왕조가 5개주를 반환할 것을 요청하자 결국 북송 정권에서 승인하게 되었고, 1079년 이 지역을 반환하게 된다.
2.3. 송월희녕전쟁 이후와 남송 시대
전쟁 이후, 왕안석 시기의 침공을 끝으로 정복 정책을 포기하고 베트남 군주에 대한 호칭을 왕으로 격상시켜 베트남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했다.쩐 왕조가 세워지자,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대내적으로 리 왕조 말에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대외적으로는 남송과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몽골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 체재를 강화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내부적으로 안정이 되자, 쩐 왕조는 1229년 남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관계를 맺었다.
이에, 몽골은 남송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는 베트남에 대해서 간섭하였다. 1257년 몽골이 탕롱을 공략하면서 남송과의 조공관계가 막히기도 했지만, 쩐 왕조 초기에 남송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했다.
남송과의 조공과 책봉관계 수립은 쩐 왕조의 존립과 직결되어 있는 국가 안보의 문제였다. 만약, 남송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 베트남은 바로 몽골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남송은 그야말로 순망치한의 관계였다. 때문에 몽골과 전쟁 이후에도 베트남과 남송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베트남과 남송과의 관계는 남송과 몽골의 관계가 악화될수록 더욱 긴밀해졌다.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1] 중국 왕조는 베트남의 정권 변천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고자 하였고 응오 꾸옌은 그걸 막기 위해 남한의 군대를 막아내고 나서야 독립에 성공한다.[2] 레 호안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3] 좌강 상류 지방으로, 현재의 까오방 동부에 위치한 꽝 응우옌 일대이다.[4] 오늘날 광서 합포[5] 송나라 때 황제에 대한 호칭이다.[6] 복건성 지역[7] 송 신종을 의미한다.[8] 지금의 광서성 흠주 지역[9] 지금의 광서성 합포[10] 지금의 광서성 남녕[11] 서북 지방에서 정예병 10만을 차출했고, 광서, 형호, 광동, 하북 등지에서도 병사와 물자를 차출했는데, 광서 지역에서는 현지에서 병사를 모집했다.[12] 초기에는 범중엄의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서하 전선에 있으면서 임복과 갈회민의 패배를 예견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되었고 임복과 갈회민이 패사했다. 이후 송 신종 시기인 1067년 충악이 조정의 승인도 없이 서하의 수주를 공격해 점령하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해 양정을 살해하는 등 막해한 피해를 입혀 송 조정에서는 수주를 반환해야 한다고 했는데, 송 신종의 조서를 은닉하는 등 반대함으로써, 수주가 북송의 영토로 남는 데 큰 기여를 한다.[13] 곽규와 마찬가지로 서하 전선에서 활동한 장수였다. 곽규의 부장으로 출전했다.[14] 베트남 측 사서에서 굉진후라 일컫고 있는 장수라고 한다.[15] 곽규는 자신의 철군이 부득이한 것이며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라고 밝혔다.[16] 곽규가 철군을 결정할 당시, 송군은 더이상 전투 수행이 불가능했으며 그의 부장들은 전투의 종결과 철군을 권유했다.[17] 곽규는 철군 뒤 면직되고 만다.[18] 소무주, 사랑주, 문주, 양주, 광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