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미도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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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0000><colcolor=#ffffff> 이토 미도리 [ruby(伊藤, ruby=いとう)] みどり | Midori Ito | |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은메달 획득 당시 | |
출생 | 1969년 8월 13일 ([age(1969-08-13)]세) |
아이치현 나고야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45cm |
종목 | 피겨 스케이팅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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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에서 메달을 획득했다.2. 선수 경력
나고야시 출신으로 5세 때부터 스케이팅을 시작한 미도리는 만 8세에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켰다. 이 타고난 점프력의 천재 소녀를 발굴해낸 게 우리에겐 아사다 마오 前 코치로 유명한 야마다 마치코다.[1] 야마다는 이 어린 소녀의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미도리는 겨우 10살에 부모의 이혼이라는 충격을 겪었고, 미도리의 친모는 밤 늦게까지 각종 잡일을 하면서 미도리가 피겨 스케이팅을 계속 하게 해주려 노력했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2] 그러자 야마다는 즉시 미도리를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했다.2.1. 1979-80 시즌
1979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했다.2.2. 1980-81 시즌
만 11세 나이로 출전한 1981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이례적으로 트리플 러츠-더블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켜 전 세계 빙상계를 들썩였다. 그런데 점프를 성공시키고도 컴펄서리[3]에서 20위를 받는 데 그쳐 쇼트 7위, 프리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종합 8위로 아쉬운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1980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시니어로 첫 참가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2.3. 1981-82 시즌
1982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쇼트와 프리에서 1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컴펄서리에서 19위를 하는 바람에 종합 6위에 그쳤다.2.4. 1982-83 시즌
1982년 가을에 오른쪽 발목 골절 부상을 당하여 시즌을 결장했다.2.5. 1983-84 시즌
1984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쇼트와 프리가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컴펄서리가프라하 스케이트에서 우승하고 챌린지 컵에서 은메달을 땄다. 1983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 1983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2.6. 1984-85 시즌
1984 NHK 트로피에서는 트리플 악셀을 시도해 실패했지만 우승하였다. 갈라에서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했다. 당시 15살밖에 안 된 소녀가 남자 선수도 하기 힘든 걸 해낸 거다. 데이비드 젠킨스가 트리플 악셀 점프를 수행하는 동영상이 있긴 했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1978년에 등장했다. 또한 브라이언 오서가 현역 시절에 '미스터 트리플 악셀'로 불리기 시작한 때가 1985년이다. 이 때 쿼드러플 점프 연습을 하다가 발목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커트 브라우닝이 처음으로 쿼드러플 토룹을 성공시킨 게 1988 세계선수권인 걸 고려하면 말 그대로 남자보다 앞서가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진 1984 스케이트 캐나다와 1984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우승하였다. 1984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해 11위를 기록했다.그러나 매번 나가는 대회마다 그놈의 컴펄서리 때문에 주니어 시절 내내 국제 대회에서 포디움을 밟아보질 못했다. 하지만 차츰 피겨 스케이팅 호사가들 사이에서 '일본의 작은 소녀 선수가 점프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란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여자 싱글 3-3 컴비네이션 점프는 주니어와 시니어를 막론하고 이토 미도리가 최초로 시도해서 최초로 성공시켰다. 이때 당시 붙은 별명이 벼룩처럼 잘 뛴다고 해서 'Jumping Flea'였다.[7]
2.7. 1985-86 시즌
1985년 쿼드러플 점프를 연습하다가 발목 부상을 당했다. 구채점제 시절 안도 미키도 주니어 때 쿼드러플 점프를 뛰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토 미도리가 얼마나 파워풀한 점퍼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5 NHK 트로피와 1985 전일본선수권에서는 모두 우승했다. 1986 세계선수권에서는 11위를 기록했다.2.8. 1986-87 시즌
1986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을, 1986 전일본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7 세계선수권에서는 8위에 올랐다.2.9. 1987-88 시즌
1987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 1987 Bofrost Cup on Ice에서 우승했다. 1987 전일본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은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서 여자 싱글의 카르멘 전쟁(Battle of the Carmens), 남자 싱글의 브라이언 전쟁(Battle of the Brians), 페어의 G&G로 요약 가능한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그 자체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지만 이토 미도리에게도 화려한 올림픽 데뷔전이었다.[8] 컴펄서리에서 10위를 받아서 이미 메달은 저 멀리 물 건너 갔다. 하지만 작은 체구의 동양인 소녀에게서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높이가 여타 다른 여자들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자 싱글 수준의 체공 높이, 프리 로테이션[9]이 걸릴래야 걸릴 수가 없는 회전 스피드에, 안 그래도 카르멘 전쟁과 브라이언 전쟁으로 피겨 스케이팅에 전 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져 있는 와중에 미도리는 고유의 점프력, 회전 스피드를 전 세계 매스컴이 보는 앞에서 뽐냈다.[10] 미도리는 프리에서 3위, 종합 5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1988 세계선수권에서는 6위에 올랐다.
2.10. 1988-89 시즌
1988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 1988 NHK 트로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11] 1988 전일본선수권에서도 우승했다. 1989 세계선수권에서는 여자 싱글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우승했다. 프리 프로그램 초반에 트리플 악셀, 후반에 3-3 콤비네이션 (트리플 토룹 - 트리플 토룹)을 구사했다. 이 어마무시한 난이도로 9명의 심판중 무려 5명에게서 기술점수 6.0점을 받은 기념비적인 프로그램이다. 동영상을 보면,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하는 동안에 기술점수 6.0점이 5번 나온다.2.11. 1989-90 시즌
1989 NHK 트로피와 1989 전일본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1990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해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4위이자 일명 '컴펄서리의 여왕' 질 트레너리가 우승하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런데 후술할 논란 때문에 가는 길이 썩 개운치는 못했다. 논란의 핵심은 '심사위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질 트레나리의 컴펄서리가 모든 요소가 완벽했던 미도리에 비해 그리 뛰어났냐'였다. 미도리가 컴펄서리에서 10위를 하고 나머지 부문은 모조리 1위를 했는데[12] '질 트레나리는 중계도 안 하는 재미 없는 컴펄서리에서만 이토 미도리를 이겼을 뿐 모든 경기에서 이토 미도리에게 완패했다'에서부터 '우승 자격이 없다'라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질 트레너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토 미도리는 단지 점퍼(Jumper)에 불과하다', '컴펄서리 10위한테 우승을 줄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반응이었고 이 논란이 점점 커져 결국 ISU에서 싱글 피겨 스케이팅에서의 컴펄서리의 존폐를 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질 트레너리가 이토 미도리의 금메달을 강탈했다는 의견이 많았다.2.12. 1990-91 시즌
1990 NHK 트로피에서 금메달, 1990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을 따고 1990 전일본선수권에서 우승했다.이 시즌부터 싱글 부문에 컴펄서리가 삭제되자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여자 싱글은 이토 미도리의 독주 체제가 유지될 거라 예상했었다. 근데 이번엔 예술성 문제가 발목을 붙잡았다. 정상급의 점프력과 10위권 안에도 못 끼는 컴펄서리 사이의 괴리감이 심해서 그렇지 연기력이나 다소 어색한 의상 선정[13],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단 평은 쭉 있어 왔다. 그런데 컴펄서리가 삭제된 이후 미국의 기계체조와 발레 유망주들이 싱글 스케이터로 전향하고, 어린 나이에 컴펄서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꿈을 접었던 빙상 꿈나무들[14], 여기에 싱글보다 컴펄서리가 비교적 먼저 폐지된 페어 스케이팅 꿈나무들도 뛰어들었다. 페어와 싱글을 병행하다가 싱글만 집중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크리스티 야마구치다. 경기중 큰 실수도 있었고[15] 위의 이유로 1991 세계선수권에서는 미국 선수들에게 밀려 4위에 머물렀다.[16]
2.13. 1991-92 시즌
1991 NHK 트로피, 1991 트로피 랄리크, 1991 전일본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
카르멘 전쟁 이후 다소 침체되나 했던 피겨 스케이팅 계에 일본인 vs 일본계 미국인[17]이란 라이벌 구도는 되려 일본에서 김연아 vs 아사다 마오 시절보다 훨씬 초월하는 규모로 피겨 스케이팅 붐을 일으켰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 경기 직전 워밍업을 하던 도중 충돌 여파의 탓인지 4위로 부진했다. 하지만, 프리에서 트리플 악셀 점프를 성공시키며, 최종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는 출전하지 않고 은퇴 후 바로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2.14. 1995-96 시즌
이 시즌 복귀하여 1995 전일본선수권에서 우승하고 1996 세계선수권에서 7위에 오른 후 완전히 은퇴하였다.1996년 복귀 후 프리 스케이팅 경기[18] |
3. 은퇴 이후
프로 스케이터로 활동하며 World Professionals 등에 참가했다. 말이 프로 스케이터지 현역 때와 다를 게 없었다.[19] 1995 NHK 트로피 갈라에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하였고, 오페라 투란도트 OST인 네순도르마를 선보였다. 갈라에서 3Lz, 3A, 3T-3T라는 비범한 구성,[20] 여자 선수 중에는 3A+3T를 수행한 기록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 선수이며[21],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참가했으면 우승하고도 남았을 텐데 참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성화 점화 |
40대이던 2010년대에 더블 악셀이 가능했다. 2023년과 2024년에는 독일에서 개최된 성인 취미 피겨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했다.[22]
4. 평가
3A | 3Lz |
그런데 사실 한국과 일본이 전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아주 예전(1980년대)부터 남자 싱글에선 쿼드러플까진 몰라도 트리플 악셀조차 없는 선수들은 탑싱 취급을 못 받을 정도로 트리플 악셀이 정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세계선수권 영상을 보면 탑싱은 물론이고 중위권 선수들만 되어도 다들 트악은 당연하게 시도한다. 그러나 남자 싱글과 여자 싱글에서 트리플 악셀의 위상은 당연히 다르다. 이토 미도리 이후 여자 싱글에서도 트리플 악셀러들이 드물게 등장했으나 그 20년 동안 제대로 된 트리플 악셀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이토 미도리가 유일하다. 위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 리그베다 위키 피겨 스케이팅 항목 中 |
남녀를 불문하고 세계 피겨 무대에서 정상권에 올랐던 최초의 아시아인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 아시아 선수들이 세계 피겨 스케이팅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데 기초를 닦았다. 북미에서는 '우아함'과 '교감'을 강조했고, 유럽에서는 많은 운동량과 스피드를 내세웠고, 팬들이 일본의 경우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한 포스트 이토 미도리'로 보였다. 실제로 이토 미도리 이후 사토 유카, 스구리 후미에, 온다 요시에, 안도 미키, 아사다 마오 등 수많은 여자 싱글 스케이터들이 나타났지만 아라카와 시즈카[23]나 스즈키 아키코[24]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예술성 부족 논란에 시달렸다. 이를 두고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 팬들과 스포츠 언론들이 그녀를 평할 때마다 일본 피겨 스케이팅의 빛[25]이자 그림자[26]라고 불렀다.
5. 기록
- 트리플 악셀을 착지한 최초의 여자 선수
-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6종 점프(악셀, 러츠, 플립, 룹, 살코, 토룹)를 모두 성공한 선수
- 한 대회에서 7개의 트리플 점프를 착지한 최초의 여자 선수
- 아시아 선수 최초로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선수
- 트리플-트리플 컴비네이션을 공식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여자 선수
- 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아시아 국적으로 메달을 딴 최초의 선수
6. 수상 기록
올림픽 | ||
은메달 | 1992 알베르빌 | 여자 싱글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9 파리 | 여자 싱글 |
은메달 | 1990 핼리팩스 | 여자 싱글 |
주니어 세계선수권 | ||
동메달 | 1984 삿포로 | 여자 싱글 |
7. 기타
- 단순한 스케이팅의 스킬과 예술성을 더 우위로 두던 여자 싱글 스케이팅을 기술도 중요하다는 관념으로 바꿔놓은 1세대 주자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토 미도리는 점프에 프리 로테이션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공중에서 회전을 다 채웠다.[27] 그 이후로 심판들이 프리로테이션이 심각한 선수들에게 적은 점수를 주기 시작했고, 일부 선수들이 이토 미도리처럼 트리플 악셀 점프나 3회전+3회전 컴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듯한 발언을 자주 했다. '카타리나 비트를 보며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꿈을 키웠는데 난 저렇게 예쁘지도 않고, 데비 토머스처럼 육감적이고 탄력적인 몸매를 가진 것도 아니니, 내세울 수 있는 건 피 나도록 노력해 점프를 선보이는 것 뿐이었다' 취지로 한 것이긴 한데 진짜 피 나도록 노력하긴 했다.[28] 발목, 어깨, 허리, 골반은 물론 특이하게도 침샘 부상에도 자주 시달렸는데 그 이유도 남다르다. 점프 높이가 워낙 높고 회전 스피드도 빠르다 보니 어렸을 땐 떨어지는 요령을 몰라서 떨어질 때 충격량이 너무 큰 나머지 뇌진탕 후유증이 남아 있다고 한다.
- 훗날 인터뷰에 의하면, 공중에서 점프할 때 4자 다리[29]를 하지 않으면 너무 높게 점프를 할까봐 억지로 4자 다리 점프를 했다고 한다. 현재의 선수들이 4자 다리로 점프를 하게 되면 회전수 부족으로 감점을 받을 확률이 그러지 않을 때보다 높아지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도 그 점프 높이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 트리플 악셀(1990년대 세계선수권 프리 기준) 높이가 약 64cm라는데 요즘 남싱 쿼드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다.
- 1988~1994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트리플 점프 랜딩 현황은 다음과 같다.
-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 카타리나 비트- 3S, 3T 랜딩
-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 크리스티 야마구치- 3Lz-3T, 2A, 3F, 3T, 3Lo(실패), 2S, 3Lz, 2A,
이토 미도리- 2Lz-3T[30], 3A(실패), 3F-2T, 3Lo, 3A, 3S, 2A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6년 사이에 여자 싱글에서의 기술 수준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가 나중 2년 동안은 갑자기 하락했다. 이토 미도리를 중심으로 수리야 보날리, 크리스티 야마구치, 토냐 하딩 등의 선수들이 갑자기 등장했다가 비슷한 시기에 은퇴를 하다 보니 일어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 2001 재팬 오픈에 출전했을 때에는 프리 스케이팅에서 트리플 악셀을 시도했고, 랜딩에서 스텝아웃이 되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ISU가 주관하는 성인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 참가했고, 2011년과 2013년에는 더블 악셀을 시도해서 성공했다.
- 일본 피겨 스케이팅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간혹 피겨 스케이팅 갤러리에서는 까이는 경우가 있었다. 해설가로도 오래 방송에 나왔는데 아라카와 시즈카와 해설 스타일이 정반대이다. 현역 시절 둘도 없을 점퍼여서 그런지 선수들의 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자면 안도 미키가 2008-09 그랑프리 파이널 프리에서 쿼드러플 살코를 뛰었을 때, 트리플 살코라고 해설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깐깐하다.[31] 예전에 무라카미 카나코를 김연아에 빗대는 등 언론의 주문에 약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2]
- 일본 피겨 스케이팅이 20년 넘게 이토 미도리의 그림자를 못 벗어나고 있단 평과 반대로 정작 일본 빙상계에서 그녀의 입지는 매우 좁은 편이다. 이에 대해선 1996년 복귀가 악수가 됐다는 평이 대다수인데, 일본 스포츠계는 우리나라 연예계와 생리가 매우 흡사해서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선수들 역시 연예인과 같은 일종의 상품이다. 차이점이라면 가수가 음악, 배우는 작품으로 아이돌은 이미지 메이킹과 마케팅을 통한 일종의 환상을 판다면 선수들은 성적과 그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선보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열광한다는 점인데, 일본 언론과 팬들은 이토 미도리의 1996년 복귀가 실패하자 그녀의 이미지는 '금메달을 따지 못한 무관의 여왕'에서 순식간에 '옛날엔 좀 날렸지만 지금은 한 물 간 선수'로 전락시켰다.
- 2018년 7월 14일 함대 컬렉션 빙상의 관함식 축제에 무라 타카히토 & 사와야마 리나와 함께 참가했으며, 심해빙상여왕 역할을 맡았다.
[1] 안타깝게도 야마다 코치의 제자들은 플러츠를 뛰는 선수들이 많다.[2] 피겨 스케이팅은 돈이 매우 많이 든다. 링크 대관료, 코치비, 의상 제작과 메이크업 비용, 만약 코치가 외국인이면 통역사까지 써야 한다. 문제는 피겨 스케이팅은 상금이 적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연아도 주니어 시절 때는 국내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할 만한 아이스링크가 없어 일본에서 연습과 스케이팅 수리까지 했어야 했고, 대회에서 얻은 상금의 대부분을 코치의 월급과 다음 시즌의 프로그램 준비 비용으로 사용했다.[3] 피겨 스케이팅 중 도형 그리기 종목이며, 전체 성적의 30%(팩터 0.6)을 이루고 1984년 당시는 3개 과제에 각 4.0 만점으로 총 12점 만점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관중들이 보면 뭐가 뭔지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방송사에서도 그냥 중계를 안 했다. 컴펄서리 심사 후 쇼트 프로그램이 전체의 20%(팩터 0.4), 프리 종목이 전체의 50%(팩터 1.0)이며 최종 순위는 각 부문별 상대 순위와 팩터의 곱을 합한 숫자가 적은 사람부터 1, 2, 3위를 결정했던 게 컴펄서리가 있던 시절 채점제다. TV 송출이 시작됐을 적만 해도 당시 한국 방송계는 피겨 스케이팅 자체에 아예 문외한이었던지라, 주로 쇼트고 프리고 싸잡아서 피겨 스케이팅 규정 종목이라고 번역하였다.[4] 우리나라에서도 김해진이 시니어 데뷔 전에 트리플 5종 점프를 모두 소화해낸 바가 있다.[5] 안도 미키,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카밀라 발리예바, 알리사 리우.[6] 성장기였던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토 미도리의 최종 프로필상의 키는 145cm라는 게 함정이었다.[7] 1991 트로피 랄리크,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연습에서는 트리플 악셀-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켰다.[8] 앞서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도 출전 자격이 있었지만, 1983 전일본선수권에서 컴펄서리를 망해 컴펄서리 10위로 출발해서 쇼트마저 점프를 넘어져 5위, 프리 1위로 2위를 해서 출전하지 못했다.[9] 몸이나 발을 틀어서 반 바퀴 이상 회전을 넣고 점프하는 것이며, 이토 미도리 이전의 여자 선수들에겐 그것이 정석이었다.[10] 당시 프리 스케이팅 점프 구성에는 더블 악셀+오일러+트리플 살코, 트리플 토룹+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때 3-3 컴비네이션은 남자 선수들도 상위권 선수만 구상하는 고난이도 점프였다. 게다가 오리지날 프로그램(쇼트 프로그램)에서는 무려 더블 룹 + 트리플 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올림픽에서 연결 트리플 룹 점프를 성공한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11] 사실 국제 대회에서의 트리플 악셀은 이때 처음 랜딩에 성공했으나, 당시의 NHK 트로피는 일반 국제 대회여서 공인 대회로 분류되지 않아 공식으로는 기록되지 않았다.[12] 특히나 기술성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선 더욱 중요하다.[13] 안도 미키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비도 아닌 레인코트 비스무리한 걸 입었는데, "태풍에 휘날리는 비닐 우산을 보는 거 같다"는 혹평을 받았다.[14] 정말 아주 쉽게 간단히 설명해 주자면, 심사위원들이 주제를 주고 그 주제에 맞게 빙상 위에다 도형이나 선을 그리면 된다.[15] 웜업 때는 다른 선수와 동선이 겹친 탓에 크게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고, 쇼트 경기에서 트리플 러츠- 더블 토룹을 뛰다 펜스와 점프 비거리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 카메라 촬영을 위해 펜스가 아주 낮게 설치된 쪽으로 돌진해버려 그대로 펜스를 넘어버렸다.[16] 만약 1990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면 미국의 출전권이 2장으로 줄어 본 대회에서 3위를 했을 것이다.[17] 일본에서는 일본계 미국인인 크리스티 야마구치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으나, 크리스티는 "나는 미국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7년 무렵 일본계 미국인인 14세 소녀 미라이 나가수가 주니어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자, 일본은 야마구치에게 했던 것처럼 미라이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양친 모두 일본인(미국 영주권자)이고 출생지는 미국이라 복수국적(미국, 일본)이었던 미라이는 크리스티처럼 선을 딱 긋지는 않고 일본에도 친근한 듯 보였지만, 일본의 국적법에 의해 1가지 국적만을 택해야 하는 만 22세가 되자 2가지 국적 중에서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18] 이 의상은 나중에 아사다 마오가 물려 입었다.[19] 오히려 더 기량이 증가한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로 경기에서 여자 선수가 3A, 3Lz, 3T-3T로 구성을 넣는 것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20]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모든 점프를 트리플로 구성한 것은 옐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최초였다. 그런데 정식 경기도 아니고 20년도 더 전에 갈라에서 이런 구성을 보인다는 건 그냥 불가사의나 마찬가지이다. 이토 미도리는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도 3T-3T를 선보인 적이 있고, 1989 세계선수권에서는 즉석에서 3A를 선보일 것을 요청 받기도 했다.[21] 원래는 유일했지만 2017-18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키히라 리카가 3A+3T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최초로 공인 기록으로 인정 받았다.[22] 영상에 적힌 댓글을 보면 비록 현역시절 처럼 날렵하거나 기술이 화려하진 않지만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며 호평 일색이다. 또한 피겨 스케이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이 들어서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며 응원하는 댓글도 상당수다.[23] 이쪽은 김연아나 아사다 마오 같은 스타성보단 말 그대로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30살 노장의 뒤늦은 투혼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24] 은퇴 후 안무가로 활동할 정도로 피겨 스케이팅 곡 해석 능력이나 스텝 능력, 음악을 타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스텝 시퀀스 규정이 개정되기 이전 레벨 4를 받아본 몇 안 되는 선수였다. 외국 해설진들에게도 일본 여자 싱글에서 예외적으로 음악과 잘 어울리는 스케이팅을 한다는 평을 들었다. 당장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아사다 마오와 비교해봐도 안무를 비롯한 전체적인 스케이팅이 세련되고 깔끔하다. 과거 점프만 강조했던 일본 피겨 스케이팅에서 예술적으로 스케이팅을 하는 정말 레어한 선수였다.[25]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한 여자 싱글 선수다.[26] 이후 일본 모든 여자 싱글이 되지도 않는 트리플 악셀을 해야만 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나카노 유카리, 아사다 마오, 안도 미키(쿼드러플 살코), 키히라 리카가 기술 하나에 프로그램 전체를 잡아먹혔다. 그러나 키히라 리카는 그나마 나은 수준의 점프를 보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27] 지금도 프리로테이션을 하지 않고 공중에서 회전을 다 채워 착지하는 선수는 없다.[28] 주니어 시절 그녀를 담당했던 재활의학과 의사의 말로는, 성인 남자도 진통제를 링거째 투여해도 고통에 몸부림 칠 염좌, 골절, 멍이 온몸에 있었다고. "이 지경이 됐는데도 왜 병원에 안 왔냐"고 하자, '몸이 크는 중이라 그래서 살이 쪘겠구나 했다'고. 그리고 나서 댄 2번째 이유가 "연습할 시간이 아까워서"라고 하였다.[29] 다리를 X자로 가깝게 꼬면서 회전하는 자세를 의미한다.[30] 원래는 3Lz-3T로 계획했으나 실전에서는 변경하였다.[31] 사실 안도 미키의 4회전 살코가 다운 그레이드 수준의 회전 수를 보였기에 제대로 채점한다면 트리플 살코로 보는 것이 맞다. 결국 점수가 나오고 "아 역시나 4회전 살코를 뛰었네요."라고 발언한 것을 보면, 4회전 살코인 줄 알았으나 뭔가 부족한 걸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프로토콜에는 4S< 다운그레이드 판정을 받았다.[32] 유투브에 보면 "이토 미도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동영상이 있는데, 본인의 심정을 억지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해석하면 카타리나 비트가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2종 트리플만을 뛰었는데, 본인은 5종 7트리플을 뛰었는데 5위로 그쳐서 트리플 악셀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토 미도리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면서 억지로 한 말이라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