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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우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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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16대 대공
비타우타스
Vytautas
파일:Vytautas.jpg
이름 비타우타스(Vytautas)
출생 135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세니에지 트라카이 성
사망 1430년 3월 17일 (80세)
리투아니아 대공국 세니에지 트라카이 성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총독
1392년 8월 4일 ~ 1401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401년 ~ 1430년 3월 17일
배우자 오나 (1392년 결혼 / 1418년 사망)
울리아나 홀샨스캬 (1418년 결혼)
자녀 조피아
아버지 켕스투티스
어머니 비루테
형제 6명
종교 발트 신화가톨릭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4. 가족5.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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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16대 대공. 폴란드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사촌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성기를 견인한 명군이다.

2. 언어별 표기

리투아니아어Vytautas
폴란드어Witold Kiejstutowicz
벨라루스어Вітаўт
우크라이나어Вітовт
러시아어Витовт
고대 독일어Wythaws

3. 생애

당시 트라카이 공작이었으며 훗날 리투아니아 대공국 14대 대공이 될 켕스투티스발트 신화 종교 여사제로 알려진 비루테의 아들이다. 16세기에 집필된 <리투아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켕스투티스는 비루테가 무척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클라이페다에 방문하여 그녀를 대면한 뒤 결혼을 요청했다. 비루테는 신들에게 순결을 맹세했다며 거부했지만, 켕스투티스는 그녀를 강제로 트라카이로 데려가 호화로운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대체로 1350년경일 거라고 추정한다. 초년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376년 아버지에 의해 흐로드나 공작에 선임되었다는 것만은 전해진다.

비타우타스가 태어났을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을 자처한 알기르다스와 트라카이 공작을 자처한 켕스투티스 형제에 의해 양분되었다. 알기르다스는 동방 전선을 책임지고 루스 공국들과 킵차크 칸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벌였고, 켕스투티스는 서방 전선을 맡아 헝가리 왕국러요시 1세, 폴란드 왕국카지미에시 3세, 튜튼 기사단국,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영역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홀로 상대하기에 벅찰 경우 서로 협력해 외적에 맞섰다. 이 시스템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켕스투티스가 서방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분전하는 동안, 알기르다스는 루테니아 전역에서 킵차크 칸국을 몰아내고 키예프를 장악하는 등 동방 영토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서방 기독교 세력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리투아니아는 점점 피폐해졌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1362년에서 1370년 사이에 약 20번의 원정을 감행했다.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 북쪽과 스벤토지 강 유역을 습격했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북서쪽 국경지대를 공략했다. 이들은 수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사로잡은 뒤 무슬림에게 노예로 팔아넘겨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점령지에 요새를 신설해 지배력을 굳혔다. 급기야 1365년, 켕스투티스의 아들 부타우타스가 아버지와 알기르다스가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에 참여한 형제 나리만타스를 돕기 위해 볼히니아에 가 있는 틈을 타 여러 귀족과 함께 빌뉴스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빌뉴스 총독 디르수나스에게 발각되었고, 부타우타스는 추종자들과 함께 튜튼 기사단국으로 망명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헨리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1365년 8월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침공을 감독해 리투아니아 수도권에 위치한 케르나베와 마이시아갈라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1367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리투아니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연이은 침공으로 피폐해진 틈을 타 루테니아를 침공해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땅의 주군인 루바트로부터 블라디므르와 루스크를 계속 다스리는 대가로 모든 적에 맞서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8년, 리투아니아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조프셰를 침공해 프워츠크, 체르빈스크, 비쇼그로드, 풀투스크를 파괴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1370년, 튜튼 기사단의 거듭된 침략에 견디지 못한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리투아니아인, 사모기티아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프로이센으로 쳐들어가서 쾨니히스부르크 북쪽의 루다우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이어진 루다우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패배해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다. 1376년 11월 카지미에시 3세 사후 폴란드 왕국이 내란에 휘말린 틈을 타 일전에 카지미에시 3세가 빼앗아갔던 루테니아를 탈환한 뒤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헝가리 겸 폴란드 국왕 러요시 1세의 반격으로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튜튼 기사단이 헝가리의 리투아니아 공세에 가담해 1377년 2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포위했다. 알기르다스는 이를 가까스로 격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병에 걸려 1377년 5월 24일 빌뉴스에서 사망했다. 알기르다스 사후, 빌뉴스에 있던 유일한 아들인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에 선임되었다.

켕스투티스는 초기에는 요가일라의 집권을 용인했고,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튜튼 기사단과의 항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377년 여름, 러요시 1세는 루테니아로 친정해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여기에 요가일라가 1380년 튜튼 기사단과 도비디슈케스 조약을 체결해, 기사단이 켕스투티스를 공격할 경우 자신은 돕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두 사람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켕스투티스는 튜튼 기사단이 트라카이 공국과 사모가타이 공국을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느라 큰 손실을 입으면서, 알가르다스와는 달리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요가일라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요가일라는 오히려 그가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서,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군대를 대신 이끌게 하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도비디슈케스 조약의 내용이 누설되었고, 켕스투티스는 극도로 분노해 조카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1381년 요가일라에 의해 빌뉴스의 대리통치자로 선임된 스키르가일라가 폴라츠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빌뉴스에 입성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등극했다. 요가일라는 곧 체포되었고, 크레바와 비테브스크에 잇따라 연금되었다가 자유를 대가로 모든 직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켕스투티스가 오랜 적인 튜튼 기사단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부과하자, 리투아니아 주민, 특히 상인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가일라가 대공에 복위하기를 희망했다. 요가일라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스키르가일라, 카리부타스와 동맹을 맺고 반격을 준비했다.

1382년 튜튼 기사단장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그바르데이스크에 이르렀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요가일라에게 사절을 보내 사모기티아의 영토를 양보해주면 그가 집권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요가일라는 이에 힘입어 트라카이를 공략한 뒤 리투아니아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다. 빌뉴스 주민들은 리가의 상인 하눌의 선동을 받고 요가일라의 군대가 빌뉴스에 은밀하게 진입하는 것을 받아들었다.

나중에 빌뉴스가 요가일라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켕스투티스는 회군했지만, 대규모 내전을 피하고 싶었기에 아들 비타우타스와 함께 요가일라와 만나서 협상했다. 그러나 협상 도중에 요가일라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에 의해 생포되었고, 그 후 크레바 성내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했고, 켕스투티스는 1382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그가 자연사했다는 기록과 자살했다는 기록, 요가일라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제기되었지만 이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게 켕스투티스와 비타우타스 부자를 감옥에 가둔 후,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에 복위했다.

리투아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비타우타스의 아내 오나는 2명의 하녀와 함께 감옥으로 들어간 뒤 그 중 한 하녀에게 비타우타스와 옷을 교환하도록 했고, 비타우타스는 그것을 입고 여자로 변장해 감옥을 탈출했다고 한다. 반면 <튜튼 기사단 연대기>의 저자 마르쿠브르크의 비간트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하녀가 아닌 오나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오나는 크레바 성에 남아 있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석방되거나 탈출했는데, 그 경위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아내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온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에게 복수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튜튼 기사단에 망명했다.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발렌로드는 이를 빌미삼아 요가일라와 맺었던 합의를 파기하고 리투아니아에 대한 습격전을 이어갔다. 요기일라는 튜튼 기사단과 평화 협약을 맺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382년 11월 1일 기사단이 프로이센리보니아를 연결하는데 필요한 사모기티아 영토를 가지도록 허용하며, 4년 이내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두비샤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휴전 협정을 맺어놓고도 꾸준히 습격대를 보내 리투아니아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는 짓을 반복했다. 요가일라는 이들을 막는 데 전념하기 위해 1383년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83년 7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9월 초,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는 트라카이를 잠시 장악하고 빌뉴스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383년 10월 21일, 비타우타스는 타파아와(현재 그바르데이스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은 뒤 위간다(Wiganda)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네만강 어귀의 영지를 수여받았고, 그곳에서 요가일라에 의해 추방된 자신의 가족 및 추종자들과 재회했다. 1384년 1월 30일, 비타우타스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조약을 체결해 튜튼 기사단의 가신이 되었고, 네비자강 일대까지 이르는 사모기티아 일부를 튜튼 기사단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5월,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에 '누베 마리엔베르더(Neue Marienwerder)'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성채를 건설했다.

한편, 요가일라는 디미트리 돈스코이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정교회로 개종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면서도 비타우타스에게 볼히니아와 루츠크를 줄 테니 내전을 끝내고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비타우타스는 아버지 켕스투티스가 생전에 이끌었던 트라카이를 포함한 영지 전체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요가일라는 켕스투티스 사후 트라카이를 다스리던 스키르가일라를 폴로츠크로 보낸 뒤 트라카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때마침 튜튼 기사단의 지나친 횡포에 사모기티아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자신에게도 온갖 간섭과 차별이 가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와 화해하고 튜튼 기사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384년 7월, 비타우타스는 네만 강 어귀에 세워진 2개의 튜튼 기사단 성을 기습 점령하고 파괴한 뒤 요가일라와 합류했다. 이후 두 사람은 누베 마리엔베르더 성을 6주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로 돌아온 뒤 그로드노, 브레스트, 포들라시에, 볼로비스크를 수여받고 발트 신화로 복귀했다. 다만 트라카이는 스키르가일라가 종전대로 계속 맡았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의 이같은 행위에 격분해 그를 배신자라고 규탄하고 리투아니아를 향한 대대적인 보복 공세를 준비했다.

1386년, 요기일라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한 뒤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로 즉위했다. 이때 그는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대신 아래의 조건을 준수해야 했다.

세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 모두 리투아니아와 요가일라에게 무리한 조건이었지만, 요가일라는 폴란드에서 요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에 들러서 현지 귀족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명령하고 빌뉴스에 주교구를 설치했다. 여기에 이교 사원과 신들의 형상을 파괴했으며, 기독교로 순순히 개종한 귀족들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후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섭정으로서 그를 대신해 리투아니아를 이끌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신망을 점점 잃는 반면에 비타우타스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신들을 위한 독자적인 정부가 세워지기를 원했고, 비타우타스가 그 정부를 이끌 수장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 상황을 파악한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빌뉴스에 폴란드 수비대를 주둔시켜 억제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심한 반발을 샀다.

1389년 5월,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블린에서 스키르가일라와 비타우타스를 불러들인 뒤 비타우타스에게 스키르가일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비타우타스는 어쩔 수 없이 서명했지만, 내심 깊은 불만을 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한 튜튼 기사단 측 대표단의 주장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이용해 고기, 건초 및 기타 물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보내면서, 전사들이 이를 호위하는 척하다가 빌뉴스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장악해버릴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었고, 공모자들이 모조리 처형되었으며, 비타우타스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 형제가 영지를 박탈당했다.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포로로 잡혀 있던 튜튼 기사 마르콰르 폰 잘츠바흐를 튜튼 기사단국에 돌려보내면서 협상을 시작했다. 1390년 1월 19일, 비타우타스는 지난날 튜튼 기사단과 협의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따르겠다는 내용의 리크 조약에 서명했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가 또다시 배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타스,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 비타우타스의 아내 오나, 딸 조피아, 여동생 림가일레, 그리고 여러 추종자들을 인질로 받아냈다. 그 해 5월, 31명의 사모기티아 귀족 대표단이 쾨니히스베르크에 도착한 뒤 비타우타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출신의 자원병 및 용병들도 여기에 가담했는데, 1399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즉위하게 될 더비 백작 헨리, 프랑스 원수 장 르맹그레도 원정군에 가담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의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포들라시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폴란드 수비대를 남겨둔 뒤 흐로드나를 6주간 포위 공격한 끝에 1390년 4월에 함락시켰다.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의 연합군은 1390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반격에 착수해 리투아니아의 첫번째 수도였던 케르나베 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이 게오르겐부르크를 포위 공격하던 중 튜튼 기사단장 콘르트 쇨너 폰 로텐슈타인이 사망하면서,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그들은 게오르겐부르크 공략을 포기하고 빌뉴스로 방향을 돌렸다. 1390년 9월 11일, 연합군은 빌뉴스에 도착한 뒤 5주간 포위 공격했다. 튜튼 기사단은 빌뉴스 외곽 마을 대부분을 폐허로 만들었고, 빌뉴스 외성을 허물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가 이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연합군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빌뉴스 공략에 애를 먹었다. 여기에 비타우타스의 형제 타우트빌라스가 전사했고, 화약 공급이 줄어들고 날씨가 악화되었으며, 서유럽에서 온 자원자들 대부분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면서 많은 이들이 이탈하려 했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은 속히 프로이센으로 돌아가서 새 기사단장을 세우려 했다. 결국 연합군은 빌뉴스 공략을 포기하고 프로이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후 양자간의 소규모 접전이 이어졌지만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392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많은 폴란드 귀족들이 리투아니아 내전 때문에 병력을 계속 차출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는 데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황폐해지고, 리투아니아 주민들의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그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스키르가일라를 또다른 형제이며 케르나베 공작인 비긴타스로 교체하려 했지만, 비긴타스는 돌연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비긴타스는 비타우타스 또는 스키르가일라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와 화해하기로 하고, 플로츠크 주교인 마조프셰의 헨리크를 비타우타스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받든다면 리투아니아 총독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1392년 여름,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밀 협의를 맺은 뒤 튜튼 기사단에게 인질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이후 자신의 본부인 네만 강 섬에 있는 리터스베르더 성에 기사들을 초대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초대에 응한 기사 대부분은 생포되었고, 비타우타스의 군대는 흐로드나 인근의 리터스베르더, 메텐부르크 및 노이가르덴 성을 파괴했다. 1392년 8월 4일,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오스트루프 협정을 체결하면서 비밀 협의를 비로소 공식화했다.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스키르가일라는 키예프 대공으로 부임했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것에 분노해 리투아니아를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브와디스와프 2세에 의해 리투아니아 총독에 선임된 비타우타스는 1392년에서 1394년 사이에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감행한 6차례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면서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 일대의 여러 도시를 통치하던 사촌들을 축출하고,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으면서도 충성스러운 측근들로 대체했다. 이후 1394년 크레메네츠에서 몰다비아, 볼히니아, 갈리치아 공작 연합군을 격파하고 남서쪽으로 영역을 크게 늘렸으며, 자신을 피해 스몰렌스크 공작에게 망명한 사촌 스비트리가일라를 잡기 위해 비테스크를 공략하고 스비트리가일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395년, 스키르가일라는 비타우타스의 명령에 따라 스몰렌스크를 공략했다. 그러나 1397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비타우타스에게 독살당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1395년 4월, 테레크 강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한 킵차크 칸국토크타미쉬 칸이 비타우타스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도와준다면 루테니아의 지배권을 리투아니아가 완전히 가지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비타우타스는 토크타미쉬 칸을 돕기로 마음먹고, 1397년 크림 반도로 진군해 많은 타타르인들을 생포하고 리투아니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튜튼 기사단에게 타타르인들에 대항하는 대규모 원정에 참여하도록 설득했으며,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도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선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비타우타스의 의도를 불신한 튜튼 기사단은 참여를 거부했다. 이에 비타우타스는 1398년 10월 사모기티아의 발트해 연안 일대를 튜튼 기사단에 양도하며, 그들이 폴란드의 공격을 받을 경우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살리나스 조약을 체결해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399년 8월 12일, 비타우타스와 토크타미쉬 칸, 튜튼 기사단과 서유럽에서 온 기사 및 용병대는 보르스클라 전투에서 테무르 쿠틀룩 칸이 이끄는 타타르군에게 완패했다. 비타우타스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의 사촌 중 2명이 전사했다. 테무르 쿠틀룩 칸은 여세를 이어가 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가 루츠크 주변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루츠크 시로부터 몸값을 받아냈으며, 뒤이어 키예프를 포위한 끝에 3,000 루블을 받아낸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 일로 비타우타스의 위신은 손상을 입었고, 루테니아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므스티슬라프 공작이며 그의 이복 형제였던 렝베니스는 이 반란으로 인해 스몰렌스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상실했지만, 리투아니앙 충성하는 일부 장군들과 함께 루테니아인들의 봉기를 겨우 진압했다.

1400년 겨울,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만난 뒤 리투아니아 대공이라는 칭호를 수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401년 3월 11일 라돔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인해 이것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의 오랜 앙금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 후 비타우타스는 앞서 튜튼 기사단과 맺었던 살리나스 조약을 백지화하고 1401년 말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사모기티아인들을 지원했다.

1402년 1월, 리투아니아 공자 스비트리가일라가 튜튼 기사단으로 망명한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비타우타스를 타도하고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차지하려 했다. 1402년 3월, 스비트리가일라는 말보르크에서 자신을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언하고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프스코프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후 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의 지원을 받아낸 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빌뉴스를 위협했지만,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은 비타우타스의 반격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1402년 7월 기사단이 재차 원정을 벌였지만 비타우타스를 물리치지 못했다. 1403년 2월, 튜튼 기사단과 스비트리가일라는 공세를 재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교황청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공격을 금지하는 교서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로 인해 휴전이 성립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1404년 스비트리가일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브와디스와프 2세, 비타우타스간의 협상이 이어진 끝에 라치용제크(Raciążek)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브와디스와프 2세는 1년 6주 이내에 50,000 헝가리 플로린을 튜튼 기사단에게 주고 도브쥔을 구입한다.
2. 브와디스와프 2세는 1년 6주 이내에 2,400 프라하 그로센을 지불하고 즈워토리아 성을 구매한다.
3. 비타우타스는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를 소유하는 걸 확인한다.
4.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융잉겐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한다.
5. 콘라트 폰 융잉겐은 폴란드 왕국의 왕관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6. 브와디스와프 2세와 튜튼 기사단장은 카지미에시 3세와 튜튼 기사단이 서명한 1343년 칼리슈 평화 협약을 확인한다.
7. 비타우타스는 협의를 위반하면 기사단과의 전쟁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며, 폴란드 왕국은 그를 돕지 않는다.
8.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대표자들과 기사단 측 사절들 사이의 협의가 있기 전에 자신의 나라에 망명해온 사모기티아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후 전력을 재정비한 비타우타스는 1404년 스몰렌스크를 탈환했고, 뒤이어 핀스크와 노브고로드를 되찾았다. 이에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가 위협을 느껴 1406년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이에 대항했지만, 양자 모두 대규모 전투를 꺼려 소규모 접전을 몇 차례 치르다가 1408년 9월 양측의 영역을 상호 존중하기로 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1408년 사모기티아에서 또다시 튜튼 기사단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이를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1409년 봄 이를 보복하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폴란드 선박들을 나포하고 곡물을 압수했다. 비타우타스는 이에 대응해 자신의 군대를 사모기티아로 보내 반군을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즉시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했다. 이에 당시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겐은 헝가리 국왕이자 독일왕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포메라니아의 여러 공작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내며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그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도 가담해주길 바랐지만, 이들은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공격을 우려했기 때문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 역시 튜튼 기사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끌어모았고, 각지에서 용병들을 데려왔다. 특히 보헤미아에서 이름을 한창 날리고 있던 용병대장 얀 지슈카가 비타우타스에게 고용되었다. 1410년 전반기,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체르빈스크 근처에 건설된 다리를 건너 비스툴라 강을 건넜다. 1410년 7월 15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16,000 ~ 39,000명과 튜튼 기사단군 11,000 ~ 27,000명이 그룬발트 전투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겐을 비롯한 수많은 튜튼 기사들이 전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튜튼 기사단의 수도인 말보르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양자는 1411년 2월 1일 토룬 평화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폴란드 왕국은 즈워토리아와 보브로니키 등 도브쥔 일대를 즉시 되찾는다.
2. 튜튼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가 살아있는 동안 사모기티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
3. 마조프셰 공국은 조크레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돌려받는다.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점령된 토룬과 헤움노를 튜튼 기사단에게 돌려준다.
5. 양측 상인들은 고대 관습에 따라 육로와 수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6. 튜튼 기사단은 1,000만 프라하 그로센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포로들을 넘긴다.
7. 양측이 점령한 땅, 도시, 성은 이전 통치로 돌아가고, 전쟁 중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맹세를 준수할 의무에서 풀려난다.

1412년, 튜튼 기사단의 신임 기사단장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은 신성 로마 제국에 사모기티아 문제를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독일왕 지기스문트를 섬기던 헝가리 외교관 마크라이 베네덱은 지기스문트의 지시에 따라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1413년, 마크라이는 비타우타스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제시한 주장을 받아들여 플라우엔이 제시한 증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영토가 해당 지역에 확장될 경계를 클라이페다를 포함한 발트해 연안까지 확정지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 판결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리투아니아로의 습격전을 이어갔다.

1414년 여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가 튜튼 기사단국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재발했다. 튜튼 기사단은 회전을 벌이기를 거부하고 요새에 틀어박히면서 청야 전술을 사용했고, 이 바람에 프로이센 전역에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튜튼 기사단이 농성하는 여러 성들을 장기간 포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교황 특사인 로잔의 윌리엄이 외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자고 제안했고, 양자는 이를 받아들여 그해 10월 스트라스부르에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바타우타스는 때마침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 그니에즈노 대주교 미코이 트라바가 이끄는 폴란드 및 사모기티아 사절단을 보내 튜튼 기사단과의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튜튼 기사단 역시 이에 맞서 사절단을 보내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척만 했다는 구실을 들어 전쟁을 이어갔고, 리투아니아인들은 이에 맞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회는 논의 끝에 1417년 10월 24일 바르니아이 교구를 세우고 리투아니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선전을 이어가고 습격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특히 지기스문트는 1420년 1월 브로츠와프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중재안을 내놓는 등 기사단을 편드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422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튜튼 기사단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폴란드군은 니에자와, 무르지노보, 올워보를 공략했으며, 리투아니아군은 주무츠를 확보했다. 이들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튜튼 기사단은 1422년 9월 27일 멜노 협약을 체결해 사모기티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리투아니아를 기독교 국가로 인정하기로 했다.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어가는 동안,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 정책에 전념했다. 그는 1413년 11월 네베지스 강과 두비샤 강에서 7일간 사모기티아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행사를 감독했으며, 발트 신화에서 신성시하는 나무를 배고 신성한 불을 껐다. 이후 1417년 10월 24일 사모기티아 교구를 신설해, 본격적으로 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사업을 단행하게 했다. 여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귀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등 보상책도 실시했다. 다만 발트 신화를 여전히 따르는 백성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정교회 교회를 세우는 것을 금지한 것 외엔 정교회를 신봉하는 이들에게도 별다른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비타우타스는 경제 발전에도 신경썼다. 그는 대공국에서 생산된 상품의 교환을 촉진하고 상품 운송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도로와 교량 건설을 실시했으며,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부과했다. 또한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에서 온 상인에게 적용되는 모든 세금의 소멸을 확립하고 카우나스 및 빌니우스 와 같이 성장하는 무역 중심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1398년부터 유대인에게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고, 이에 수많은 유대인이 유럽 각지에서 리투아니아로 밀려 들어왔다. 또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타타르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부여해, 그들이 리투아니아에서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게 해줬으며, 당시에 가장 앞선 것으로 간주된 마그데부르크의 도시와 마을의 내부 자율성을 규정한 법을 여러 리투아니아 도시에 부여해 독일 장인들이 리투아니아로 이주하도록 장려했다. 그는 게디미나스의 기둥을 재현한 주화를 도입했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최고 직위의 합당한 소유자임을 널리 인정받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렇듯 리투아니아의 통치를 성공적으로 이어가던 1421년, 후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후스파로부터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를 제안받았다. 비타우타스는 이를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가톨릭 세계를 적으로 돌리느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동방 확장에 집중하기로 하고 후스파의 제안을 거부했다. 1424년 브와디스와프 2세의 딸 헤드비히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 사이의 결혼 협상이 진행되었을 때, 프리드리히 1세는 공개 석상에서 비타우타스의 탁월한 통치력을 칭찬했다. 이는 그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 자자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간의 관계는 점점 서먹해졌다. 1422년 멜노 평화 협약 이후 튜튼 기사단을 더는 경계할 필요가 없게 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마음 놓고 동방 진출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반면에 폴란드 측은 옛 영토였던 포메라니아와 실레시아 등지를 탈환하고 싶었는데 멜노 협약으로 그러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의 힘을 빌려 이 영역을 되찾고 싶어했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은 굳이 그럴 의사가 없었다. 여기에 폴란드-프로이센 국경 지대의 요새화되고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정착지인 루비츠의 영유권을 놓고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중재 역할을 맡은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가 아닌 튜튼 기사단을 지지했다.

1429년 1월, 루츠크 회의에 참석한 지기스문트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대관식을 치르게 해주자고 제안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내심 이를 껄끄럽게 여겼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비타우타스와 이 일로 갈등이 생기길 원하지 않아 받아들였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와 갈라선다면 자국이 위험해진다고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비타우타스는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대관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대관식은 1430년 9월 8일로 정해졌고, 교황청은 리투아니아에 왕관을 보냈다. 그러나 폴란드군이 국경 지대에서 왕관을 가지고 가던 수송선을 가로막았고,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1430년 10월 27일, 비타우타스는 80세의 나이에 트라카이 성에서 자연사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으로 선출했다. 이는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 왕국 의 승인 없이는 새로운 대공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1413년 호로드워 합의를 위반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갈등이 폭발하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간의 전쟁 및 리투아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4. 가족

5. 의의

중세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룬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서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이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1], 그리고 발트 다신교 숭배자 이렇게 3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소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의 가톨릭 세례명은 알렉산데르였다. 중세 리투아니아에서는 원래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진 국가였으며 비타우타스는 이들을 통합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야기에우워에 의한 리투아니아인의 가톨릭 개종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민중 사이에서는 발트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이중 신앙 형태로 공존했으며,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에게 상당히 관대했던 인물로도 명망이 높았는데, 립카 타타르인들은 그를 “비무슬림 국가에서 무슬림들을 보호해주는 정의로운 통치자”로 대를 이어 기념했다 한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리투아니아 전성기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 이 덕분인지 오늘날 리투아니아인 중에 비타우타스의 이름을 딴 사람이 많다.(여성형은 비타우테Vytaute)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 시에는 비타우타스의 이름에서 따온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이 있다.


[1]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인구 대다수는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 지역 주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