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트램펄린 선수였고 1986 세계선수권에 프랑스 대표로 참가해 덤블링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경력이 있다. 여러 운동을 두루두루 잘했지만 피겨 스케이팅에 가장 큰 재능을 보였다. 11살 때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는데, 당시 니스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도중 디디에 가가[2] 코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이후 파리로 이사했으나 집이 없어서 자동차에서 지냈다.
네벨혼 트로피에서 우승했고 1989 스케이트 아메리카와 1989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각각 6위와 7위를 기록했다. 1989 랄리크에서는 우승했다. 1990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따고 프랑스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했다. 1990 유럽선수권에서 4위, 1990 세계선수권에서는 8위를 기록했다.
네벨혼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친선경기에서 동메달을 땄다. 1990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5위, 1990 랄리크에서 우승했다. 1991 주니어 세계선수권과 프랑스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1991 유럽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첫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얻었다. 1991 세계선수권에서는 5위에 올랐다.
4개의 그랑프리 시리즈에 참가해 1위, 2위, 3위, 5위를 기록했다. 프랑스선수권에서는 4연패, 1992 유럽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했다.
자국에서 열린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 3위로 프리 진출을 했다. 프리에서는 여자 선수로서는 최초로 쿼트러플 토룹을 선보였음에도, 자잘한 실수와 구성점수를 낮게 받아 5위에 그쳤다. 당시, 보날리는 프랑스 언론의 관심과 메달 압박감 때문에 울음 터지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올림픽이 끝나고 열린 1992 세계선수권에서는 11위를 기록했다.
1994 세계선수권에서는 사토 유카에게 우승을 내주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보날리는 유럽선수권을 5번이나 우승했던 선수인데, 이번 경기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건 흑인이기 때문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수리야 보날리는 시상식에서 포디움에 올라서는 것을 거부하고 얼음 위에 서 있어서, 시상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시상대에 올려야 했다.[3]
이 은메달 거부 사건은 인종 차별에 대한 반대 운동에 불을 지폈다. 한편 그녀의 경기가 저평가된 이유로 기존 보수적이던 피겨 스케이팅에서 추구하던 고전적인 여성미가 아닌, 강인하고 남성적인 활동성(Athleticism)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백인이었다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남성이었다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팬들도 있다. 어찌 되었든 피겨계가 고전적인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가두고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강요한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웠다. 당시, 심판진들이 그녀의 경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 타라 리핀스키의 인터뷰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같이 경쟁했던 선수들에 비해 스케이팅 요소와 클래시컬함이 뒤떨어져서 최상의 구성점을 잘 받기 힘든 타입의 선수였던 것은 사실이다.
1997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동메달, 1997 컵 오브 러시아에서 4위를 기록했다. 프랑스선수권에서는 래티샤 후버트에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8 유럽선수권에서는 6위를 기록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이미 메달 가능성이 멀어지자, 그동안의 울분을 털어내려는 듯 피겨 스케이팅 공식 경기에서 금지된 백플립 기술을 선보였다.[4] 결국 금지된 기술을 선보인 것 때문에 감점을 받아 10위에 머물렀다. 백플립이 나올 당시 일본 측 해설은 그간 보날리가 당한 차별이 상기됐는지 순간 말을 잇지 못했고, 미국 NBC 측 해설은 보날리가 이왕 메달권도 아니니 백플립으로 감점받아도 상관 없다는 생각으로 한 것 같다는 평을 했다. 수리야의 점수가 나오자 관중들은 수리야를 향한 야유가 아니라 부당한 심판들과 경직된 피겨계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은퇴한 후 2000년대 후반까지 프로 선수로 스케이팅 쇼에 출연하였다. 프로에서도 은퇴한 후에는 미네소타 주에서 코치 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채식주의자이기도 한 수리야는 동물 보호론자로 활동하기도 했고, PETA의 홍보 모델로도 활동했다.
한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 근처의 섬인 레위니옹 출신이며 부모에게 버려져 코코넛이 널려 있는 해변에서 발견된 고아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사실이 아니다. 그녀의 코치였던 디디에 게일하게가 그녀를 '이국적이고 신비한, 그리고 극적인' 존재로 팔아먹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낸 내용 중 하나였다. 수리야 보날리는 실제로는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고, 비록 생모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진 것은 사실이나 건축가인 아버지와 체조 선수 출신 어머니 슬하로 입양되어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승마, 펜싱, 플루트를 배우는 등 유복하게 자라났다. 레위니옹 출신인 것은 수리야 보날리의 생모이며, 생부는 코트디부아르 출신이다.
기계체조 선수인 어머니에게서 점프 기술을 배웠고, 타고난 탄력을 바탕으로 당시 다른 선수들과 격이 다른 점프를 했다. 쿼트러플 외에도 1993년 파리 라리크 대회에서는 트리플 점프를 6회나 성공시켰는가 하면, 1994 유럽선수권에서는 트리플 살코-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존재하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로 기술점수에 비해 구성점수를 매우 박하게 받는 차별을 받고 있다는 논란이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는 "내가 백인이었다면 훨씬 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며, 더 큰 지원도 따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 점수에 비해 구성 점수가 낮은 게 차별이 아니라 정말로 표현력과 스케이팅 스킬이 부족했다는 반론도 역시 있으며, 당시에 손꼽힐 만큼의 안좋은 스케이팅을 구사할 정도로 기본기가 부족했다고 한다. 그냥 점핑만 할 줄 아는 점핑 빈(Jumping Bean)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백플립 기술은 아이스 쇼에서는 종종 나오는 기술이다. 다만, ISU에서는 이 기술이 위험하다고 해서 공식 경기에서는 금지시켰으며, 수리야 보날리가 이 기술을 사용하기 전부터 금지되어 있었다. 공식 대회에서 금지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을 성공시킨 것은 수리야 보날리가 유일하다. 본인은 이 기술을 심사위원이 아닌 자신을 응원해 준 관중들을 위해 보여준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