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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의 관계를 설명한 문서. 두 나라 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은 나라 이기도 하고 러시아와는 갈등이 있다. 그리고 양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2. 역사적 관계
2.1. 리투아니아 대공국
두 나라의 연결점은 키예프 대공국 멸망과 뒤이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에서 시작된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은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이러한 공국들을 하나씩 병합하면서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을 석권하였다. 리투아니아 세력은 루테니아 영토를 합병할 때면, 언제나 지역 주민들 특히 지역 기득권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지방 법률을 보존하며 상인들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 영민함을 보였다. 14세기 말 이전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발트 신화를 믿었던 시기에는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의 지도층들과 자주 통혼하였다. 14세기 게디미나스 치세의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방향으로 진출하여 과거 키예프 공국에 해당하던 영토 상당수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우크라이나 공령들은 전쟁이나 투쟁도 없이 조용하고 눈에 띄지도 않게 하나씩 차례로 리투아니아 대공들의 권력 아래로 넘어갔는데,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사료에서 이 같은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리투아니아 공들이 큰 힘 들이지 않고 공령들을 합병하곤 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게디미다스의 사망 이후 아들 알기르다스는 타타르인들로부터 키예프, 비텝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지방 및 스몰렌스크를 정복했다. 알기르다스는 마침 동시기에 똑같이 통일을 이룩하고 확장에 매진하던 폴란드와는 루테니아 지방을 놓고 확장 경쟁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승자는 리투아니아 쪽이었다. 게디미나스의 아들 알기르다스가 사망한 1377년에 이르면 리투아니아는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닌 유럽의 대국으로 자라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확장은 15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1392년부터 1430년까지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다스리며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큰 영토 팽창을 이루었다. 이를 반영하듯 15세기 중반까지 리투아니아의 연대기 작가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야말로 키예프 대공국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입장에서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영토를 확장했으나 리투아니아 본토가 튜튼 기사단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야드비가와의 결혼을 통해 폴란드 왕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한다. 폴란드인 성직자들이 빌뉴스 등에 정착하며 발트 신화를 믿던 리투아니아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루테니아인들과 종교적으로 좀 더 거리가 벌어졌다.[1]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들과 결혼하면서 시간이 지나며 상당수 시민들이 완전히 폴란드인들과 동화되기 이르렀으며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정복은 결과적으로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지배를 부른 셈이었다.
2.2.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과 전쟁을 치르며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킵차크 칸국에서 갈라져나온 크림 칸국을 지원하였는데 이 크림 칸국은 전열을 가다듬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 특히 우크라이나 일대를 집중적으로 약탈하게 된다. 크림 타타르인들의 약탈은 일반적인 약탈이 아닌 초토화 작전을 동반한 노예 사냥으로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 지대가 크림 칸국의 약탈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무인지대로 전락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확장은 전투력이나 기술력의 우위보다는 정치적인 전략을 잘 활용했던 바가 더 컸기에 크림 타타르인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하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상실한 공백지 영토에 슬라브계 탈주 농노들이 자치 공동체를 구성하며 반농반목 생활을 하고 자력으로 크림 타타르의 공격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일대를 방어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코사크이다.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크림 칸국의 공격 및 모스크바 공국의 공격으로 점점 영토를 상실하고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동의하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우크라이나 현지 지주들 역시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폴란드인과 동화된다. 루블린 조약 직전에는 폴란드 왕국 측에서 연방제 통일을 반대하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압박할 목적으로 우크라이나 일대의 리투아니아계 귀족들을 축출하였고 한 때 상당부분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지방은 연방 내 폴란드 왕국 영토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 중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로 잔류한 지역은 베레스테이스크 지역과 핀스크 지역 두 곳 뿐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입지가 축소되자 여기에 반발한 리투아니아 귀족들 및 시민 중 상당수는 칼뱅파 혹은 유니테리언 교회로 개종하였다.[2]
상술한대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우크라이나 일대로 영토를 급격히 확장하던 14~15세기 당시 리투아니아 측은 "우리는 새 것을 들여오지도 않고, 옛 것을 바꾸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며 현지 기득권층을 안정시켰고, 종교로 인한 갈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의 대귀족들 그리고 루테니아의 기득권층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화하면서, 정교회를 고수하는 여타 루테니아 농노들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3] 폴란드 대귀족들과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도들 사이의 갈등은 결국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대봉기라는 형태로 폭발하였다.
흐멜니츠키 대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흔들리는 사이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왕국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방을 공격하였다. 정교회를 믿는 코사크 상당수가 루스 차르국 측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리투아니아 대귀족들, 특히 칼뱅파나 유니테리언을 믿는 귀족들이 과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상실한 영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1655년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 측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유니테리언들의 권익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었고, 이들을 그저 괴이한 이단 정도로 여겼다. 여기에 실망한 유니테리언 귀족들은 유리 네미리치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코사크 측에 접근하였고, 결국 1657년 유리 네미리치는 코사크 헤트만국으로 이주를 결정하였다.
스웨덴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폴란드의 가톨릭교도들이 스웨덴 왕국의 가톨릭 성당 약탈에 분개하여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폴란드 각지에서 스웨덴군을 쳐부수는 사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 시도마저 좌절되었고 스웨덴 측에 투항했던 폴란드 내 개신교도들은 매국노로 찍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유리 네미리치를 비롯한 상당수의 리투아니아인 유니테리언들은 생존을 위해 정교회로 종교를 갈아타버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까지 몰렸다.
결국 스웨덴에 투항했었던 리투아니아인 개신교도 + 유니테리언 귀족들을 중심으로 코사크 헤트만국을 루테니아 대공국으로 승격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담은 하디아크 조약이 1658년부로 체결되었다. 그러나 루테니아의 코사크들을 지원하던 루스 차르국은 기껏 자신들이 침 발라 놓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이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돌아가는 것을 순순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루스 차르국 측은 자신들이 정교회를 믿는 코사크들을 보호해주는 진정한 정교회의 보호자라며 다른 코사크들을 선동하며, 1859년부로 유리 네미리치를 죽이고 하디아크 조약을 파토내버렸다. 이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시도는 좌절되고 키예프와 그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모두 루스 차르국의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상실한 것을 계기로 국력에 막대한 타격을 받고 결국 18세기 말에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다.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4] 리투아니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상으로 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는 상당히 가혹했던 편이었고, 오늘날 양국은 종교 차이를 떠나서 당시 러시아 제국 통치에 대한 역사적 반감을 공유하고 있다.
2.3. 19세기
1897년의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리투아니아 지역 내 우크라이나인 인구는 2,500여 명 정도에 달했다.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리투아니아인 인구는 상당수가 폴란드인과 동화되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이 초청한 유대인 인구 역시 우크라이나 인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리투아니아 중 러시아 제국에 속한 지역은 주로 가톨릭을 믿었고, 서쪽 클라이페다 일대의 소리투아니아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의 오랜 지배의 영향으로 루터교회를 믿었다. 리투아니아 개신교도들이 리투아니아어로 인쇄한 책은 러시아 제국 영내의 리투아니아인 가정들로 밀수되었고 이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발전 및 식자율 개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문해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5]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의 상황은 이만큼 좋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리투아니아인들처럼 거주지역 대부분이 러시아 제국 영토였고 서쪽의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 있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동포들과 연락이 가능했다.[6] 그러나 프로이센령 리투아니아 주민들과 다르게 오스트리아 제국령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은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 제국 내 동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 힘든 입장이었다.
2.4. 20세기
20세기 초까지 두 지역 모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중 적백내전이 터지면서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 1공화국으로 독립을 이룩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독립에 실패하고 그대로 소련의 구성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다.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은 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가 차지했으며, 로마 가톨릭이 아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우크라이나계에 대한 차별이 지속되었다. 또한 폴란드는 리투아니아를 기습하여 빌뉴스를 점령하였고, 리투아니아는 카우나스로 천도하고 빌뉴스를 미수복영토로 선언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리투아니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반러 감정 외에도 반폴란드 감정도 같이 공유하게 되었다.이후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독일에 잠시 점령당했다가 소련이 리투아니아의 나치 독일군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그대로 소련의 구성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삼는다. 우크라이나 역시 나치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는데, 나치 독일군의 약탈과 학살은 우크라이나에서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소련에서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들을 리투아니아에 일부 정착시키는 과정이 1989년에는 44,789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거주하였다 한다.[7] 이후 1991년 소련 해체가 이루어 지면서 두 나라 모두 독립국의 지휘를 얻게 된다.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리투아니아인 및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2.5. 21세기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 푸틴의 러시아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갈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로 양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2004년에 유럽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다. 우크라이나도 2010년대부터 러시아와 갈등을 겪으면서 유럽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리투아니아측에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리투아니아내에는 소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2011년 기준 1만 6천여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리투아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갈리치아에서 온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2021년 7월 27일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르비우에서 미국,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군사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2023년 2월 22일, 주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대사는 7월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한다고 밝혔다.#
3. 문화 교류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귀족들은 유대인들을 마름 혹은 도시 소상인으로 부렸는데, 이를 계기로 한 때 우크라이나 일대는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리투아니아 일대의 아슈케나짐 그룹은 이른바 리타임으로 그리고 폴란드 왕국 영토 동부 갈리치아 일대의 아슈케나짐 그룹은 하시딤으로 불리며 서로 대치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는데, 양자 사이의 대결은 단순한 지역 감정 이외에도 리타임의 이성주의-합리주의 신학 대 하시딤의 신비주의 신학 사이의 대립이기도 했다.4. 관련 문서
- 우크라이나/외교 / 유럽연합-우크라이나 관계
- 리투아니아/외교
- 우크라이나/역사
- 리투아니아/역사
- 유럽 평의회 / 루블린 삼각동맹
- 우크라이나/경제
- 리투아니아/경제
- 우크라이나인 / 리투아니아인
- 우크라이나어 / 리투아니아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북유럽 국가
[1] 물론 이교와 정교회 자체의 종교적 거리가 더 멀지만 과거에는 이교를 믿는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 귀족과의 통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갈등은 이런 점에서 발트 신화를 믿던 시절보다 루테니아인과 리투아니아인 사이를 더 벌려놨다.[2]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한데, 가톨릭은 폴란드인을 상징하는 종파였고, 루터교회는 독일인을 상징하는 종파였으며, 정교회는 루테니아인들을 상징하는 종파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별개의 종파를 믿어 자신들을 별개의 리투아니아인으로 구분짓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3]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문서 참조[4] 중세부터 프로이센이 장악한 리투아니아 마이너(쾨니히스베르크 일대) 및 오스트리아가 장악한 갈리치아 지방 제외[5] 1904년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의 평균 문해율은 약 70%로 유대인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다. 아직 리투아니아인 상당수가 농민이고 유대인들은 대부분 도회지에 거주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수준[6] 프로이센 영토에 있는 리투아니아인들과 러시아 제국 영토에 있는 리투아니아인들이 종교가 달랐던 것처럼 러시아 제국 영토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종파가 달랐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정교회를 믿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에 속해있었다.[7] 2차대전 전후 독일인 인구를 대거 추방하여 인구가 감소했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경우와 다르게 리투아니아의 경우 독일계 인구가 적어서 전후 독일인 추방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적은 편이었다.칼리닌그라드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