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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폴란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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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폴란드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왕위 계승 갈등2.2. 리보니아 전쟁2.3. 구스타브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침공2.4. 대홍수2.5. 근대2.6. 현대
3. 대사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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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폴란드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오늘날 양국은 모두 유럽연합 가입 국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과거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그리고 스웨덴이 대북방전쟁으로 몰락하기 이전에는 발트해 지역에서 패권을 다투던 관계였다. 냉전 시기 스웨덴은 중립국이였고 폴란드는 공산진영이라 딱히 무덤덤한 관계였다.

오늘날 스웨덴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중립국 선언을 포기하였고, 반러국가가 되면서 현재 양국은 과거사를 뒤로 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을 강화하는 상황이다.

2. 역사적 관계

2.1.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왕위 계승 갈등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서기 1569년 7월 루블린 조약에 서명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탄생했다. 이후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선거로 군주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한 스테판 바토리 사후 스웨덴의 왕족이자 야기에우워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은 지그문트 3세 바사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 선출되었다. 1592년 스웨덴 국왕 요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인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그는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가톨릭이 주류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다르게 당시 스웨덴은 루터교회를 믿는 국가였고, 지그문트 3세는 가톨릭 신도였다. 지그문트 3세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1593년 웁살라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루터교가 스웨덴의 국교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스웨덴 안에서 다른 종교의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선언했다. 해당 결정은 국왕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었고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예배를 포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가톨릭을 포기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가 위태로워지는 입장인 지그문트 3세가 반발했고 국왕인 자신도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호위병으로 대동하고 스톡홀름에 도착한 후 몇 개의 교회에서 여전히 가톨릭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1594년 지그문트 3세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웁살라에 도착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4계급 대표들의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웁살라 종교회의 결정을 재확인하며 지그문트 3세를 압박하였다. 결국 지그문트 3세도 웁살라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을 수용해야 했지만 정작 대관식을 치르고 스톡홀름에 돌아오자 계속해서 가톨릭 예배를 거행하고 가톨릭 신자를 정부 요직에 배치했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가면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스웨덴 귀족들로 구성된 추밀원과 함께 스웨덴을 통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권한을 명시하지 않은 채 오히려 각 지방에 자신의 직속 관리와 조세 징수관을 파견하는 방법으로 통치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통치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자신을 섭정 임명을 요구했지만 섭정의 권한에 대해서는 귀족들과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1595년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를 통해 섭정으로 임명받고 지그문트 3세의 부재시 국왕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스웨덴 귀족들은 국왕인 지그문트 3세와 섭정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두 편으로 양분되었다. 겁을 먹은 수많은 스웨덴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고 클라우스 플레밍의 미망인인 에바 스텐보크가 차지한 오보까지 함락시키며 핀란드까지 장악하였다. 1598년이 되자 지그문트 3세가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지그문트 3세는 독일과 헝가리에서 용병을 모으고 서기 1598년 2월 리보니아 출신의 위르겐 폰 파렌스바흐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스웨덴을 침공하고자 했으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수송선 확보에 애를 먹고 날씨까지 좋지 않아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이 지그문트 3세에게 호응하여 일어난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핀란드 반란군이 먼저 우플란드에 상륙했지만 우플란드 농민군에게 격퇴당했다. 그러나 1598년 5월 폴란드군이 아바스케르에 상륙하여 8월 칼마르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지그문트 3세가 예틀란드로 진격하자 예틀란드 귀족들과 장교들이 합류했고 우플란드 기병대도 도착했으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도 증원군이 도착했다.

지그문트 3세는 수도인 스톡홀름까지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하지만 폴란드 함대는 폭풍우를 만나는 불운을 겪으며 괴멸되고 말았다. 이제 위기의식을 느낀 지그문트 3세가 린셰핑으로 후퇴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이를 뒤쫓았고 1598년 9월 25일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완전히 우위를 점하게 된 상태에서 린셰핑에서 지그문트 3세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지그문트 3세에게 폴란드군을 돌려보내고 지그문트 3세만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스웨덴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그리고 비록 지그문트 3세는 여전히 국왕으로서의 대우는 받았지만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598년말 폴란드로 도망치듯이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스웨덴 왕위가 공석이 되었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스웨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599년 7월 스웨덴 의회는 지그문트 3세의 공식적인 폐위를 선언하고 맏아들 브와디스와프가 스웨덴에서 루터교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조건으로만 왕위계승권을 인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의 시한이 종료될 때까지 별다른 회신을 받지 못하자 그대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새로운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인정했다. 이후 칼 9세는 3월 지그문트 3세를 지지했던 스웨덴 귀족 5명을 처형하는 '린셰핑 학살(Linköping Bloodbath)'을 다시한번 일으키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제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만이 유일하게 지그문트 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지그문트 3세와 다시 벌여야 했다.

2.2. 리보니아 전쟁

폴란드로 돌아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의 탈환을 원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sejm; 의회)의 지원을 얻기 힘들자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지지하는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고 1600년 리투아니아의 대(大) 헤트만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파견하여 몇차례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재정 부족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면에 스웨덴은 국지전의 연패에도 불구하고 징집제를 통해서 많은 군대를 단시간에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에스토니아를 넘어서 이제는 리보니아까지 넘볼 정도가 되었다.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세임도 병력 증원을 결정하였고 1601년 오스만 제국몰다비아 공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야전 헤트만인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리보니아에 도착하여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와 합류하였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3,000명에 불과했고 스웨덴 군은 5,000명에 그 중 기병만 4,000기에 달했지만 1601년 6월 23일 코켄하우젠 전투에서 오히려 스웨덴군이 폴란드 후사리아를 중심으로 한 1,000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병대에게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패를 당했다.

코켄하우젠 전투 이후에 폴란드의 대(大) 헤트만 얀 자모이스키까지 합류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에 스웨덴은 1602년이 되면 그동안 점령했던 리보니아 영토를 대부분 내주며 레발, 페르나우, 하프살, 도르파트 정도만 겨우 유지할 뿐이었다. 비록 60세의 고령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폴란드로 귀국했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1603년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이 이그는 스웨덴군을 격파하고 도르파트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칼 9세가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리가에 도착했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다시한번 승리를 거두면서 스웨덴의 영역은 더욱 축소됐다. 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이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거절했지만 스웨덴 의회는 1605년 병력 증원을 결의했다.

이에 칼 9세가 10,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1605년 9월 키르홀름에서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보유 병력이 3,600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윙드 후사르에게 고전했던 경험 때문에 7~8열의 격자 진형을 편성하는 극단적인 수비적인 작전을 펼쳤다. 그렇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4시간에 걸쳐 거짓 후퇴로 유인하자 신중했던 칼 9세도 추격을 시작했으나 정작 전투가 개시되자 불과 30분 만에 스웨덴 기병이 윙드 후사르를 위시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병대에게 괴멸당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키르홀름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8,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혔고 칼 9세도 겨우 목숨만 구한 채 정신없이 도망쳤을 정도로 일방적인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실의에 잠긴 칼 9세가 리가 탈환을 포기한 채 스웨덴으로 귀국했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도 키르홀름 전투의 경의로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재정 부족 때문에 라트갈레(현 라트비아의 동쪽) 지역에서 방어적인 자세만 유지했다. 더구나 1606년 폴란드에서 지그문트 3세의 지나친 왕권 강화에 대항하는 미코와이 제브지도프스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도 폴란드로 귀환했다. 이에 1608년 요하임 프레데리크 폰 만스펠드가 새로운 스웨덴 군을 이끌고 리보니아를 재침공했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되돌아오면서 10월 가우야 강 전투에서 다시한번 패배를 당했다. 이후에도 전쟁은 이어지지만 국지전에 불과했고 1611년 칼 9세가 사망하면서 공식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2.3. 구스타브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침공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17년 6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공격하였다. 스웨덴군은 1621년 8월 공격을 재개하여 1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리보니아의 주도인 리가를 함락시켰다. 이후 잠시 간의 휴전 끝에 1625년 휴전 기한이 종료되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리보니아에 대한 대공세를 재개하여 1626년 1월 17일 발호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리보니아를 장악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장을 확대하여 1626년 6월 프로이센 공국에 상륙하였다. 그의 의도는 리가에 이어 그단스크(단치히)까지 점령하여 발트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보병, 기병, 포병의 새로운 3병 합동전술을 앞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자랑하는 윙드 후사르를 상대로 그니에프 전투와 챠르네 전투, 디르샤우 전투 등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프로이센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지원하면서 1629년 6월의 트슈치아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결국 1629년 10월 6년 기한의 알트마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2.4. 대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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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근대

대홍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유럽의 강대국 지위를 잃고 몰락하였으나 전성기를 누리던 스웨덴 왕국 역시 대북방전쟁에서 러시아에게 패전하면서 발트해 연안을 할양했다. 러시아 제국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을 병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은 더 이상 국경을 접하지 않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양국 사이의 전쟁이나 대외 교류도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2.6. 현대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던 독일 제국(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제1차 세계 대전으로 사라지면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피지배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영토 상당부분을 독립시켰다. 이미 1차대전 종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러시아 제국이 혁명이 일어나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폴란드 영토를 독일에게 넘겨주었던 상황이었다. 그 결과 폴란드 제2공화국이 건국되었고, 스웨덴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재개하기 이른다.

독소전쟁이 종결되는 과정에서 폴란드 영토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폴란드에는 소련의 위성국가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들어섰다. 폴란드는 제2세계 진영에 편입되어 제1세계에 속하게 된 스웨덴과 제한적인 교류만 이어졌다.

폴란드 민주화 그리고 소련의 해체 이후 폴란드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였고 스웨덴과 교류 및 협력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오늘날 스웨덴에는 약 9만여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2018년 7월, 폴란드가 스웨덴의 대형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 139명의 소방관과 44대의 소방 차량을 보냈다.

3. 대사관

스톡홀름에 주 스웨덴 폴란드 대사관, 바르샤바에 주 폴란드 스웨덴 대사관이 존재한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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