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콴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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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bfff><colcolor=#ffffff> 미셸 콴 Michelle Kwan | |
2003 세계선수권에서 통산 5번째 금메달 획득 당시 | |
본명 | 미셸 윙산 콴 Gwaan1 Wing6 Saan1[1] Michelle Wingshan Kwan |
중국명 | 관 잉샨([ruby(關穎珊, ruby=Guān Yǐngshān)])[2] |
출생 | 1980년 7월 7일 ([age(1980-07-07)]세)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토런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종목 | 피겨 스케이팅 |
은퇴 | 2008년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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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계 미국인 前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만 5세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고, 다음 해부터 전문 수업을 받고 각종 지역 대회에서 우승했다. 8세 때 프랭크 캐롤 코치를 만났다. 이때 캐럴의 평가는 "기운만 세고 섬세하지도 않고 예술성도 없는 말괄량이"라고 평가했다.그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콴은 빨리 시니어로 나가고 싶어했지만, 캐롤 코치는 기술성과 예술성을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질세라 콴은 훈련 시간을 2배로 늘려 학교를 다니면서 하루 3시간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콴은 하루 4시간을 훈련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졸랐지만, 성장기이던 콴의 몸을 걱정한 부모는 거절했다. 그리고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공부도 뒤쳐지지 않게 만들었다.
2.2. 1992-93 시즌
불과 만 12세로 1993 전미선수권을 통해 시니어 데뷔하여 6위를 차지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국제대회인 가데나 스프링 트로피 주니어 부문에서 우승하였다.[3]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미셸 콴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2.3. 1993-94 시즌
1993년 7월 만 13세가 된 콴은 올림픽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이었던 데다 6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켜 관중과 전문가들을 경악시킨다. 이때 떨리지 않냐고 물었던 한 인터뷰의 대답이 대단하다. "저의 기분이 어떻건, 관중이 많건 적건 저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합니다." 과연 어렸을 때부터 기질이 보였다. 외에도 친선경기 2위, 스케이트 아메리카[4]에서 7위를 하였다. 1993년 11월~12월에 걸쳐 열린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만 13세 5개월이 조금 안 된 나이로 우승하였다.1994 전미선수권[5] |
이후 1994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여[7] 쇼트에서 실수가 많아 11위, 프리에서는 6위를 기록하였고 종합 8위로 경기를 마감하였다.
2.4. 1994-95 시즌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 트로피 랄리크에서 동메달을 땄다. 전미선수권에서 2위, 1995 세계선수권 4위를 차지했다.2.5. 1995-96 시즌
챔피언 시리즈 스케이트 아메리카, 스케이트 캐나다, 나치온스 컵에서 모두 우승했다.[8] 이어 1995-96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에서도 우승하며 그랑프리 파이널의 초대 우승자가 되었다.1996 세계선수권 |
그러나 이 대회가 캐나다가 아닌 다른 대륙(아시아나 유럽)에서 열렸다면, 중국 심판이 없이도 예술점수 6.0점을 2개나 받은 천루가 금메달이었을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미국과 일본 심판이 프리에서 의도적으로 예술점수 6.0점을 마지막 출전 선수인 콴에게 주었는데, 이 점만 아니었다면 전년도 우승자인 천루에게 금메달이 돌아갔을 것이다.[9]
2.6. 1996-97 시즌
스케이트 아메리카와 트로피 랄리크에서 모두 우승하고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였지만 타라 리핀스키에 밀려 1996-97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에서는 은메달을 땄다.1997 세계선수권 |
2.7. 1997-98 시즌
친선경기에서 우승하며 시즌을 시작하였다.1997 스케이트 아메리카 | 1997 스케이트 캐나다 | 1998 전미선수권 |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 1998 세계선수권 |
2.8. 1998-99 시즌
비록 그랑프리 시리즈를 건너뛰고 TV를 위해 만들어진 Pro-Am 시리즈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이 시즌에도 계속해서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1999 전미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번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1999 세계선수권 |
2.9. 1999-00 시즌
1999 스케이트 아메리카 | 1999 스케이트 캐나다 |
2000 전미선수권 | 2000 세계선수권 |
2.10. 2000-01 시즌
이 시즌부터 향후 5년 동안, 콴은 대회와 갈라 의상의 대부분을 디자인할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전직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기도 한 베라 왕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이는 낸시 케리건[11]에 이은 두번째 사례였다.2000 스케이트 아메리카 | 2000 스케이트 캐나다 |
2001 전미선수권 | 2001 세계선수권 |
2001 세계선수권에서는 2연패이자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대회 우승자는 3연속 점프(3-3-2 점프)까지 성공시킨 이리나 슬루츠카야였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유로 해설자는 콴의 우승이 말이 안된다고 생중계로 해설할 정도였고, 또 한번 국적빨 우승이라는 말이 많았다.[12]
2.11. 2001-02 시즌
2001 스케이트 아메리카 | 2001 스케이트 캐나다 |
2001-02 그랑프리 파이널 | 2002 전미선수권 |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 2002 세계선수권 |
자세한 내용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피겨 스케이팅 스캔들 문서 참고하십시오.
올림픽 이후에 열린 2002 세계선수권에서는 이리나 슬루츠카야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2.12. 2002-03 시즌
2002 스케이트 아메리카 | 2003 전미선수권 | 2003 세계선수권 |
2003 세계선수권에서 전무후무한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사샤 코헨과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부상과 개인사정으로 부진했다.
2.13. 2003-04 시즌
2004 전미선수권 | 2004 세계선수권 |
2.14. 2004-05 시즌
2005 전미선수권 |
2.15. 2005-06 시즌
2005 세계선수권 이후 부상으로 한 번도 대회에 나오지 않았던 콴은, 그나마 2005년 12월 TV 프로그램을 통해 쇼트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그 직후 부상이 심하게 도져버려 결국 올림픽 선발전인 2006 전미선수권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해준 미국 피겨 스케이팅 연맹의 특별 혜택으로, 5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비공개로, 2006년 1월 27일 이전에 콴의 건강 상태와 프로그램 경기를 선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올림픽 행을 미국 연맹은 승인했다. 콴은 쇼트와 프리 모두를 선보여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재차 부상으로 결국 직전에 기권하게 되었다.[16] 운명의 장난처럼 미셸 콴이 불참한 자리에는 사라 휴즈의 여동생인 에밀리 휴즈가 들어가게 되었다.2.16. 은퇴 이후
2008년 현역 은퇴를 하고, 아이스 쇼로 돈을 벌며 프로 생활을 하기보단 학업에 정진했다. 학업을 완전히 마쳐 졸업하고는 아이스 쇼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김연아의 한국에서의 아이스 쇼는 그녀의 첫 복귀 이후로 매년 참가했고, 덩달아 콴의 팬들도 방한 주기가 잦아졌다.스탠퍼드 대학교에도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17](그야말로 엄친딸), 고향인 토랜스 시가 있는 LA 지역의 UCLA에 1년 간 다니다가 훈련지인 콜로라도 주의 덴버 대학교로 편입학을 했다. 이유는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은메달이 아쉬워 다음 올림픽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2008년 11월에 덴버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으며, 보스턴의 명문 터프츠 대학교의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을 이수하다가 2010년 2년제 사립대학인 사우스 버몬트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하였다. 또한 이런 축사도 전했다. 상당히 감명이 깊은 연설로,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스포츠계를 위한 일도 상당히 했다. 2006년 11월 미국 국무부장관으로부터 최초의 공공외교사절로 임명, 전세계를 누비며 젊은이들과 리더십에 대해 논하고 사회와 교육을 주제로 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2009년 1월에는 일상 체육활동을 통한 미국인의 건강증진방안에 대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체력단련 및 스포츠 자문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2012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 생활을 2006년에야 마감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빨리 헌액된 셈이다.[18]
2013년 1월 19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일하는 클레이 펠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2013년 11월 남편 클레이 펠이 로드아일랜드 주 민주당 주지사 후보에 도전을 검토 중이란 뉴스가 떴다. 그러나 2017년 3월에 이혼 소송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결국 둘은 이혼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판정 논란 때 김연아의 경기에 대해 "Unbelievable"이라는 트윗을 했는데 국내에서는 "미셸 콴이 판정 결과를 믿을 수 없어한다" 라는 내용으로 와전되어 보도되었고, 같은 시기에 FOX의 인터뷰를 받고 한 말로 인해 김연아의 팬들 사이에서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28/2014022801205.html|논란]]이 된 일이 있었다. 링크된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트리플 점프의 개수로 인해 소트니코바가 이길 수 있었다고 콴이 인터뷰했고 나중에 콴이 말을 바꾼 것이다. 채점 시에는 트리플 점프의 기초점, 질, 그리고 비점프 요소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콴의 말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콴의 언행은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
2021년 12월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중남미의 벨리즈 대사에 임명,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3. 평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근 10년 동안[19] 군림한 미국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의 최강자였다. 토냐 하딩 습격 사건으로 미국에서 급속도로 식어가고 쓰러지던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되살린 주요 영웅 중 한 사람이다. 세계선수권 5회 우승, 전미선수권 9회 우승(8연패), 동계올림픽 2회 입상[20]을 포함, 무려 43회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21]을 쥐고 있는 챔피언 중 챔피언이다.피겨 스케이팅 역사 상 전세계 선수들의 순위를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순위권에 지명되는 선수이다. 여자 싱글의 레전드라고 하면 꼭 카타리나 비트[22]와 미셸 콴, 이리나 슬루츠카야, 김연아를 거론한다.[23]
우아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녔지만 기술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플러츠를 뛰었고, 3-3 실전 성공률이 낮았고, 특히,유연성이 안좋아서, 스핀 구성과 스파이럴 포지션이 떨어졌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는 레이백 스핀 레벨4 구성을 위해 비엘만 스핀이 필수였는데, 비엘만 스핀을 연습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빠른 스피드, 더블 비엘만으로 대표되는 스핀 구성, 스케일이 큰 점프, 연기의 넓은 스펙트럼이 장점을 갖고 있었고 콴은 좋은 체력, 안정적인 컨시, 우아함, 카리스마(관중 장악력)가 장점이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콴은 피겨 스케이터의 몸매치곤 굴곡이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8등신도 아닌, 속히 말해 예쁘지 못한 몸매이지만 그녀의 포스는 관객을 장악할 만한 압도력이 엄청나게 있다.
43회 우승이라는 먼치킨이기도 하지만, 구채점제 시대에서 만점이었던 6.0점을 국내대회를 포함하여 무려 57번을 받았고 이것은 구채점제 시대의 최다 만점 기록이다.[24] 1998 전미선수권 때는 18명의 심사위원 중 15명이 만점 6.0점을 주기도 했다.
4. ISU 공인 최고점수
<colbgcolor=#00bfff><colcolor=#ffffff> ISU 공인 최고점수 | |
쇼트 | 61.22(2005 세계선수권) |
프리 | 113.98(2005 세계선수권) |
총점 | 175.20(2005 세계선수권) |
5. 프로그램
5.1. 목록
<colcolor=#ffffff><rowcolor=#ffffff> 시즌 | 쇼트(SP) | 프리(FS) | 갈라(EX) |
<colbgcolor=#00bfff> 2005-2006 | 죽음의 무도[25] | Prelude in C Sharp Minor Op. 18 | A Song for You |
2004-2005 | 아다지오 | 볼레로 | You Raise Me Up |
This Used To Be My Playbround | |||
2003-2004 | The Feeling Begins | 토스카 | Fallin |
2002-2003 | 아랑훼즈 | Field of Gold | |
2001-2002 | 피아노 협주곡 3번 | 세헤라자데 | Fields of Gold |
에덴의 동쪽 | A csodálatos mandarin | ||
2000-2001 | O canto do cisne negro | 아름다운 세상 | |
Rush | This time Around | ||
1999-2000 | A Day In The Life | The Red Violin | The World Is Not Enough |
Hands | |||
1998-1999 | 카르멘 | Ariane | Kissing You |
1997-1998 | 피아노 협주곡 3번 | Lyra Angelica | On My Own |
단테의 기도 | |||
1996-1997 | 관현악 모음곡 3번 | Gyulistan Bayati Shiraz | 윈터 |
1995-1996 | Romanza | 살로메 | 에덴의 동쪽 |
Just Around the Riverbend | |||
1994-1995 | 황하 협주곡 | 론도 | 푸른 옷소매 환상곡 |
에덴의 동쪽 | |||
1993-1994 | 송 오브 인디아 | 에덴의 동쪽 | - |
1992-1993 | - | 미스 사이공 | |
1991-1992 |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
5.2. 비화
워낙 유명한 프로그램이 많은데 김연아의 2008-09 시즌 프리 프로그램인 세헤라자데는 콴의 세헤라자데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이다. 김연아는 초등학생 시절, 미셸 콴의 세헤라자데를 비디오로 녹화해두고 여러 번 돌려보았다고 한다. 김연아는 보통 프로그램에 쓸 음악을 데이비드 윌슨이 가져온 곡들 중에서 선곡하는 편이었는데, 세헤라자데 만큼은 그녀가 하고 싶다고 먼저 말한 곡이기도 하다.2001-02 시즌 프리 프로그램 '세헤라자데' |
아사다 마오의 2009-10 시즌이자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프리 프로그램이던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의 종을 미셸 콴도 탈 뻔했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 프로그램 주제곡이었고 당시의 안무가가 바로 아사다 마오의 2009-10 시즌 코치이자 안무가이던 타티야나 타라소바였다![27]
그러나 결국 콴은 부상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28] 2005-06 시즌 쇼트 프로그램인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는 그나마 2005년 12월 TV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였었지만 그 직후 부상이 악화되어 올림픽 출전 선수 선발전인 2006 전미선수권에 나오지 못했다.
아사다 마오의 종을 본 콴의 팬들은 '미셸이 안하길 잘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 선수가 저랬을 뿐이지 우리 미셸이 했다면 상황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반응이 다수였다.
6. 커리어
대회 | 금 | 은 | 동 |
올림픽 | <colbgcolor=#ffe970,#c3a100> 0 | <colbgcolor=#c0c0c0,#555555> 1 | <colbgcolor=#d7995b,#6d441a> 1 |
세계선수권 | 5 | 3 | 1 |
그랑프리 파이널 | 1 | 4 | 0 |
주니어 세계선수권 | 1 | 1 | 0 |
합계 | 7 | 8 | 2 |
올림픽 | ||
은메달 | 1998 나가노 | 여자 싱글 |
동메달 | 2002 솔트레이크시티 | 여자 싱글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96 에드먼턴 | 여자 싱글 |
금메달 | 1998 미니애폴리스 | 여자 싱글 |
금메달 | 2000 니스 | 여자 싱글 |
금메달 | 2001 밴쿠버 | 여자 싱글 |
금메달 | 2003 워싱턴 D.C. | 여자 싱글 |
은메달 | 1997 로잔 | 여자 싱글 |
은메달 | 1999 헬싱키 | 여자 싱글 |
은메달 | 2002 나가노 | 여자 싱글 |
동메달 | 2004 도르트문드 | 여자 싱글 |
그랑프리 파이널 | ||
금메달 | 1995-96 파리 | 여자 싱글 |
은메달 | 1996-97 해밀턴 | 여자 싱글 |
은메달 | 1999-00 리옹 | 여자 싱글 |
은메달 | 2000-01 도쿄 | 여자 싱글 |
은메달 | 2001-02 키치너 | 여자 싱글 |
주니어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94 콜로라도 스프링스 | 여자 싱글 |
국제대회:시니어 | |||||||||||||||
대회 | 91–92 | 92–93 | 93–94 | 94–95 | 95–96 | 96–97 | 97–98 | 98–99 | 99–00 | 00–01 | 01–02 | 02–03 | 03–04 | 04–05 | 05–06 |
올림픽 | Alt | 2nd | 3rd | WD | |||||||||||
세계선수권 | 8th | 4th | 1st | 2nd | 1st | 2nd | 1st | 1st | 2nd | 1st | 3rd | 4th | |||
GP 파이널 | 1st | 2nd | 2nd | 2nd | 2nd | ||||||||||
GP 프랑스 | 1st | ||||||||||||||
GP 네이션스 컵 | 1st | ||||||||||||||
GP 스케이트 캐나다 | 1st | 1st | 1st | 2nd | 3rd | ||||||||||
GP 스케이트 아메리카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
트로피 드 프랑스 | 3rd | ||||||||||||||
스케이트 아메리카 | 7th | 2nd | |||||||||||||
친선경기 | 2nd | 1st | 2nd | ||||||||||||
국제대회:주니어 | |||||||||||||||
주니어 세계선수권 | 1st | ||||||||||||||
가데나 스프링 트로피 | 1st J | ||||||||||||||
국내대회 | |||||||||||||||
전미선수권 | 9th J | 6th | 2nd | 2nd | 1st | 2nd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
GP=그랑프리, WD=기권, Alt=대기, J=주니어 |
- 1998년 여성 스포츠재단 선정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1년 셜리번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운동 선수상
- 2002 틴(Teen) 초이스 최고의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2년 올해의 코스모스 걸 상
- 2002년 피플지 선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입상
- 2002년 키즈 초이스 최고의 여성선수상
- 2003년 미국올림픽위원회 선정 올해의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3년 7번째의 올해의 피겨 스케이터 상 수상자이자 2번 복수 수상[29]
(이중 꽤 다수가 김연아가 수상한 상들이기도 하다.)
7. 여담
7.1. 기타
- 축구선수 출신 홍콩계 이민자 대니 콴(Danny Kwan)과 그의 아내 에스텔라 콴(Estella Kwan)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빠는 아이스하키를 하고, 2살 위의 언니 카렌과 같이 만 5세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 부모가 착실하게 공부도 시켰지만 잘 가르쳐서 정신력이 무척 강인하다. 콴의 아버지가 말하길, 콴이 운 것은 1991 전미 주니어선수권에서 9위를 했을 때 뿐이라고 한다.
- 피겨 스케이팅이 유명해진 지 겨우 3~4년(2011년 기준)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의 대부분 신규 팬들에게는 김연아 선수의 우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김연아 이전에도 대표적인 여자 싱글 선수로써 이름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30]
- 2010년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고, 은퇴한 지 3년 만인 2009년 한국에서의 아이스 쇼를 통해 다시 복귀했다. 김연아가 세계선수권에서의 활약으로 빙상의 여왕으로 인정받은 직후라, 사람들의 반응은 前 피겨여왕과 現 피겨여왕이 만난다고 두근거리는 상황이었다.
물 건너 옆나라 빼고 - 돈이 지독하게 들기로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을 했기 때문에 가족이 희생을 많이 했다. 1993년에 콴과 카렌의 피겨 스케이팅 교습비로만 5만 달러였다고 한다.[31] 자금 마련을 위해 아버지는 살던 집을 팔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족 전부가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미셸의 아버지는 전혀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딸들에게 피겨 스케이팅을 선물해줘서 자신은 기뻤다 한다. 언니인 카렌도 같이 피겨 스케이팅을 했다. 1997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했으며, 보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후 콴 가족 소유의 링크장에서 안무가로 진로를 바꿨다. 또한 디자이너 베라 왕에게 인턴을 한 탓에 피겨 스케이팅 의상 디자인도 담당했다.[32] 이후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페어 동메달리스트와 결혼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브라이언 오서 다음으로 김연아의 2010-11 시즌 코치였던 피터 오피가드였다.
- 콴의 팬들은 흰 부츠를 선호했는데, 이유는 콴이 선수 시절 흰 부츠를 내놓았기 때문이다.[33]
- 한국에서 열린 아이스 쇼에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이 자신을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게에서 자신을 김연아 선수가 존경하던 모델이라고 알아봤다고
얼떨결에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었다며 엄청 놀라워했다. - 훌륭한 삶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아름답고도 예술적 스케이팅 스타일으로 인하여 많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김연아도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미셸 콴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을 지지하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캠프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선거 유세를 도왔다. 선거 캠프에 합류한 이후 종종 본인의 SNS에 조 바이든의 지지를 호소하는 게시글들을 많이 올렸다. 사실 콴은 이전의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때도 힐러리 클린턴 캠프에 합류했던 적이 있었다. 콴의 인종과 출신 지역을 봤을 때 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34]
- 2022년 1월 본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정자를 기증 받아 임신한 후 딸을 출산했다는 근황을 알렸다.
7.2. 올림픽에서의 불운
유난히도 올림픽 금메달과는 지독히도 인연이 없었다. 다만 놓친 건 올림픽 금메달 뿐이라서 콩라인이라 하기엔 무리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미셸 콴이 거둔 다른 대회에서의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이다.처음 올림픽과의 악연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대표 선발전이기도 한 1994년 전미선수권으로부터 시작한다.[35] 프리 스케이팅에서 2위를 해서 결과적으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될 수는 있었지만, 미국 빙상 연맹의 규정 중 하나던 "연맹은 올림픽 선발전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선발할 수도 있다"가 적용되어, 당시 우승자이던 토냐 하딩과 연맹 국제위원회 투표에 따라 그 당시 최고의 선수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출전하지 못했던 낸시 케리건이 출전하게 되었다. 이렇기에 콴은 대기 선수로 지정되었고 노르웨이까지 날아가 경기 시작일이던 2월 23까지 대기 상태에 있게 된다. 사실 이때 콴은 거의 참가가 가능했다. 하지만 상황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치 될 듯 말 듯 싶었다. 2월 1일 토냐 하딩이 유죄를 시인했고, 그에 따라 연맹은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일 하딩 측이 미국 연맹에 2천만 달러 손해 배상 소송을 접수하고, 막후 협상 끝에 12일 연맹은 토냐가 올림픽에 가는 것을 승인하며 올림픽 후 징계 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론 못 나가게 되었다. 또 노르웨이에서 토냐는 발목을 접질렀지만 의사가 OK 사인을 내버려서 결국 진짜 헛고생을 하였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드디어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는데, 이 대회에서는 타라 리핀스키가 피겨 스케이팅 역대 최연소[36] 3-3 컴비네이선 점프 2번이라는 승부수를 성공시키며,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콴은 안전한 경기운영으로 은메달로 만족해야 했다.[37] 쇼트에서 단독 점프가 상위권 중 가장 난이도가 낮았다.[38]
홈그라운드인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콴, 그리고 이번이 2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39] 점을 의식한 듯 엄청난 부담감에 억눌리던 콴은, 결국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프리에서 2번의 실수를 했고, 같은 미국 동료 선수인 사라 휴즈가 금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콴은 결국 동메달에 그쳤다. 자세한 내용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피겨 스케이팅 스캔들 문서에 설명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참가할 수도 있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2005 세계선수권 이후의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오랜 전부터 앓고 있던 고관절염증이 심해졌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가서 개회식에 참석했으나, 그것이 무리가 되어 다음날 연습에서 여러 번 넘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올림픽 프레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밝혔다.
[1] 광동어식 월어병음이며 콴의 집안은 홍콩 출신 이민자 집안이었기 때문에 중국식 보통화보다는 광동어에 더 익숙한 집안이다. 미들네임인 Wingshan 또한 穎珊의 광동어식 월어병음이며, 따라서 이쪽이 더 정확한 중국식 이름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콴은 가정에서 광동어와 영어 둘 다 구사하면서 자랐다.[2] 번체자이며, 간체자로는 关颖珊이다.[3] 참고로 이 때 프리 프로그램은 미스 사이공이었다.[4] 이 시기에는 그랑프리 시리즈가 아닌, 그냥 국제대회들 중 하나였다. 그랑프리 시리즈라는 포맷은 1995-96 시즌부터 생겼다.[5] 왼쪽부터 차례로 4위목메달 엘레인 자약, 동메달리스트 니콜 보벡, 금메달리스트 토냐 하딩,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6] 그러나 이 대회에서의 토냐 하딩의 우승 기록은 삭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토냐 하딩 습격 사건 문서 참조.[7] 토냐 하딩은 예정된 대로 올림픽 이후에 징계를 먹었고, 낸시 케리건은 부상 때문에 결국 은퇴하였다.[8] 당시에는 그랑프리 시리즈를 3번까지 출전할 수 있었다.[9] 프리에서 예술점 6.0점 2개 이상이 나와야, 콴이 우승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예술점 6.0점(만점)은 받기 힘든 점수이며, 시니어 2년 차에 받을 수 있는 점수는 더욱 아니다.[10] 피겨 스케이팅은 스케이팅 속도가 프로그램 인상에 중요한데, 콴 뒤에 스피드가 좋은 슬루츠카야와 리핀스키가 경기를 한 부문도 이유로 지적되었다.[11]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자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다.[12] 콴은 기술답보라고 불릴 정도로, 3-3 컴비네이션 점프 성공률이 낮았으며 스핀 구성도 낮았다.[13] 이 콴 밀어주기 밑밥 때문에 슬루츠카야가 금메달을 놓쳤다.[14] 당시 콴의 순서 직전에 한 관중이 빙판 위로 난입해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다. 난입 관중을 제지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그동안 콴은 빙판에서 웜업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15] 프리에서 3-3 컴비네이션 점프(3S+3T)와 3연속 점프(3Lz+3T+2Lo)를 성공시켰다.[16] 원래 출전권은 에밀리 휴즈에게 있었지만, 내셔널에 출전하지 않고 콴이 연맹 측에서 출전권을 따낸거라 말이 많았다.[17] 미국 대학이라고 한국 대학이랑 많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유명인과 그 자제들을 일류대학에서 거의 모셔가려는 것은 도리어 한국보다 심하기도 하다.[18] 예를 들어 선수 생활을 2003년에 마감한 알렉세이 야구딘이 아직도 헌액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19] 피겨 스케이팅 항목에 써 있지만, 피겨 스케이팅은 결코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20] 은메달과 동메달 각 1회씩인데 아쉽게도 금메달을 따지 못해서 무관의 제왕이란 별명이 붙었다.[21]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역사 100년 간 남녀 선수를 통틀어 이처럼 많은 세계선수권 타이틀과 전미선수권 타이틀, 동계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없다.[22]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여자 싱글에서 단 두명 뿐인 올림픽 2연패의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다. 나머지 한명은 소냐 헤니로 3연패 기록을 갖고 있다.[23] 물론 카타리나 비트,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미국에서 저평가를 받고, 미셸 콴은 유럽에서 저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24] 지금은 채점 제도가 바뀌었지만, 대단한 기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5] 재미있게도 이때 콴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리나 슬루츠카야 역시 같은 곡을 사용했는데,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죽음의 무도(Totentanz)였다. 김연아가 사용한 죽음의 무도와는 다른 곡이다.[26] 이때 이 경기를 중계했던 NBC는, 메인 스포츠 아나운서인 밥 코스타스와 남자 싱글 올림픽 2연패를 이룬 미국 피겨 스케이팅의 원로 딕 버튼이 함께 한 별도 중계석에 미셸 콴을 초대했다. 프리 프로그램 마지막 그룹의 웜업 도중 당시 컴백설이 돌고 있었던 미셸 콴을 두고 다른 2명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컴백설의 진위를 물었는데 이때 미셸 콴은 트리플 점프도 연습 중이라며 나름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다가, 프리 프로그램이 끝나고 답변을 하겠다고 미뤘다. 프리 프로그램 종료 후 김연아의 칭찬을 자자하게 늘어놓던 미셸 콴에게 다시 컴백설에 관해 물으니 미셸 콴의 대답은 "김연아의 경기를 보고 나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라고 답하였다. 이 때 딕 버튼은 콴의 컴백의 관건은 자기와 함께 페어로 컴백하느냐 아이스 댄싱으로 컴백하느냐라고 농담을 했다.컴백 기대는 하지 마세요 Mr. 코스타스 대회가 끝난 후 김연아와 마주쳤을 때, 김연아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있었다고 하였다. 콴이 "Hi Yuna, Nice to meet you!" 라고 인사를 건네도 아무 소리도 못했다고 한다.[27] 타라소바의 "빙상의 신은 아사다 마오를 사랑하신다" 라는 대사는 원래 "God loves Michelle(빙상의 신은 미셸을 선택하셨다)" 라는 미셸에 대한 칭찬이었다.[28] 정확히는 2005 세계선수권 4위 이후 한 번도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29] 이 때문에 트로피 이름이 "미셸 콴 트로피" 로 바뀌었다.[30] "남나리가 1999년 전미선수권 2위를 했을 때 1위가 미셸 콴이었고, 이것이 한국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경기 결과는 맞지만 남나리가 2위를 해서 1위인 미셸 콴이 알려졌다기보다는 그 미셸 콴에 이어서 2위를 한 대단한 선수로 남나리가 알려졌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31] 그 당시 최고 수준의 대학을 졸업한 MBA가 받는 연봉이다![32] 베라 왕은 콴이 현역 시절 프로그램 의상을 자주 맡았다.[33] 이건 일종의 취향이며 몇몇은 콴처럼 부츠를 내놓는 데 반해, 몇몇은 스타킹으로 부츠를 전부 덮는다. 물론 반만 덮는 선수들도 있다.[34] 실제로 미국에서 아시아계 여성이거나 캘리포니아 출신이면 거의 전형적인 민주당 지지자일 때가 많다. 전 남편 클레이 펠도 민주당 소속이였다.[35] 1996년부터는 ISU가 정한 연령 제한 규정에 따라 시즌이 시작되는 해의 7월 1일을 기준으로 만 15세가 넘어야 시니어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콴은 1980년 7월 7일 생이니, 1994 동계올림픽이 열린 1993-94 시즌에는 만 15세를 넘기지 못하므로 현재 규정으로는 나갈 수 없다. 참고로 현 규정대로 하면 6일 차이로 노비스 레벨이다. 그렇지만 이때는 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출전은 가능했다.[36] 국제빙상경기연맹에서 1996년부터 연령 하한선을 설정했다. 시즌 개막일인 7월 1일 기준으로 만 15세 이상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출전이 가능하다. 리핀스키의 경우는 연령 제한을 겨우 20일 넘겨서 출전했다.[37] 평소보다 아주 느리게 스케이팅을 했다. 상위권 중 유일하게 3-3 점프, 3-3 시컨스 조차도 없었다.(타라 리핀스키:3-3 컴비네이션, 3-3 시퀀스, 미셸 콴: 3-2 컴비네이션 점프, 천루:3-3 컴비네이선 점프, 마리아 부티르스카야: 3-3 시퀀스, 이리나 슬루츠카야:3-3 컴비네이션 점프)[38] 리핀스키는 플립, 부티르스카야와 이리나는 룹, 콴과 천루는 토룹을 뛰었다. 그럼에도 쇼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39]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여자 싱글 종목은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대부분 여자 선수들에게 올림픽에 2번 참가하면 그것이 많은 거고, 3번을 참가하면 메달은 기대도 안하고 마무리 기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분은 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