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절 열병식[1]에서 정계 수뇌부에게 등장 부대 설명을 해주는 쉬친셴 중장의 모습이다. 왼쪽이 후야오방, 오른쪽이 덩샤오핑이다. |
1. 개요
徐勤先(Xu Qinxian, 서근선)1935년 ~ 2021년 1월 8일
후베이성 샤오간시 다우현(大悟縣) 출신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베이징군구 소속 제38집단군 사령관이었다. 최종 계급은 예비역 중장이다.[2]
천안문 6.4 항쟁 당시 정부에서 하달된 강제 진압 명령을 최초로 거부했던 참군인이며 중국판 안병하다. 그는 "지금은 분명히 전시가 아니다. 그러니 구두 명령을 집행할 수 없고 진압 작전에 참여할 수도 없다"[3]라는 대답으로 베이징군구 부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2. 생애
쉬친셴 장군은 1935년 중화민국 호북성 예산현(禮山縣)[4]에서 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그가 16살이 되던 해인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자 군에 자원입대하였다.[5] 쉬친셴은 그곳에서 실전을 치렀고 제38집단군의 전차장이 되었다.
1980년 제1장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으며 1984년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그리고 바오딩시[6]에 기지를 둔 제38집단군의 부사령관을 거쳐 1987년 사령관에 올랐다. 이 자리는 한국으로 치면 수도기계화보병사단 그 이상의 위상을 가진 유서 깊은 정예부대[7]이기 때문에 출세 코스여서 웬만하면 상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고 위에서 보듯이 열병식에서 덩샤오핑과 나란히 등장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었다. 1988년에는 소장에 진급했다.
그런데 천안문 6.4 항쟁 당시 제38집단군 사령관으로서 출동 진압명령을 받았으나 쉬친셴은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라며 출동을 거부했다. 베이징 군구 사령관 저우이빙은 군 수뇌부에 보고했고 이후 군 수뇌부는[8] 쉬친셴을 해임하고 가택연금했다. 이후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한때 서방에서는 사형에 처해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명령 불복종 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중국공산당 당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출소 후에는 거주지 제한 조치가 취해져 허베이성 스자좡시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 홍콩 언론 빈과일보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역사의 죄인은 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급속히 발병하면서 사실상 봉쇄 상태에 들어간 스좌장시 소재 군 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2021년 1월 8일 사망했다.
3. 여담
- 바이두 백과에서는 "류야저우는 보고서에서 '쉬친셴은 인민해방군 내에서 현대화된 군사이론을 알고, 현대화된 무기를 잘 사용하던 몇 안 되는 소장파 장성이었다.'라고 평가했다."라고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인물평을 대신했다.
[1] 1984년 건국 35주년 열병식이다.[2] 인민해방군은 준장이 없는 대신 상교(대령) 위에 대교가 있기 때문에 이게 한국의 준장에 대응되며 소장, 중장은 모두 한국과 동일 계급이다. 다만 중국군 상장은 한국군 대장에 대응되고 현역 군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다. 인민해방군에는 대장과 원수가 있긴 하지만 이 계급은 1956년 창군 원로에게만 수여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수여되지 않는다.[3] 이런 명령은 당연히 문서화할 수도 없고 문서화하지도 않는다. 그도 이것을 알기에 이런 말로 대답했다.[4]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샤오간시 다우현(大悟縣).[5] 사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한 번 거부되었으나 혈서를 써서 억지로 들어갔다.[6] 베이징과 붙어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성남시 정도의 위치다.[7] 6.25 전쟁 때 수많은 공훈을 기리기 위해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에게서 만세군이라는 별칭까지 받았고 인민해방군 내의 등급별 카테고리에서 갑종 집단군으로 지정되어 장갑차와 전차 등을 보유한 장갑집단군으로 변모하였다.[8]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친지웨이 상장과 총참모장이었던 양더즈 상장은 온건파였고 군투입에 반대했기 때문에(이후 친지웨이는 연임이 아니라 단임으로 예편하였고 양더즈도 그해 11월 예편하고 둘 모두 군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참모차장이었던 류화칭이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양상쿤이 결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양상쿤은 당시 국가주석이기는 했지만 거의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에 실권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