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법인 송도학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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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교법인 송도학원은 좌옹 윤치호가 1906년 설립한 한영서원을 전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학교 법인이다. 1982년부터 OCI가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원래는 개성시를 근거지로 삼고 학교를 운영했으나 6.25 전쟁 이후 인천광역시로 남하해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법인의 명칭이자 학교의 명칭인 송도(松都)는 원래 학교가 있었던 개성의 옛 이름이다. 송도고등학교 인근에 있는 송도역이나 송도국제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2. 역사
2.1. 한영서원
송도학원의 전신은 윤치호가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의 후원을 얻어 1906년 10월 3일 개성 송악산 산지현에 설립한 한영서원이다. 초기 한영서원의 원사는 초가 지붕의 뜸집이었고 한영서원이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달려 있었으며 원훈은 奉事라 하였다. 당시 원훈을 현재 송도학원 산하의 학교들이 그대로 사용 중인데, 원래 봉사라 함은 奉仕로 쓰이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윤치호는 "받들어 일하다", "받들어 섬기다"의 의미로 "남을 위해서 일하라"라는 뜻을 담아 奉事라고 원훈을 붙였다.2.2.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
송도고보로 불리던 시절의 일이다. 1915년 3월 일제의 사립학교 규칙 개정에 의해 한영서원도 교명을 개칭하여야 했지만, 일제에 대한 반항심으로 버티다가 1917년 3월 20일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칭했다. 그리고 1922년 4월 1일 신조선교육령에 의해 다시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칭했다. 초기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사는 한영서원 시절 원사가 있던 자리에 이십여 간 가옥을 건축하여 사용하였다가, 후에 120평 규모의 3층 석실이 준공되어 고등과가 분리 이전하였다. 이후에 120평의 석조 실업장, 22평의 온돌식 석조 기숙사, 44평의 기도실이 준공되었고, 1920년에는 130평의 조선식 외가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1921년에는 570평 규모의 교사 본관을 준공하였는데, 화강암으로 건축되어 신식 보일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1923년에는 120평의 석조 체조장을 증축하였다.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는 총 학생 수가 800여명으로, 한 학년에 3학급, 한 학급에 50명 미만이었다.
2.3. 송도학원 (송도중·고등학교)
38선 최초 획정 당시만 해도 송도고등보통학교가 있던 개성은 남한의 땅이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북한의 땅이 되었다. 1950년 10월 9일에 개성이 수복됨에 따라 잠시 개교하였으나 국군이 개성지구에서 후퇴하면서 1950년 12월 13일 다시 무기 휴교와 함께 38선 밑으로 내려왔다.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개성이 끝내 미수복지로 남게 될 것을 느낀 최규남, 윤영선, 박홍근, 김성찬 등이 모여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수습을 위한 재단 이사회를 열었고 송도고등보통학교 당시 7대 교장으로 역임했던 김준옥이 이사회를 이끌어 이전 개교 준비를 하였다. 학교를 어디에 세워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서울 영등포, 경기 인천, 경기 수원 등이 그 후보지로 올라왔는데 경기도와 강화도에 있는 많은 개성·연백 출신 피난 학생을 고려하여 그 중심지인 경기도 인천시에 약학대학을 제외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만을 개교하기로 하였다.
김준옥은 인천에서 개교 준비 사무실을 인천고등학교 내에 설치하였고 전쟁으로 흩어진 교사들과 학생들 중에서 연락이 가능한 사람을 모두 소집하였으며 인천직할시 4대 시장 박학전의 도움으로 자유공원 밑에 있는 현 남부교육지원청 청사 자리를 임시 교사로 사용했다.
1952년 5월 11일엔 인천시 송학동 소재 530평의 가교사에 14개의 교실을 기공하여 1953년 3월에 증축을 완료하였지만, 당시 송도학원의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1953년 현재의 답동 부지에 교사 1동을 겨우 신축하고 이곳으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나 피난학교라는 특성으로 안정감이 적었다. 특히 애초에 인천에 있던 학교가 아니었기에 인천 내에서도 인지도가 매우 부족해 학생 모집에서조차 많은 애로가 있었다. 그러나 송도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윤원식이 춘천사범학교에서 송도학원의 10대 교장으로 이적하여 학교의 상황을 안정시켰고 송도학원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답동 교사는 증가하는 학생 수를 모두 수용하기엔 너무 협소하였고 1960~1970년대 역대 교장들이 교정 주변의 땅을 인수하며 교지 확장에 힘을 썼으나 당시 인천시의 중심에 위치한 답동 교사의 특징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던 중 윤원식 10대 교장 재임 시절에 학교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해 두었던 구월동 부지가 국가의 수용령에 의해 국가에 판매되었다. 국가에 구월동 부지를 판매한 대금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 분리 계획이 추진되었고 박홍근 이사와 윤덕현 교장이 협의하여 1979년 8월 29일 옥련동 바위산의 6300평을 매입하여 옥련동 부지가 마련되었다. 원래는 이 부지에 36개 교실을 갖춘 학교 건물을 지은 뒤 중학교를 이전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교사 신축 공사는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도 계속되었으나 자금의 압박으로 공사의 진척이 어렵게 되었다. 결국 이사회는 당초 중학교 이전 계획을 보류하고 학급 수가 비교적 적은 고등학교를 이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여 2층까지만 완공하기로 했다. 그런데 2층까지의 마무리 공사마저 자금난으로 어렵게 되자 이사회의 협의 하에 송도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동양화학을 이끌고 있던 송암 이회림 회장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회림 회장은 모교 이사회의 자금 지원 요청을 흔쾌히 승낙하여 공사는 재개되었다. 이회림 회장은 교사 신축에 적극적으로 혐조하여 본래 2층까지만 완공하기로 했던 공사를 자비로 3층까지 완공시켰고, 운동장 약 7,000평의 공사를 동양화학의 기술진과 중장비를 동원해 완성시켰다. 여기에 더해 동양화학 회사 차원에서 송도학원의 인수를 결정했고 이회림 회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83년 9월 2일 고등학교의 773평 규모 체육관과 특별관(현 국제관)을 신축하였다.
이리하여 1970년대부터 추진됐던 송도학원 내 중학-고교의 분리가 1983년에 이뤄졌고 송도고등학교는 1983년 신학기부터 옥련동 교사에서의 운영을 시작했다. 중학교는 답동 교사 전체를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