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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1918년 독립 이후로 한 동안 적대관계였지만, 20세기 말에 양국이 공산권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오늘날 양국은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고 반러성향이 있는 편이다.2. 역사적 관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이름으로 연방제 통일 국가를 이룬 역사가 있다.2.1. 중세
중세 폴란드 왕국은 북방의 발트족 부족들과 전쟁이 잦았다.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는 북방의 프루스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튜튼 기사단을 초빙하였고 고대 프로이센을 정복한 튜튼 기사단은 여세를 몰아 리투아니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튜튼 기사단의 압력을 받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부족간 상쟁을 멈추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통일하였으며, 오늘날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흑루테니아, 백루테니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새로 영토를 확장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적루테니아 일대 영토를 두고 폴란드 왕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는 전쟁도 드물지는 않았다.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를 이어준 것은 튜튼 기사단의 위협이었다.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본토 동부의 제마이티야(사모기티아) 상당 부분을 장악한 것은 물론 폴란드 왕국까지 침공하기를 반복했다. 중세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튜튼 기사단에 맞서기 위해 1385년 크레보 연합을 통해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의 결혼으로 야기에우워 왕조가 세워졌다.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막내 아들이었는데, 다른 형들 상당수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동안 자신은 발트 토속신앙을 고수하였다가 크레보 연합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1] 이후 요가일라는 폴란드 왕국을 다스리며 그의 사촌인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통치하는 명목상 동군연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동유럽 내 킵차크 칸국의 잔재를 일소하였으며, 동군연합은 발트해 너머 동유럽으로 확장하던 튜튼 기사단국을 그룬발트 전투를 통해 격파하였다. 튜튼 십자군에 맞섰던 리투아니아였지만, 요가일라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빌뉴스 일대의 발트 신화 성소이던 삼림을 밀어버린 이후 리투아니아인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와 동군연합으로 엮이게 된 이후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혼인을 통해 리투아니아 측이 공식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일 당시, 폴란드에서 빌뉴스로 가톨릭 사제들을 파견하였고 성당이 폴란드 문화를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루테니아 귀족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폴란드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는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에게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면서 상당수가 몇 세대 이후 폴란드인과 완전 동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제마이티야(사모기티아) 지방 카우나스 일대는 반기독교 감정이 더 강했고 이 지역의 가톨릭 문화 유입은 빌뉴스보다 늦게 진행된 편이었다.[2]
2.2. 근세
1440년부로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 제위 시기를 기점으로 폴란드의 국왕은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동시에 양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폴란드 의회와 리투아니아 의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들은 리투아니아에서는 세습 대공[3]이었으나 폴란드에서는 엄연히 선출 국왕이었다. 이후 루스 차르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갈등 및 계속된 크림 타타르의 침략으로 리투아니아 귀족들 상당수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를 계기삼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1569년 7월 1일부로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하였다. 통일 과정에서 적지않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귀족들이 반발하였으나 폴란드 왕국 군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짜 영토인 우크라이나 초르노젬 지대를 병합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미 루스 차르국의 군사적 압력에 위협을 받던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폴란드에서 강경하게 나왔고 리투아니아 내부에서조차 소귀족이나 각 지역 대표들이 대귀족들을 비판하는 여론이 강해지자 연방 통일을 순순히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인 귀족과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연방 법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법[4]을 기반으로 다시 짜여졌다. 이후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폴란드인 귀족들 사이의 통혼이 일상화되고 루테니아인, 리투아니아인 귀족 상당수가 폴란드인 귀족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연방의 영토는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라트비아까지 이어졌다.루블린 조약에 의한 연방제 통일 이후 17~18세기에는 리투아니아어보다 폴란드어가 리투아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다.[5] 동유럽에서 폴란드 귀족 문화는 첨단 호화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당시부터 수도 빌뉴스의 상류층들이 이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상당수 귀족 가문들이 폴란드식 성으로 개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1569년까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내에서 폴란드인이 공직을 맡거나 토지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이후로는 이런 제약이 풀리면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귀족 사이의 통혼이 크게 증가하였다. 국제 도시로 성장한 빌뉴스와 그 근교에서는 주민들이 수백여년에 걸쳐 폴란드인들과 통혼하며 폴란드어를 사용하다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대홍수 당시 야누시 라지비우 등등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연방이 흐멜니츠키 봉기와 루스 차르국의 침공으로 흔들리는 사이 스웨덴과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주장하는 케다이니아이 조약에 서명하였고, 상당수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귀족들이 여기에 동참하면서 한 때 연방은 존폐 위기를 맞았다. 당시 케다니이아이 조약에 참여한 리투아니아 대공국 귀족들은 리투아니아가 지나치게 폴란드에 예속되어간다는 점과 연방제 통일 당시 기대했던 바와 다르다는(즉 폴란드가 루스 차르국의 공격으로부터 리투아니아를 잘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케다이니아이 조약 이전 상당수의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이 스스로를 폴란드 왕국 귀족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개신교[6]를 믿고 보급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케다이니아이 조약을 비준했던 야누시 라지비우가 서명 이후 2달 만에 사망하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영내에 진입한 스웨덴군이 약탈을 일삼자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들의 민심은 스웨덴으로부터 돌아섰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의 침입을 격퇴한 이후 국체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7]
18세기 말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분할을 통해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폴란드 동북부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서북부와 소 리투아니아[8] 지역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 남부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차지했다.
2.3. 19세기
19세기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대육군의 도움으로 폴란드와 함께 잠시 독립했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폴란드 분할이 고착화되었다. 1830년 11월 폴란드 독립 봉기 당시에는 구 귀족 계급 사이에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인이 서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으로서 정체성을 공유하는 편이었지만,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정체성이 희박한 편이었다. 1861년 1월 봉기마저도 실패하고 러시아 제국은 같은 해 진행된 농노 해방 과정에서 폴란드인 귀족들을 대상으로는 가급적 최소한의 보장을 해주는 방향으로 폴란드인 및 친폴란드계 귀족들의 입지를 흔들어버렸다. 물론 1830년, 1861년 봉기에 참여했던 폴란드 지주들의 토지가 몰수당한 것은 덤이었다. 이 과정에서 구 폴란드-리투아니아 엘리트들이 공유하던 이른바 폴란드-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은 흔들리고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의 민족 정체성이 도시 소상인들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877년 리투아니아의 사제 카지미에라스 야우니우스가 리투아니아 정서법에서 폴란드어 알파벳 sz와 ż를 제거하고 대신 체코어 알파벳 Č, Š, Ž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모두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서 문화, 언어 등을 탄압받았다. 하지만 폴란드의 경우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폴란드인들이 같은 폴란드인 정체성을 공유했던 반면[9] 리투아니아의 경우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메멜란트의 리투아니아인 개신교인과 러시아 제국 내 가톨릭을 믿는 리투아니아인이 서로 정체성이 달랐다. 러시아 제국 내 리투아니아인은 탄압받는 상황에서도 러시아로부터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리투아니아인 동포들로부터 리투아니아어로 된 책을 밀수하며 리투아니아어 문학과 민족주의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현대 리투아니아어는 이렇게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문화를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라틴어 어휘를 상당부분 받아들이며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폴란드가 자랑하는 국민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출신인데, 본인은 폴란드어로 시를 썼지만 오늘날의 벨라루스 일대에서 태어났으며 빌뉴스 대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리투아니아 쪽에도 애정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인도 미츠키에비치를 자국 시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당시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 상류층들은 친 폴란드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은 러시아 제국 시대 카우나스 일대의 제마이티야 일대 주민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4. 20세기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근교 지역은 폴란드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폴란드인들 역시 빌뉴스를 폴란드의 고토로 간주하던 상황이었다. 이를 이유로 리투아니아 지역 출신 폴란드인 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폴란드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영토였던 빌뉴스를 점령했다. 이른바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이 수립된 이후 폴란드에 합병되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은 적대관계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서로 수교하지 않고 대치하였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는 동안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점령 과정에서 소련에게 병합당했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나치 독일군이 리투아니아에 진주하는 동안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수준의 심각한 인명 피해는 겪지 않았지만,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로 인해 전체 유대인 인구의 90~91%가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공화국으로 편입되고 폴란드도 소련의 영향으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에 리투아니아는 독립국이 되고 폴란드도 80년대 말에 민주화가 되면서 공산정권이 붕괴되었다. 한편,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인들이 빌뉴스 근교 지역에서 자치구역 선포를 했고, 소련 당국의 지지도 얻었지만, 폴란드 정부에서 이들이 공산당의 지원을 얻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인들의 권리만 보장된다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지지할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2.5. 21세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까지 유럽연합, 나토에 가입하게 되었다. 양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은 편이다. 특히 양국은 가톨릭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현재도 리투아니아 내에는 폴란드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최대 규모 소수민족은 폴란드인으로(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 문서 참조) 전체 인구의 5.4% 정도를 차지한다.[10] 리투아니아 폴란드인 선거활동-기독교 가족 연합(AWPL)이라는 정당이 국회 141석 중 8석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해당 정당 성향에서 보듯 일반적인 폴란드 국민들이 러시아에 대해 무척 적대적인 것과 다르게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들은 친러 성향이 강한 편이다.
역사적인 이유로 일부 갈등이 존재하지만,[11] 전반적으로는 교류, 협력이 활발하다.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 위기를 일으키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사협력을 추진했다. 그리고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 때에는 러시아 외교관 추방정책에도 참여했다. 양국은 2021년 벨라루스-유럽 연합 국경 위기에서도 공동대응하고 있다.[1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양국을 연결하는 가스라인을 조기에 개통하기로 합의하였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연결하는 새 가스관이 개통했다.#
2022년 7월 7일 폴란드 대통령 안제이 두다와 리투아니아 대통령 기타우스 나우세다가 수바우키 회랑에서 만나 완전한 연대를 선언했다.#
3. 교통 교류
LOT 폴란드 항공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과 빌뉴스 국제공항 직항 노선을 연결하고 있다. 이 외에도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와 바르샤바를 잇는 고속 버스가 운영되고 있는데, 6시간 정도 걸린다.4. 관련 문서
- 폴란드/외교
- 리투아니아/외교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 유럽 연합 / 발트해 국가 이사회
- 루블린 삼각동맹
- 수바우키 회랑
- 폴란드/역사
- 리투아니아/역사
- 폴란드/경제
- 리투아니아/경제
- 폴란드인 / 리투아니아인 /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
- 폴란드어 / 리투아니아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북유럽 국가
[1] 정작 야드비가 왕비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유증으로 아이와 함께 죽었고, 이후 요가일라(야기에우워)는 재혼했다. 물론 이미 요가일라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황이므로 폴란드 귀족들이 함부로 딴지 걸기도 애매했다.[2] 이는 근대 빌뉴스 일대가 완전히 폴란드화한 것과 다르게 카우나스 일대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리투아니아어가 보존되는 상황으로도 이어졌다.[3] 야기에우워 왕조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 가문이었던 게디미나스 가문의 직계임을 감안하면 리투아니아 세습은 당연했다.[4] 당시 대공국 법은 루테니아인과 리투아니아인들 상호간의 갈등을 예방하고 이익을 조율하기 위해 짜여진 법으로 폴란드 왕국 법보다 더 세밀하고 상세한 편이었다.[5] 심지어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1945년 소련이 지배하기 전까지 인구의 80%가 폴란드인이었고, 1920-39년 사이에는 폴란드가 괴뢰국을 세워 두었다가 아예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6] 독일계 폴란드인들이 주로 믿던 루터교회 신도도 있었으나, 좀 더 독자적인 정체성을 추구했던 이들은 칼뱅교회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파 유니테리언을 믿었다.[7] 흥미롭게도 근대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일체감을 가지고 있던 19세기 당시에는 스웨덴 편을 들었던 야누시 라지비우 등등의 귀족들이 매국노로 지탄받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 리투아니아에서는 야누시 라지비우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8] 현재의 클라이페다 일대로 이곳은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14세기부터 계속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9] 여기에는 폴란드 일대가 드넓은 평야지대로서 지역간 방언의 차이가 상당히 적었던 이유도 있다.[10] 동남부에는 리투아니아인보다 폴란드인이 많은 지역도 있다.[11] 앞서 서술한 폴란드가 독립한지 얼마 안 있어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가 리투아니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침공, 강탈한 탓에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국교조차 수립되지 않았다. 빌뉴스를 위시한 폴란드가 빼앗았던 영토는 폴란드가 분할될때 독일과 소련은 빌뉴스는 점령하지 않고 리투아니아에게 반환해줬다. 하지만 어차피 곧 소련에게 합병되긴 했지만.[12] 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발트 3국 자체가 지리적 특성상 폴란드가 없으면 서방과의 육상 연결이 끊긴다. 당장에 앞동네가 러시아와 벨라루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