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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20:23:32

신 짜오/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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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자유로이 바다를 가르던 비세로3. 여파4. 구 설정
4.1. 구 단문 배경4.2. 구 장문 배경4.3. 리그의 심판

1. 장문 배경

일대일 대결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알려진 신 짜오의 인생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시작은 아이오니아의 라이콘 연안에서 조업하던 '비세로'라는 낚싯배였다. 배의 허드레꾼으로 일했던 어린 신 짜오는 더러운 갑판을 청소하는 일부터 얽힌 어망을 손보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신 짜오는 배에서 보내는 평화로운 생활이 좋았다. 그러나 배가 실수로 영해를 너무 멀리 벗어나면서 그 평화도 깨지게 되었다.

두 척의 녹서스 사략선이 배를 뒤쫓았다. 배에 오른 사략선 지휘관은 녹서스 제국을 찬양하는 말과 함께 비세로호와 그 선원들은 법적으로 자신의 소유가 됐다고 선언했다. 선원들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전부 나포되어 녹서스 영토로 끌려가고 말았다.

망망대해를 건너 힘겨운 여정을 마친 신 짜오의 앞에 낯선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강과 마법이 깃든 나무 대신에 웅장한 관문과 견고한 돌벽이 줄지어 서 있었고,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 짜오는 이곳이 광대한 녹서스 제국의 수도이자 황제 '다크윌'이 기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이 다른 비세로호 선원들과 떨어진 신 짜오는 자신을 포로로 잡았던 지휘관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 짜오의 창술 실력은 주인의 눈에 띄었다. 주인은 자신을 위해 싸운다면 '접시에 담은 식사'와 함께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녹서스 사회는 힘을 중시했고, 주인은 신 짜오를 뛰어난 전사가 될 재목으로 보았다.

잃을 것이 없었던 신 짜오는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입고 있던 넝마 대신 조잡한 갑옷을 몸에 걸치고 투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형태의 오락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뛰어난 전사들이 살벌한 이름을 내걸고 서로 결투를 벌였으며, 뛰어난 기술과 화려한 구경거리에 열광하는 관중들은 피를 보길 원했다. '비세로'라는 예명으로 검투사 생활을 시작한 신 짜오는 금세 주목을 받았다. 신 짜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투기장은 만원을 이루었고, 신 짜오의 후원자들은 떼돈을 벌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비세로'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열광했지만, 다른 검투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신 짜오의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투기장 경기가 계속 진행되는 와중에 녹서스 제국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적대국들은 변경 지역의 반란을 조장하면서 녹서스의 영토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이에 따라 다크윌 황제와 그의 조언자들이 막대한 금화를 걸고 민간 용병과 포로, 그리고 검투사를 제국의 군대로 징집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얼마 후, 신 짜오와 다른 검투사들은 제국 군대에 넘겨져 서쪽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

아무리 이름깨나 날리던 검투사라 하더라도 이곳 칼스테드의 해안 요새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데마시아의 국왕 자르반 3세의 정예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자르반 3세는 어떻게든 발로란 대륙에 작용하는 녹서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그리고 신 짜오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은 자신이 그동안 치렀던 투기장 결투와 비할 바가 못 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검투사들이 전사했지만, 신 짜오는 굴복하지 않았다. 수백 명의 데마시아군 병사들이 신 짜오의 창 앞에 쓰러졌다. 자르반 3세가 이끄는 불굴의 선봉대마저 그의 창술을 보고 감복했지만, 결국 적군에 포위당한 신 짜오는 도망치지 않고 꼿꼿이 선 채로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르반 3세는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데마시아의 국왕은 투기장의 관중들과 달리 불필요한 살인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녹서스군 패잔병들이 조용히 칼스테드를 떠난다면 자유를 보장해주겠다고 말했다. 자르반 3세의 자비로운 모습에 놀란 신 짜오는 녹서스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생각했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돈벌이 수단밖에 안 되는 삶과 자신이 열망하던 가치를 실현하는 자들을 위해서 싸우는 삶 사이에서 고민했다.

명예로운 삶을 선택한 신 짜오는 자르반 3세 앞에 무릎 꿇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수십 년간 신 짜오는 자신의 충성심을 수도 없이 증명했고, 데마시아 왕가의 집사로서 호위 무사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주인인 자르반 3세뿐만 아니라 훗날 왕위를 물려받을 어린 자르반 4세 왕자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데마시아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신 짜오가 걸어온 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지만, 왕국과 그 이념을 향한 그의 헌신에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것은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2. 자유로이 바다를 가르던 비세로[1]

파일:Xin_Zhao_What_Once_Sailed_Free.png

포로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발목의 족쇄는 나무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고, 손목은 굵은 밧줄로 묶여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는 검은색 녹서스식 튜닉을 적시다 못해 맨살이 드러난 발 옆에 고일 정도였다. 위로는 잿빛 조각구름이 드문드문 찍힌 하늘이 보였다. 푸르다고도, 아니면 흐리다고도 할 수 있는 색이었다.

들쭉날쭉하게 박힌 기다란 말뚝들이 포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근처 막사에서는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발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라 군화에 얼룩을 남겼다. 병사들은 지휘관의 사열을 받기 전에 군화를 깨끗하게 닦아내야 할 터였다. 지난 며칠간 병사들의 군기 잡힌 모습을 봐 왔기 때문에 포로는 잘 알 수 있었다. 그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주둔지 곳곳에 밝은 감청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깃발에는 활짝 펼쳐진 날개 사이를 가로지르는 칼 한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데마시아의 문장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녹서스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포로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기억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칼스테드를 탈환하라.'

하지만 그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처분을 받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인 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가 처음 포로로 잡혔을 때는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옛 기억 속에서 두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주인이었던 한 남자는 고향을 떠나온 한 소년을 투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었다. 다른 한 남자는 제국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던 낯선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하더니 그를 서쪽 아르젠트 산맥 너머의 칼스테드로 보냈다.

작별 인사나 덕담 따위는 없었다. 칼스테드로 향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더 있었다. 녹서스에서는 이들을 두고 '불운한 용병들'이라고 불렀다. 정예 부대를 대신해 별 볼 일 없는 임무를 수행할 오합지졸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녹서스군이 검투사들에 후한 값을 쳐주자 주인들은 기꺼이 그들을 넘겼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회상을 방해했다. "너는 녹서스인 같지 않군."

포로는 눈을 뜨고 울타리 밖에 서 있는 데마시아인을 보았다. 그는 감청색과 갈색이 섞인 옷 위에 사슬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단검을 차고 있었다. 포로는 그가 하급 지휘관일 것으로 짐작했다.

"이름이 뭐지?" 남자가 말했다.

포로는 생각했다. '대답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될 것인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 짜오."

"뭐라고?"

"신. 짜오."

"녹서스 이름 같지가 않은데?" 남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리고 몸서리치며 덧붙였다. "녹서스식 이름은 거칠잖아. 예를 들면... '보람 다크윌'처럼 말이야."

신 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형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그런 대화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가지, 수호하사관." 다른 데마시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호하사관은 엄숙한 얼굴의 젊은 장교를 돌아봤다. 그녀는 견갑이 금으로 장식된 은빛 갑옷을 입은 채 선명한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녹서스 놈들은 대화할 가치도 없어. 우리와 가치관이 다르거든." 여자가 말했다.

수호하사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크라운가드 검대장님.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은 왜 따로 가둬둔 겁니까?"

검대장은 경멸이 가득한 푸른 눈으로 포로를 바라봤다.

"아군을 가장 많이 죽였으니까."
신 짜오는 나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는 감각이 사라진 발로 진흙탕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무 말뚝에 몸을 의지하며 꿈틀꿈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날 봤던 수호하사관이 비슷한 복장의 병사 네 명과 함께 걸어와 울타리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수호하사관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수프가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잘 잤나? 난 올베르다. 이 친구들과 함께 너를 감시할 거야. '젠 짜우', 이게 네 아침 식사다."

신 짜오는 바닥에 접시를 내려놓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세 글자밖에 안 되는 이름을 어떻게 저렇게 엉터리로 발음할 수 있지?'

한 병사가 능숙한 솜씨로 신 짜오의 손목을 감고 있던 밧줄을 잘라냈다. 수호하사관과 다른 병사들은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서 먹어." 올베르가 말했다.

신 짜오는 접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섯 명이나 왔군."

"우린 검대장님 명령에 따를 뿐이다." 올베르가 대답했다. "그분은 국왕 폐하를 수호하는 크라운가드 가문 출신이거든."

병사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말했다. "그래. 검대장님의 부친이 폭풍 이빨 전투에서 선대 자르반의 목숨을 구했다지."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물었다. "그게 자르반 몇 세였지?"

"2세. 지금이 3세잖아."

"자르반 3세 '국왕 폐하'라고 해야지." 올베르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섬기는 왕이시다. 게다가 이곳까지 함께 오셨잖나. 경의를 표해라."

그들은 국왕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신 짜오는 수프를 먹으며 병사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그들은 이렇게 먼 서쪽 지방까지 공격을 감행한 녹서스군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지원 병력이 칼스테드에 얼마나 빨리 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의의 이름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구나'라고 신 짜오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쥐고 있던 나무 접시가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데마시아 병사들은 신 짜오 쪽을 바라봤다. 올베르가 그를 보며 말했다. "손 뻗어."

신 짜오는 손바닥을 위로 하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올베르가 새 밧줄로 신 짜오의 손목을 묶으며 말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신 짜오의 몸을 살펴봤다. 수많은 흉터가 마치 강줄기처럼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신 짜오 역시 병사들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제는 각각의 흉터가 어떤 투기장 경기에서 생긴 것이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경기를 치른 만큼 일일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생긴 흉터가 아닌 것 같은데." 병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래." 신 짜오의 강하고 또렷한 목소리는 병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그들에게 신 짜오는 더 이상 평범한 전쟁 포로가 아니었다.

"녹서스에서 무슨 일을 했지?" 올베르가 물었다.

"난 투기장의 전사였다."

"그럼 검투사로군!" 병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들어 본 적 있어. 수천 명의 관중 앞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야만인들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젠 짜우'라는 검투사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다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실력이 별로였나 본데? 그래서 죽사발이 된 채로 여기 묶여 있는 거겠지."

올베르가 끼어들었다. "잠깐만, 검투사들은 투기장에서 예명을 쓰지 않나?"

'이 데마시아인은 보기보다 똑똑하군.' 신 짜오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검투사들이 독특한 예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녹서스 제국 밖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예명을 쓰는 반면, 주목받지 않는 이름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신 짜오의 예명은 그로 하여금 빼앗겨버린 예전 삶을 잊지 않도록 해 주었다.

"비세로." 양피지를 펼쳐 보던 한 병사가 말했다. "녹서스 놈들이 이 자를 부를 때 쓴 이름입니다."

올베르는 양피지를 낚아채 천천히 살펴봤다. 그리고 다시 신 짜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바로 검투사 '비세로'였군."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잿빛 하늘 사이로 가는 빛줄기가 쏟아졌다.

"비세로..." 올베르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났다. "백전불패의 전사."

병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신 짜오를 바라봤다. 뭔가 떠올랐는지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들어본 적 있어!" 병사 한 명이 말했다.

"미노타우로스와 싸워서 이긴 적이 있다지?" 다른 병사가 덧붙였다.

올베르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병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신 짜오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어제는 이름이 '젠 짜우'라고 했지?"

신 짜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검투사가 된 뒤로는 '신 짜오'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오직 '비세로'만 남게 됐지." 그의 시선은 밧줄에 묶인 손, 족쇄가 달린 발목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병사들을 향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본명으로 불리고 싶군."

"너처럼 유명한 검투사가 왜 녹서스의 국경 전쟁에 참전했지?" 올베르가 다시 물었다.

"난 녹서스군에 팔렸다." 대답을 하면서 신 짜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투기장에서 창이나 칼에 찔린 채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처럼 따뜻한 수프와 함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최후의 순간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운명이 마지막으로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일까?'

올베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겠군."

신 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서스에 가족이 있나?"

신 짜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녹서스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라고 해도 그의 가족이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럼 이제 새 인생을 시작하면 되겠네." 올베르가 고갯짓을 하자 병사 하나가 열쇠를 꺼내 말뚝에 묶여 있던 신 짜오의 족쇄를 풀었다.

신 짜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러자 올베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고."
새 옷을 입은 신 짜오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데마시아산 원단의 부드러운 감촉이 피부에 느껴졌다. 막사 안에는 짚으로 만든 잠자리와 빈 그릇이 여럿 있었다. 그때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짜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과 같이 포로 신세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치료해준 치료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무장한 데마시아군 병사들이 들어와 포로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신 짜오는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칼스테드로 왔던 이들이었다. 칼스테드로 향하는 수송선에서 그들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승자들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우쭐대고 패자들은 치욕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개중에는 자신이 데마시아 병사들을 몇 명이나 죽일 것인지 떠벌리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짜 군대와 맞서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녹서스 정규군의 병력과 공성 무기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정식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징집되어 데마시아 왕국의 정예 부대와 맞서야 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데마시아를 연호하는 함성이 칼스테드에 울려 퍼졌다.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구나.' 신 짜오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운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녹서스가 아니라 데마시아의 뜻이었다.

신 짜오는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운명은 사방팔방으로 흐르는 법이다. 하지만 그 목적지는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지.'

나이가 지긋한 치료사가 신 짜오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다른 치료사들과 같은 색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국왕 폐하께 감사하게. 포로들도 예외 없이 치료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리셨으니까."

"3대 자르반 말입니까?" 신 짜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작 국왕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크단 말인가?'

"그래, 우리의 위대한 자르반 '3세' 국왕 폐하께서." 치료사는 신 짜오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자네에게 새 출발 할 기회를 내리셨지.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일세."

신 짜오는 두 손을 모으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비세로는 투기장에서 언제나 환영받았다. 그의 창술 실력이면 발로란 대륙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을 터였다. 하지만 바다 저편에 있는 자신의 고향이자 수십 년간 떠나와 있던 최초의 땅은 그에게 요원한 환상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서 평온을 찾으란 말인가?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 평온인가?

아니, 평온을 찾을 기회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처음으로 남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때.

신 짜오는 치료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뭔가?"

"데마시아의 국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치료사가 웃으며 말했다. "직접 가서 보지 그러나?"
신 짜오는 올베르를 따라 걸어갔다. 네 명의 병사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둔지 안을 걸으며 신 짜오는 막사 내부를 들여다봤다. 군장을 싸는 병사들과 다음 작전을 세우는 지휘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녹서스군과의 또 다른 전투가 곧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병사들도 그곳으로 향할 것인가?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 혼란의 흔적을 쫓아 행군할 것인가? 신 짜오는 궁금했다. 그의 눈에 데마시아인들은 '힘'보다 더 고귀하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신 짜오는 뚜렷한 신념을 갖고 목숨을 바치는 삶은 과연 어떨지 상상해봤다. 투기장에서 그의 목숨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국왕을 알현할 자격까지 얻었다.

"자네가 마지막인 것 같군." 올베르가 멈춰 서더니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베르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일반적인 막사보다 더 큰 막사가 있었다. 밝은 감청색 깃발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막사 입구 앞에는 번쩍이는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두 줄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그때 목덜미와 얼굴에 녹서스를 상징하는 문신을 새긴 한 남자가 작은 주머니를 들고 막사에서 나왔다. 남자는 병사 한 명의 안내를 받고 자리를 뜰 때까지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른 병사가 순식간에 그 빈자리를 채웠다.

"국왕 폐하의 막사라네." 올베르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을 받게. 그런 다음 우리가 자네를 데리고 나오겠네."

올베르는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누구든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고. 그래도 혼자 나갈 수는 없어. 이 주둔지는 크라운가드 대장님 지휘하에 있거든. 적군 전투병이 혼자 돌아다닐 수 없다는 뜻이지. 칼스테드를 완전히 뜰 때까지 말이야."

신 짜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사로 들어갔다.

"국왕 폐하께서 비세로를 환영하신다!"

낮고 엄숙한 목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신 짜오는 앞으로 걸어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깔린 천에는 날개 달린 기사들과 투구를 쓴 전사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고개를 들게." 조금 전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신 짜오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높이 솟구친 떡갈나무 의자에 신 짜오보다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까만 징이 박힌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의 머리 위로 보석이 장식된 왕관이 보였다. 그의 오른쪽에는 맹수의 이빨만큼이나 날카로운 거대한 강철 창이 세워져 있었다.

'이자가 데마시아의 국왕이군.' 국왕을 마주한 신 짜오는 곧 그가 내뿜는 위풍당당한 패기를 느꼈다. 그는 신 짜오의 예상과 달리 늠름한 풍채를 자랑했다.

국왕의 왼쪽에 크라운가드 검대장이 처음 봤을 때와 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른쪽에는 왕가의 의복을 차려입은 어린 소년이 보였다. 떡갈나무 의자 앞으로 가죽 장화를 신은 소년의 자그마한 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소년의 곧게 뻗은 콧날과 각진 턱선은 국왕의 얼굴을 쏙 빼닮은 듯했다. 이들의 양쪽 끝에는 창을 든 친위대 병사 두 명이 서 있었다.

"비세로라, 참 특이한 이름이군." 자르반 3세가 말했다. "어디서 딴 이름인가?"

신 짜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질문에 대답해라." 검대장이 말했다.

"괜찮네, 티아나[2]." 국왕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근래에 일어난 일 때문에 충격이 컸을걸세.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검대장은 말을 하려다 말고 못마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한 이름입니다." 신 짜오가 대답했다.

"그런가?" 국왕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나는 녹서스에 관해 많이 연구했지만, 비세로라는 지명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지명이라기보다 기억입니다. 비록 녹서스에서 그 의미가 바뀌긴 했지만 말이죠."

"그렇군." 국왕은 왕자를 힐끗 바라보며 덧붙였다. "어릴 적 추억이란 참—"

"비세로는 제 본명이 아닙니다."

"감히 폐하의 말씀을 끊다니!" 검대장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신 짜오는 고개를 숙였다. 순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자르반 3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티아나를 이렇게 화나게 만든 건 자네가 처음이군. 이번 전투는 티아나가 불굴의 선봉대 지휘관으로서 처음으로 치른 전투였다네. 전투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그렇지 않나?"

국왕은 왕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왕자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주의 깊게 바라봤다. "아직 본명이 밝혀지지 않은 비세로여, 자네의 이야기가 듣고 싶군."

신 짜오는 시선을 내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 본래 이름은 신 짜오입니다.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죠. 부모님은 어릴 때 이후로 뵙지 못했습니다. 아직 살아계실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죠."

신 짜오는 침을 삼키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태어난 곳은 최초의 땅에 있는 라이콘이라는 해안 마을입니다. 이곳에서는 최초의 땅을 아이오니아라고 부르더군요. 저는 '비세로'라는 낚싯배에서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제 삶은 소박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녹서스 사략선에 나포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신 짜오가 잠시 눈을 감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상대가 안 됐습니다. 결국 저는 놈들의 포로가 되어 수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녹서스에 도착했습니다. 녹서스는... 거대했고 억압적이었으며 거칠었습니다. 고향 땅을 수놓았던 아름다운 자연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낮게 동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누가 제 상황이 됐더라도 그랬겠지요. 부끄러운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 때문에 힘 있는 자들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제 힘을 알아본 그들은 저를 검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검투사 비세로가 탄생하게 된 것이죠."

신 짜오는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저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본명도 모른 채 말이죠. 죽이면 죽일수록 관중들은 더 크게 제 이름을 연호했고, 제 주인들의 주머니는 점점 두둑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관중들을 열광시키며 죽을 때까지 투기장에서 싸우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녹서스가 주인들에게 투기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금화를 제안하면서 그 생활도 끝이 났습니다."

신 짜오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게 저는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다 아실 겁니다."

자르반 3세는 말이 없었다. 모두가 국왕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국왕이 입을 열었다. "힘겨운 삶을 살았군." 그는 왕자를 힐끗 바라봤다가 다시 신 짜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얘기해 줘서 고맙네. 자네를 녹서스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준 것은 나를 비롯한 모든 데마시아인들의 기쁨이라네."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친위대 병사 한 명이 금화가 든 주머니를 신 짜오 앞에 내려놓았다.

"자르반 3세 국왕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이다." 티아나가 말했다. "그 주머니에는 일주일간 여행하기에 충분한 금화가 들어있다. 너희는 데마시아 왕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우를 범했지만, 그럼에도 국왕 폐하께서는 너희에게 두 번째 기회를 내리셨다. 잘 활용하도록."

신 짜오는 주머니를 슬쩍 바라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인가? 돈을 들고 나가서 '평온'을 찾으라는 말인가? 그는 방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것도 손짓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끝장낼 수 있는 낯선 남자 앞에서.

하지만 이 낯선 남자는 신 짜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신 짜오에게 그는 더 이상 낯선 남자가 아니었다.

'내 삶에 더 이상 평온은 없겠지만, 삶의 이유를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이제 일어나지." 티아나가 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 짜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국왕이 대답했다.

"저를 폐하의 친위대로 받아주십시오."

"어림없는 소리!" 티아나가 소리쳤다. 양쪽에 서 있던 친위대원들은 그 말에 동조라도 하듯 창 자루로 땅을 내리쳤다.

국왕은 가볍게 웃더니 티아나를 보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제안이로군."

"폐하, 설마 저자를—" 티아나가 입을 열자 국왕은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야기라도 들어보세." 자르반 3세가 웃으며 말했다. "이유가 궁금하군."

신 짜오는 고개를 들어 국왕을 마주 봤다.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폐하를 통해 자비와 명예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녹서스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싸우면서 '승리하는 자는 살아남고, 패배하는 자는 죽는다'라는 두 가지 진리만 믿고 살아왔습니다. 투기장에서 쓰러지는 전사들이나, 연이은 패배 이후에 자취를 감추는 이들을 보며 배운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데마시아인들이 싸우는 이유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겐 더 중요한 뭔가가 있었습니다."

막사가 바람에 흔들렸다. 왕자의 작은 가죽 장화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신 짜오는 목을 가다듬었다.

"뜻하지 않게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며 남은 생을 살 바에야 명예를 위해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자르반 3세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는 달변이로군. 내 참모들보다도 뛰어나겠어. 그렇지만 내 친위대가 되려면 몇 년, 어쩌면 수십 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하네. 자네의 능력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신 짜오는 국왕과 왕자, 그리고 크라운가드 검대장을 차례로 훑어봤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는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선택은 운명의 몫이기 때문에.

신 짜오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집어서 티아나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기습 공격에 당황한 티아나가 자세를 다잡는 동안, 신 짜오는 왼쪽에 서 있던 친위대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창을 집어 들고 다른 친위대원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 마치 투기장으로 돌아온 것처럼, 신 짜오의 몸은 본능에 따라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는 창을 빙그르르 돌리고는 창 자루 끝을 자르반 3세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왕자는 기겁하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고, 몸을 추스른 친위대원들은 검을 뽑아 든 티아나와 함께 신 짜오 쪽으로 달려들었다.

신 짜오는 무릎을 꿇으며 창을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티아나를 향해 목덜미를 들어 보였다. 날카로운 강철 칼날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막사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모두의 시선이 신 짜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신 짜오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그들의 처분을 기다렸다.

국왕은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다들 물러서게. 전에 아버님께서 많은 인재가 녹서스의 투기장에서 낭비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사실이었군."

"폐하!" 티아나가 소리쳤다. "저놈은 폐하를 해치려고 했습니다!"

"티아나, 아니지." 국왕이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거라네. 내가 신임하는 친위대가 옆에 있었는데도 말이야."

"용서하십시오." 신 짜오는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제 실력을 증명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증명?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이들이 자네에게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전쟁 포로 따위가 국왕 친위대의 이름을 더럽히게 둘 수 없습니다!" 티아나가 소리쳤다.

"내 앞에 온 순간부터 이 사람은 포로가 아니었네." 국왕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데마시아는 오래전 세상의 악으로부터 도망친 선한 사람들이 세운 왕국이네. 이 남자의 인생 역정은 위대한 오를론과 그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군. 아버님께서 내게 해주셨던 그 이야기 말일세."

국왕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왕자를 바라봤다. "아들아, 너는 내 인생의 행복이다. 너와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를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우리가 먼저 왕국의 가치와 미덕을 믿고 받들면, 다른 이들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아버지." 왕자는 작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왕은 신 짜오의 앞으로 다가갔다. "신 짜오, 자네가 보여준 용기는 내 마음을 움직였고, 자네의 인생 이야기는 내게 감동을 줬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군." 그러더니 몸을 숙여 신 짜오를 일으켜 세웠다. "비록 자네는 데마시아인으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나와 함께 왕국으로 돌아가 내 친위대로서 충성을 다할 기회를 주겠네."

신 짜오는 자신의 어깨를 잡는 국왕의 억센 손길을 느꼈다.

"이 기회를 가벼이 여기지 말게."

신 짜오는 자르반 3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물밀듯 밀려오는 기쁨을 느꼈다. 그 기쁨은 마치 낚싯배 '비세로'를 실어나르던 파도처럼 그의 몸을 적셨다.
칼스테드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선 밤공기가 차가웠다. 위대한 도시 데마시아의 성벽을 보기까지는 약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신 짜오는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막사에서 걸어 나왔다. 입구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직 안 자나?" 올베르가 말했다.

"산책 좀 다녀오겠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혼자서 야영지를 걸으며 신 짜오는 새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병사들을 돌보며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당번병들이었다. 잘 훈련된 그들의 모습에 신 짜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모퉁이를 돌면서 초승달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누군가 갑자기 그를 몸을 잡아당겼다.

신 짜오는 쓰러지면서 바닥에 강하게 부딪혔다.

눈을 껌뻑이며 정신을 차린 신 짜오는 자신이 어두컴컴한 막사 안으로 끌려들어 왔음을 깨달았다. 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대장과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보였다.

"폐하의 마음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네놈이 데마시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티아나가 말했다.

신 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티아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병사들도 마치 우두머리 암사자를 따르는 사자 무리처럼 똑같이 칼을 뽑았다.

"지켜보겠어." 티아나가 경고했다. "네놈이 있는 동안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신 짜오는 두 손으로 티아나의 칼을 꽉 쥐더니 말했다. "이걸 내 맹세로 여기시오."

티아나가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동안, 신 짜오는 칼끝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날 죽여도 좋소."

3.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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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첫 햇살이 위대한 도시 위를 비추자 하얀색 돌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바람 한 점 없는 동쪽 성채의 상부 정원 테라스에서는 잔잔한 새소리와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소음이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신 짜오는 돌로 된 연단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그 위에 올려 둔 창에 손을 얹은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원 계단 아래와 흉벽, 데마시아의 수도 너머로 펼쳐진 땅을 바라봤다. 제2의 고향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언제나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신 짜오의 망토는 새카맣게 탄 채 붉게 물들어 있었고 움푹 들어간 갑옷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상투에서 삐져나와 얼굴 위로 드리웠다. 젊은 시절,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지금은 진회색으로 세어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목욕을 하고 피와 땀, 탄내를 씻어낸 뒤 대장장이에게 갑옷 수리를 맡기고 새 망토를 입었을 것이다. 데마시아에서 의관을 정제하는 일은 중요했다. 왕가의 호위무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국왕이 서거했기 때문이었다.

신 짜오는 왕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고결한 인간이었다. 신 짜오는 왕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지만, 정작 가장 필요할 때엔 곁에 있지 못했다.

신 짜오는 괴로움에 한숨을 쉬었다.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전날 마법사들이 불시에 일으킨 반란에 도시 전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신 짜오는 왕궁으로 돌아오던 중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째 홀로 앉아 뼛속에 사무치는 돌바닥의 냉기와 슬픔, 수치심, 죄책감을 받아들였다. 공격에서 살아남은 왕궁의 경비병들도 홀로 어두운 계단식 정원에 앉아 슬픔에 잠겨 있는 신 짜오를 방해하지 않았다. 신 짜오는 그런 작은 배려가 고마웠다. 비난 어린 그들의 눈빛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해가 정원에 비추었다. 심판의 빛이었다. 신 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한숨을 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사랑했던 도시,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던 정원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 돌아서서 왕궁을 향해 걸어갔다.

오래전 신 짜오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신 짜오는 공허함을 느꼈다. 마치 죽은 자리를 떠도는 귀신이 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적어도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신 짜오는 갑작스럽게 생기를 잃어버린 왕궁 회랑을 걸어갔다. 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하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흩어졌다. 슬픈 표정의 경비병들이 경례했지만, 신 짜오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신 짜오는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했다. 손이 떨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하면서 그는 떡갈나무로 만든 문을 두드린 후, 차려자세로 서서 창 자루로 바닥을 짚었다. 발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신 짜오는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앞만 바라보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모퉁이를 돌아 나온 왕궁 경비병 두 명이 갑옷을 쩔그럭거리며 지나갔다. 신 짜오는 부끄러움에 그들을 못 본 체했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집사님, 크라운가드 대원수님께서는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왕궁 북쪽에 계실 겁니다." 한 경비병이 말했다.

신 짜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경비병이 말했다. "누구도 집사님 탓으로 생각하지—"

"고맙네, 병사." 신 짜오가 병사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동정 따위는 원치 않았다. 경비병들은 경례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신 짜오는 경비병들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려 왕궁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가 자리에 없다고 해서 형 집행이 취소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미뤄질 뿐이었다.

깃발과 문장이 걸려 있는 홀을 지나던 중, 신 짜오는 잠시 멈췄다. 파란색 배경에 날개 달린 데마시아의 검이 그려진 깃발이 보였다. 왕대비가 살아생전 시녀들과 함께 짠 작품이었다. 3분의 1이 불에 탄 상태였지만,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여전히 돋보였다. 소금가시 언덕 전투에서 적에게 빼앗겼지만, 자르반 국왕이 직접 신 짜오와 함께 다시 깃발을 탈환했다. 두 사람은 털가죽 갑옷을 입은 프렐요드 광전사 수백 명을 돌파했고, 결국 신 짜오가 불에 그을린 깃발을 다시 치켜들었다. 그로 인해 전세가 역전됐고, 데마시아군은 불리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왕궁으로 돌아온 자르반 국왕은 불타버린 깃발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했다. 깃발을 보고 그날의 역사를 모두가 기억하길 바랐다.

신 짜오는 왕궁 외딴 모퉁이의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왕이 저녁 시간을 즐겨 보냈던 서재였다. 시끄러운 하인들과 귀족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피신처이자, 신 짜오와 여러 밤을 보냈던 곳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벌꿀술을 홀짝이며 전술, 정치 그리고 지나간 젊은 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대중 앞의 자르반은 강하고 근엄한 지도자였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고 거나하게 취했을 때면, 그는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기도 하고 왕자를 향한 자신의 소망과 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제 친구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신 짜오는 괴로웠다.

어느새 신 짜오는 훈련장에 다다랐다. 지난 20년 동안 그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자, 가장 편안함을 느꼈던 진정한 집이었다. 이곳에서 국왕과 훈련하고 또 대련했던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국왕의 바람대로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왕자에게 검술과 창술을 가르쳤던 곳이자, 왕자가 울면 눈물을 닦아 주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주고, 또 함께 웃고 환호했던 곳이었다.

왕자를 생각하니 신 짜오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자신은 절친했던 친구를 잃었을 뿐이지만, 어린 자르반 왕자는 어제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이미 그를 낳던 중 숨을 거두었으니, 이제 왕자는 혼자였다.

슬픈 마음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무딘 검으로 나무를 때리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신 짜오는 눈을 찌푸렸다.

훈련장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뱃속에서 메스꺼운 기운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훈련장 주변의 아치와 기둥 때문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기둥을 돌아 나오자 목각 인형을 향해 훈련용 검을 휘두르는 왕자가 보였다. 왕자는 땀범벅이 된 채 숨을 헐떡이며, 비통한 표정으로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신 짜오는 그림자 아래에 멈춰 섰다. 괴로워하는 왕자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아팠다. 당장에라도 다가가서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도록 위로해 주고 싶었다. 자르반 부자는 신 짜오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왕이 죽는 동안 호위무사인 자신은 살아남았다. 신 짜오는 왕자가 자신을 반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신 짜오는 머뭇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녹서스의 검투사의 날 시합에서도 그는 망설였던 적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저은 신 짜오는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렸다.

"삼촌?"

신 짜오는 머뭇거렸던 자신을 저주했다.

물론 두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20년 전 신 짜오가 친위대로 들어온 이후 왕자는 그를 삼촌으로 불렀다. 당시 왕자는 어렸기에 누구도 그 호칭의 부적절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국왕은 오히려 기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 짜오는 왕가와 더욱 가까워졌고, 그럴수록 왕자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게 됐다.

신 짜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보다 큰 왕자를 바라봤다. 소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왕자의 붉게 충혈된 눈 주위가 거무스름했다. 신 짜오와 마찬가지로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왕자님." 신 짜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궜다.

왕자는 아무 말 없이 숨을 헐떡이며 신 짜오를 내려다봤다.

"송구스럽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신 짜오가 덧붙였다.

"제 훈련을 방해해서요, 아니면 아버님을 지키지 못해서요?"

신 짜오는 왕자를 올려다봤다. 왕자는 무거운 훈련용 검을 든 채 신 짜오를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 짜오는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마침내 신 짜오는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께도, 왕자님께도."

왕자는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서서 방 안에 있던 무기 진열대 쪽으로 걸어갔다.

"일어나세요." 왕자가 명령했다.

몸을 일으키자 왕자가 검 한 자루를 던졌다. 신 짜오는 오른손에 창을 쥔 채 반사적으로 반대쪽 손에 검을 쥐었다. 묵직하고 무딘 훈련용 검이었다. 그때 자르반 왕자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신 짜오는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왕자님, 지금은 이러기엔—" 왕자가 다시 달려드는 탓에 신 짜오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는 가슴팍으로 날아오는 검을 창 자루로 쳐내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왕자님—" 신 짜오는 입을 뗐지만, 왕자는 더 사납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위, 아래로 두 번의 공격이 날아왔다. 훈련용 검이었지만, 맞으면 뼈가 부러질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신 짜오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피하며 첫 번째 공격을 창으로 쳐내고, 두 번째 공격을 훈련용 검으로 방어했다. 충격이 팔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디에 있었죠?" 왕자는 신 짜오 주위를 돌며 물었다.

신 짜오는 무기를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네." 왕자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검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 짜오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창을 무기 진열대에 걸었다. 왕자는 검을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신 짜오를 기다렸다.

신 짜오가 훈련장 중앙에 다시 서자 왕자는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너무 성급했다. 분노로 인해 위력은 대단했지만, 기술이 부족했다. 신 짜오는 강한 공격에 직접 맞서지 않고 옆으로 쳐내며, 왕자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 상대했다.

평소 같았으면 왕자의 형편없는 자세를 지적했을 것이다. 오직 공격에만 집중하며 반격할 빈틈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 짜오는 왕자가 화풀이하도록 놔두었다. 빈틈을 파고들지도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도 상관없었다.

"어디에. 있었냐고. 물었어요." 자르반 왕자가 공격 사이사이에 말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어."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던 왕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격분한 왕은 한 획, 한 획을 빠르고 맹렬하게 써나갔다.

왕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폐하?" 신 짜오가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두려움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어." 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편지를 쓰던 손을 멈추고 덧붙였다. "우린 어리석었어. '내가' 어리석었지. 왕국을 지키려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버렸으니까."
신 짜오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방어했다. 뒤로 한 발 밀려날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하실 말씀 없어요?" 왕자가 집요하게 물었다.

"폐하를 지켜드려야 했습니다."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왕자는 으르렁거리며 돌아서더니 검을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신 짜오는 이걸로 끝이길 바랐지만, 왕자는 진열대에서 다른 무기를 집어 들었다.

'용기창'이었다.

단호한 표정의 왕자는 신 짜오를 향해 창을 들어 올렸다.

"창을 가져오세요."

"갑옷도 안 입으셨지 않습니까."

훈련용 무기는 뼈를 부수지만, 전투용 무기는 자칫 실수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상관없어요."

신 짜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왕자와 자신의 훈련용 검을 진열대에 놓고, 마지못해 창을 들고 훈련장 중앙으로 되돌아왔다.

왕자는 말없이 공격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 짜오가 말했다.
왕은 손을 멈추고 신 짜오가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왕이 갑자기 노쇠해 보였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었고, 머리카락과 턱수염은 하얗게 세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예전 젊었던 모습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내 잘못이네." 자르반 국왕이 말했다. 초점을 잃은 두 눈은 허공을 응시했다. "그자들에게 힘을 너무 많이 실어 줬어. 예감이 안 좋았지만,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의회의 지원까지 받았으니까. 이제 알겠군. 내 예감이 옳았다는 걸 말이야. 나는 이 편지로 마력척결관들에게 체포 활동을 멈추라고 명할 걸세."
왕자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창을 조작하자 전설의 무기, 용기창이 두 배 가까이 길어지며 신 짜오의 목을 향해 치명적인 창날을 뻗었다.
신 짜오는 옆으로 피한 후 창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가 창날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공격을 쳐냈다.

신 짜오는 잔혹한 검투사의 날에서조차 용기창 같은 무기를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무기를 다루는 법은 데마시아 왕가의 비밀이었지만, 초대 국왕 이후로 사용법이 전해지지 않았다. 미숙한 솜씨로 다뤘다간 적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수 세기 동안 예식용 무기이자 왕가의 상징으로만 활용되었다. 하지만 왕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던 옛 영웅들처럼 용기창을 쥐고 싸우기를 꿈꿨고, 신 짜오는 때가 되면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로 왕자에게 약속했다.

왕자가 앞으로 도약하며 창을 아래로 휘둘렀다. 신 짜오는 옆으로 피했지만, 왕자는 곧바로 따라붙으며 공격했다. 창끝이 신 짜오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왕자는 멈출 줄을 몰랐다.

왕자는 신 짜오가 가르치기 전에 왕의 허락을 받고 스스로 창의 사용법을 익혔다. 놀랍도록 가볍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용기창은 전성기의 장인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데마시아 건국 초기 유명한 무기 제작자 오를론이 만든 이 창은 하늘 높이 치솟은 백색 성벽이나 왕관처럼 왕국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위대한 서리용 맬스트롬과 그 자손들을 무찌르기 위해 제작된 이 무기는 왕의 혈통만이 쓸 수 있었다.

수년간 신 짜오는 동이 트기 전, 용기창을 다루는 훈련을 했다. 스스로 사용법을 완벽하게 습득해야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왕자가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지만, 신 짜오는 오직 방어만 생각했다. 능숙하게 뒤로 물러서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빠르게 창을 움직이며 왕자의 공격을 쳐냈다.

왕자는 어렸을 때부터 문무를 고루 습득했다. 검술과 창술, 격투술뿐만 아니라 전쟁의 역사와 웅변술까지 익혔고, 결국 열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용기창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셀 수 없이 상처를 입으며 훈련한 끝에 마침내 자유자재로 창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왕자는 신 짜오를 맹렬하게 압박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물 흐르듯이 연속 공격을 이어갔다. 앞으로 돌진하며 위로 창을 휘두른 다음, 다리와 목을 노리며 두 번에 걸쳐 호를 그렸다. 신 짜오는 좌우로 몸을 움직이며 창으로 재빠르게 방어했다.

비록 어렸을 때부터 신 짜오에게 무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왕자는 더 젊고, 힘도 강했으며, 큰 키 덕분에 공격 범위도 더 넓었다. 이제 그는 의욕만 앞선 어설픈 소년이 아니라 전투와 훈련으로 단련된 전사였다. 용기창을 다루는 솜씨도 신 짜오보다 훨씬 뛰어났다. 왕자가 인정사정없이 공격을 퍼붓는 탓에 신 짜오는 계속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신 짜오는 온 힘을 다해 공격을 방어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왕은 편지를 읽으며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진작에 용기를 냈더라면 지금의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왕은 편지에 서명한 뒤, 그 옆에 왕가의 푸른색 봉랍을 붓고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그리고 입으로 바람을 불더니, 봉랍이 굳도록 편지를 흔들었다.

봉랍이 굳은 걸 확인한 왕은 편지를 둥글게 말아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흰색 원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런 다음 신 짜오에게 건넸다.
신 짜오는 고개를 돌려 왕자의 사나운 공격을 겨우 피했다. 들쭉날쭉 돋아난 용기창의 창날이 그의 뺨에 상처를 냈다.
대결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신 짜오는 왕자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남자의 아들에게 죽는 것도 어느 정도 도리에 맞는 일이었다.

왕자는 용기창의 자루로 신 짜오의 창을 옆으로 쳐낸 후 빙글 돌면서 목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완벽한 동작이었다. 신 짜오가 왕자에게 직접 가르친 기술이었다. 준비 동작의 발놀림은 절묘했고, 창을 쳐내는 힘은 이어지는 공격이 느려지지 않을 정도로 딱 적절했다.

그래도 신 짜오는 마음만 먹으면 방어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겠지만, 자신의 속도라면 비록 지쳐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싸울 의지를 잃은 신 짜오는 막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공격이 제대로 적중하도록 턱을 살짝 들었다.

용기창의 창날이 날아들었다. 속도와 기술, 힘을 모두 갖춘 그 공격은 신 짜오를 끝장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창은 신 짜오의 목 앞에서 멈췄다. 상처가 약간 났을 뿐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대답을 안 하시죠?" 왕자가 말했다.

신 짜오는 침을 삼켰다. 상처 부위에서 따뜻한 통증이 일었다. "폐하 곁에 없었던 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왕자는 창을 신 짜오의 목에 댄 채 한참을 있다가 뒤로 물러섰다. 가슴속에 타오르던 분노가 갑자기 식어버린 듯했다. 남은 건 비통에 빠져 길을 잃은, 아버지를 여읜 아들뿐이었다.

"아버님의 명을 받고 갔나 보군요. 그분을 탓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왕자가 말했다.

신 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말이 맞나요?"

신 짜오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떨궜다.
신 짜오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눈은 왕이 내민 봉인된 편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왕이 눈썹을 치켜세우자, 그제야 신 짜오는 편지를 받았다.

"전령에게 맡기면 되겠습니까?"

"아니. 자네가 직접 전달했으면 하네, 친구."

신 짜오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띠에 편지를 걸었다.

"누구에게 보내면 되겠습니까?"

"마력척결단장." 그리고 국왕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부하들 말고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게."

신 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리 수색이 끝나고 탈옥수들의 행방이 확인되면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자 국왕이 말했다. "아니. 지금 당장 출발하게."
"가끔 고집을 부리실 때가 있죠." 왕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번 결정하신 일은 절대 무르지 않으시니까요."
"그래도 제가 곁에 있어야 했습니다." 신 짜오가 힘없이 말했다.

왕자는 눈을 비볐다.

"국왕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요? 그건 삼촌답지 않죠. 그런데 어떤 임무였나요?"
신 짜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 자리는 폐하의 곁입니다. 저는 왕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은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편지를 전하게. 더 늦기 전에 마력척결단을 통제해야 해. 지금도 이미 선을 넘었어."

"폐하, 그래도 제가 자리를 비우는 건—" 신 짜오가 입을 열자 왕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건 부탁이 아니네, 집사. 당장 이 칙령을 전달하게."
"편지 배달이라..." 왕자는 힘없이 말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삼촌을 보내신 건가요?"
신 짜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님답네요. 언제나 왕국이 먼저였죠. 제 열네 살 생일에 있었던 검 의식에도 오지 않으셨죠. 수호 의회에서 '조세 문제'를 처리하시느라 말이죠."

"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편지는 전달했나요?"

"못 했습니다." 신 짜오는 고개를 저었다.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최대한 빨리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거리에서 곤경에 빠진 거군요." 왕자가 만신창이가 된 신 짜오의 몰골을 보며 말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마법사들이었나요?"

신 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살인자와 뜻을 함께한 다른 자들도 있었습니다."

"놈들을 전부 처형해야 했어요." 왕자가 발끈하며 말했다.

신 짜오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왕자가 그런 독설을 내뱉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마법사들에 대한 데마시아의 방침에 불만이 많았지만, 그건 지나간 일이었다.

"선왕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신 짜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놈들의 손에 '시해'당하셨죠." 왕자가 쏘아붙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신 짜오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왕자의 분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왕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 왕자는 홀로 겁에 질린 소년에 불과했다.

신 짜오는 창을 내려놓고 왕자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왕자님..."

왕자는 울음을 터트렸다. 몸을 들썩이며 괴롭게 우는 모습에 신 짜오도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은 선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신 짜오는 몸을 돌려 창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감정을 추슬렀다.

신 짜오가 다시 돌아서자, 어느새 차분해진 왕자는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 흰색 리넨 튜닉을 입고 있었다. 앞에는 푸른 날개가 달린 검이 그려져 있었다.

"이제 주어진 운명에 따라 이 나라를 '이끄셔야' 합니다." 신 짜오가 말했다.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된 왕은 없습니다. 위대한 왕들은 다 그랬죠."

"삼촌이 절 도와주셔야 해요."

그 말에 신 짜오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신 짜오는 갈등했다. 20년 동안 왕을 호위하면서 한 번도 명을 어겼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여기서 폐하를 지켜드려야 합니다."

왕은 갑자기 피곤한 듯이 눈을 비볐다.

"자네의 사명은 데마시아를 섬기는 거야."

"'폐하'께서 곧 데마시아이십니다."

"어떤 왕도 국가보다 위대할 수 없어!" 왕은 소리를 질렀다. "두말하지 말게. 이건 명령이야."

신 짜오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하지만 국왕의 명을 어길 수 없었기에 본능을 무시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신 짜오는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오래전에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선왕께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기로요."
"삼촌이 그동안 몇 번이나 아버님을 구했죠?" 갑자기 왕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와 똑 닮았다고 신 짜오는 생각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세 번인데, 그 외에도 더 있었잖아요."

신 짜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게 명예는 목숨과 같습니다. 맹세를 어긴 부끄러움을 안고 살 수는 없습니다."

"누구한테 맹세한 거죠?"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입니다."

왕자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님의 친위대가 됐을 때, 데마시아에 충성을 맹세했죠?"

"물론입니다."

"삼촌의 맹세는 아버님도, 그 누구도 아닌 데마시아에 대한 거예요.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죠."

신 짜오는 왕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제 아버지랑 똑같군.'

"하지만 대원수와 약속했습니다."

"티아나에게는 제가 이야기할게요. 우선 주어진 임무를 다해 주세요."

그제야 신 짜오는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을 섬겼듯, 제 집사가 되어 주세요."

신 짜오는 눈을 껌뻑였다. 조금 전만 해도 왕자가 자신을 처형하리라고, 그것이 정당한 처분이라고 생각했다.

신 짜오는 망설였다.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신 짜오 삼촌... 왕국은 삼촌이 필요해요. '저'도 삼촌이 필요해요. 저를 위해서라도 부탁해요."

당장이라도 왕자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는 듯이 신 짜오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영광입니다... 폐하."
자르반 4세는 신 짜오와 함께 회의실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선왕의 참모들, 아니, 자르반 4세의 참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에 병사들이 가득했다. 왕궁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소집된 데마시아 최고의 정예 부대, 불굴의 선봉대가 모든 출입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자르반 4세의 표정은 근엄했고, 자세는 당당했다. 훈련장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은 오직 신 짜오밖에 보지 못했다. 이제 그는 완전히 마음을 추스른 채 왕궁의 하인과 귀족, 경비병 앞에 서 있었다.

신 짜오는 생각했다. '그렇지. 국민들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두 사람이 결의에 찬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자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자르반 4세는 대회의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삼촌, 잠깐만요." 그는 신 짜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폐하."

"아버님께서 맡기신 편지는 어떻게 됐죠?"

"여기 있습니다." 신 짜오는 허리띠에서 편지가 담긴 가죽 통을 풀어 자르반 4세에게 건넸다.

자르반 4세는 뚜껑을 열고 말려 있던 피지를 펼치더니, 눈을 바쁘게 움직이며 선왕이 남긴 글을 읽었다.

신 짜오는 자르반 4세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 순간 자르반 4세는 양손으로 편지를 구기고, 마치 목을 비틀듯이 쥐어짠 후 신 짜오에게 다시 건네면서 말했다.

"없애 버리세요."

신 짜오는 충격에 빠진 채 자르반 4세를 바라봤지만, 자르반 4세는 이미 돌아선 뒤였다. 그가 양쪽의 경비병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다. 기다란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기립해 왕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남쪽 벽의 벽난로에서 불꽃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회의실 탁자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전날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건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신 짜오가 구겨진 편지를 쥐고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자르반 4세는 탁자의 상석으로 갔다. 그리고 여전히 문간에 서 있는 신 짜오를 돌아봤다.

"집사?" 자르반 4세가 말했다.

신 짜오는 눈을 깜빡였다. 국왕의 오른쪽에서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가 차갑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왼쪽에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국왕이 쓴 편지의 수취인인 마력척결단장이자 티아나의 남편이었다. 신 짜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그 사이에서 의아한 듯이 눈썹을 치켜뜬 자르반 4세를 바라봤다.

신 짜오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며 편지를 벽난로 안에 던졌다.

그리고 집사의 자리, 국왕의 뒤에 섰다. 문득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근심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때 자르반 4세가 말했다. "시작합시다."

4. 구 설정

4.1. 구 단문 배경

신 짜오는 나라를 다스리는 라이트실드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결의에 가득 찬 전사이다. 신 짜오는 한 때 녹서스의 검투사로 싸우는 형벌에 처해져 셀수 없이 많은 시합에서 살아남았지만 데마시아 군이 신 짜오를 해방시켜 준 후, 용감한 해방군인 데마시아 군에 목숨을 다해 충성하기로 맹세했다. 손에 익은 삼조창으로 무장한 신 짜오는 이제 자신을 받아들여 준 데마시아 왕국을 위해 어떤 적이 어떠한 상황에서 달려든다 해도 담대하게 맞선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패배를 피할 수 있을 뿐이다.” - 신 짜오

4.2. 구 장문 배경

데마시아의 집사가 되는 데 필요한 교육을 모두 수료한 신 짜오는 라이트실드 왕조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재다. 자르반 3세는 종종 아름다운 대리석이 깔린 왕궁의 발코니에서 백성을 위해 연설을 하곤 하는데, 그때에도 신짜오는 매번 주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과묵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이 사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왕궁의 업무를 관장한다.

사람들은 종종 신 짜오의 정체를 궁금해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데마시아의 왕, 자르반 3세가 어디서 저렇게 헌신적인 집사를 구했는지 수군거리고들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왕족의 식사 시중을 들면서 스파이 짓을 하는 자운의 이중첩자라고 의심했다. 데마시아 콘스탄트 신문 사설란에서는 그가 빚쟁이 룬 마법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 짜오는 자신에 대해선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리그가 창설되기 이전, 녹서스에는 검투사의 날이라는 유명한 행사가 있었다. 이 시합의 규칙은 간단하면서도 아주 잔혹했는데, 검투사가 승리를 거두면 거기서 시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점점 더 많은 상대와 다대일로 싸워야만 했다. 다시 말해 도전자 중 그 누구도 시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엄청난 영광이 주어진다고들 했지만... 어쨌든 당시 검투사였던 신 짜오는 무려 300명에 달하는 병사를 한꺼번에 상대하게 되었는데 종전 기록보다 거의 6배는 더 많은 숫자였다. 이 시합이 그의 최후가 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데마시아의 선대왕 자르반 2세는 즉시 경기장에 잠입했다. 그는 이 황당한 시합에서 신 짜오를 구해내고자 했다. 그는 신 짜오에게 자유를 줄 테니 데마시아를 위해 일해 달라고 제안했다. 수락한다면 시합을 빙자하여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을 강요한 자들을 처단할 수도 있었다. 신 짜오는 자신을 위해 왕이 친히 목숨을 걸고 나섰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아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데마시아는 사전에 계획된 대로 녹서스를 침공했다. 자르반 2세가 아니었다면 서로 죽고 죽였을 신 짜오와 300명의 병사들은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

기습이 모두 끝나고 자르반 2세는 데마시아로 철수 중이었다. 그때 독화살 하나가 자르반을 향해 날아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신 짜오가 자신의 몸을 날려 화살을 막아냈다. 이제껏 그 어느 진영에도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던 그였다. 신 짜오가 보여준 충성심에 감동한 왕은 그를 자신의 곁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후 자르반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신 짜오는 충직하게 그의 곁을 지켰고, 선대왕의 아들 자르반 3세를 섬기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왕족의 명예를 기리고 자신을 받아준 국가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운다.

4.3.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신 짜오
날짜: CLE 20년 7월 13일
관찰
대전당 안으로 들어서는 신 짜오의 절제된 존재감이 주위를 꽉 채우는 것만 같다. 반들반들 광이 나는 데마시아 갑옷만큼이나 익숙한 단호하고도 엄격한 표정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다. 한눈에도 신 짜오임을 알아볼 수 있는 높이 틀어 묶은 머리칼이 등 뒤로 나부끼며, 불빛이 깜박일 때마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반짝인다. 한 손에는 칼날이 달린 커다란 공성용 망치를 마치 창처럼 들고 있다. 들고 있기 버거운 척하고는 있지만, 눈썰미는 있어도 판단력은 별로 날카롭지 않은 이들을 속이기 위한 술책일 뿐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회고의 방 문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서도, 써밋의 조각상 어깨의 징 박힌 견장 장식부터 뱀처럼 구불구불 타고 내려온 북쪽 벽면의 균열까지 대전당의 구석구석을 이미 완벽히 파악해 뒀다. 신 짜오는 허리까지 진흙탕 속에 빠져 있대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을 걸음걸이로 곧장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잠시 멈춰 문 위에 새겨진 글귀를 살펴본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손만 갖다 댔을 뿐인데 거대한 대리석 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문 틈으로 쏟아져 나와 신 짜오의 발치를 물들인다. 속박 당한 어둠의 정수로부터 흘러나온 이 어두컴컴한 물질이 빛을 빨아들여, 입구의 가장자리에 일종의 반전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이한 현상도 아랑곳없이 신 짜오는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회고
이미 전투에서 눈 앞이 깜깜해 지는 일은 여러 번 겪어 본 신 짜오는 칠흑 같은 어둠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데마시아 방패 모서리에 찍혀 생긴 이마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자, 문득 두 눈에 피가 쏟아져 들어오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 상처는 녹서스 공공기관 서류에 뼈 분쇄자라고 기록된 자가 남긴 작별 선물이었다.
웃기는 이름이지. 차라리 삑삑이라고 부를 것이지.
삑삑이는 이 사이가 벌어져서 숨을 내쉴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데, 숨이라도 몰아 쉬면 그 소리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삑삑이 정도야 신 짜오가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녀석이었지만, 당시 자만심이 너무 컸던 그는 뻔히 방패로 내리치는 걸 피해내지 못했다. 피에 굶주려 살육 제전을 관람하는 수천의 구경꾼들의 함성 속에서도 삑삑이의 우스꽝스런 함성 소리만은 귓전에 또렷했다. 경기장 특유의 시큼한 악취가 생생히 살아나고, 사지가 찢겨 널브러진 적들의 시신에서 흐르는 쓸개즙의 강한 냄새가 훅 끼쳐오는 듯했다. 신 짜오는 일순간, 깨져나간 대검으로 페인트 모션을 취하며 방패를 내리치려 하는 삑삑이의 변색된 투구 틈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두 눈을 마주봤다. 생각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눈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던 장면이 갑자기 눈 앞에서 현실로 탈바꿈하자 신 짜오는 잠시 당황했다. 겨우 몸을 웅크리자마자 길다란 방패가 머리카락을 쭉 긁고 지나갔다. 신 짜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삑삑이의 회전 베기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오른손으로는 창을 굳게 잡아 봤지만 손가락은 허무하게 손바닥을 파고들 뿐이었다. 내 창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관람석의 군중은 요란스럽게 죽이라고 연호하고 있다. 신 짜오가 흘끗 올려다보자, 잊고 있던 과거 속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삑삑이는 적이 어리둥절해 있는 틈을 이용해 덮쳐 들며, 찌그러지고 낡은 방패 뒤에 숨겼던 칼을 푹 찔렀다. 모랫바닥에 주저앉은 채 신 짜오는 피할 수도, 궁리를 짜낼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삑삑이의 칼날이 신 짜오의 미간을 베고 들어와, 칼끝이 두개골을 지그시 눌렀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신 짜오의 초점이 왼손으로 꽉 붙잡은 적의 칼날 밑동에 맞춰졌다. 손목을 타고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난데 없이 몰아친 사건들을 파악하느라 정신임 멍한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는 법이 없는 믿음직한 반사신경만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신 짜오는 벌떡 일어나며 오른손으로 일격을 날려 칼날을 뚝 부러뜨렸다. 적이 흠칫 놀라는 쇳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부러진 칼날을 꽉 잡은 왼손을 내질러 삑삑이의 투구 틈 눈을 적중시켰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곧 관중석에서 귀청이 터질듯한 환호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공포스럽게도, 삑삑이는 쓰러지는 대신 그저 바로 앉을 뿐이었다. 신 짜오가 흠칫하며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삑삑이는 눈에서 부러진 칼을 쑥 뽑더니 투구를 벗었다. 신 짜오는 자기 스승 데마시아 국왕 자르반 2세의 피에 젖은 얼굴을 알아보고는 경악하여 풀썩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신 짜오의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자르반은 싱긋 미소를 짓는 것이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신 짜오?”

목소리에서 더 이상 쇳소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신 짜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는 거요?”
“질문에 대답하시오.”
“난 데마시아와… 진정한 국왕을 대표하려 하오.”

신 짜오도 어렴풋이 지금 이 상황 모두가 잔인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의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주적인 녹서스를 무찌르기 위함인가?”
“데마시아에 봉사하기 위해서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칼에 뭉개진 눈이 신 짜오의 반응을 살펴보려 실룩거렸다.
비할 바 없이 끔찍하지.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군.”
“비할 바 없이 끔찍하다? 정말인가?”

자르반이 주위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살아오면서 이 정도와 비교할 경험은 많았을 텐데?”
“이제 충분한 것 같은데. 당신들의 시험에 통과한 거요?”

신 짜오는 이런 장난에, 그리고 마음 속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데에 지쳐 버렸다.
“그래 끝났소, 신 짜오. 하지만 진정한 시험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요.”
그리곤 눈 하나만 남은 채 싱긋 웃는 자르반의 얼굴이 경기장과 함께 검은 연기로 푹 터지며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니 이 곳은 좁아터진 대기실, 리그로 통하는 것이 틀림 없는 길다란 복도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 등 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문이 부드럽게 닫히며 그만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신 짜오는 그대로 푹 쓰러져버리고만 싶었다. 바로 등을 돌리고 이 자릴 떠나, 두 번 다시 이 곳에 눈길조차 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자르반의 말을 떠올렸다. 적어도 이 목소리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우리 모두를 짓뭉개버릴 수도 있는 무거운 부담을 대신 짊어질 용기 있는 자들이 필요하네. 자넨 진실로 데마시아 인이야, 신 짜오. 자네가 가진 힘을 믿게나. 자넨 절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일이 없을 테니.”
신 짜오는 몸을 곧게 펴고서 리그 오브 레전드로 행군해 들어갔다.
[1] 배경 일러스트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신 짜오와 데마시아의 국왕인 자르반 3세, 어렸을 적의 왕자 자르반 4세, 가렌럭스의 고모인 티아나 크라운가드가 그려져 있다.[2] 가렌럭스의 고모이다. 훗날 그녀는 데마시아의 대원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