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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03:46:55

신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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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천
본명 신세순
법명 신소천
출생 1897년 2월 1일
조선국 한양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1978년 4월 15일 (향년 82세)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노포동
(금정산 범어사, 법랍 26년)
본관 평산 신씨


1. 생애2. 저서3. 인간적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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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897년 정유년 2월 1일 서울특별시(한양)에서 태어났다.

그해는 국호를 대한이라 하고, 고종의 황제즉위식도 있었지만 나라는 크게 술렁대고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그 2년 전에 동학농민운동이 있었고 청일 전쟁이 있었으며, 그 무렵 왜인무리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등 처참한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때다. 그후 얼마 가지않아 국권을 빼앗겼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단죄한 것은 신소천은 13세 때고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은 14세, 말하자면 망국의 비운과 구국의 울분이 부글부글 끓던 그 시절에 태어나서 소년시기를 보냈다.

일찍이 기독교에 침잠하여 기도로써 겨레를 구하고 나라를 회복시킬 것을 구하다가 마침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하여 구국을 실현할 것을 결심하고 신앙을 바치고 있던 서울 정동교회의 문을 나섰다. 나라 망한 비분을 가슴에 안고 오로지 국권 회복을 위하여 헤매던 중에 유교 · 불교 등에 접근하고 마침내 금강경 강의을 만났으나 깊은 뜻을 깨우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고 1919년 3.1 운동을 만난다. 그때에 무력항일운동의 길로 나섰다. 그해 가을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일대의 독립군은 상해임시정부 산하로 정비되면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로 편성되었을 무렵, 신소천은 용약 북로군정서 사렵, 신소천은 용약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 휘하에 뛰어들어갔다. 처음에 사관훈육부와 사관학교를 차례로 졸업하고 한때 참모로 활동하다가 마침내 청산리 전투에 참가, 왜군을 대파하였다. 그 후 독립군 내부에 대립이 생기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옮겨 한국 청년의 독립운동자 양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북경에 머물면서 전국빈씨와 제휴하여 한국 청년을 중국 광동군관학교에 입학시키며 또한 국내에서 사관후보생을 모집하는 등 활약을 하였던 것이다. 국내운동을 위하여 귀국, 농춘에 은둔하면서 활약하고, 마침내 산중에 은신하며 학문연구에 정력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정치학, 군사학을 연구하다가 종내에 조국의 독립은 국민정신의 자주회복에 있음을 깨닫고 불교연구와 참선수도에 정력하는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국민의 자주적 자각을 촉구하기 위한 많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시절의 강연초와 사상을 정리한 것이 <독립의 넋> <인류업행개조운동> <진리도> <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 등이다. 금강경 강의에 심취하여 26세 이후 전국을 돌면서 포교에 열중했다. 특히 '자각이 있어야 독립과 세계 평화를 이룰 수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각사상 운동을 전개했다.1952년 범어사에서 용성 진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부산, 마산, 진주 등지에서 금강경 강의를 중심으로 한 각사상 운동을 전개했다. 불교정화 운동 당시에는 서울 대각사 주지를 지내며 대각회 등 청년단체를 육성하면서 경전의 한글화에 앞장 섰다. 또한 조계종의 교무부장을 맡아 종단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인천 보각선원을 창건했다. 1978년 4월 15일 범어사에서 노화로 나이 82세, 법랍 26년으로 입적했다. 문하에는 광덕을 비롯하여 창봉, 법종, 정영, 일천, 일파, 고봉 등이 있다. 저술로는 금강경 강의, 강술과 반야심경 강의, 원각경강의 등이 있다.

2. 저서

3. 인간적 면모

신소천 스님은 82세였다. 승려생활은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3년여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다.
노구를 견디며 앉아 있은 후유증으로, 스님은 둔부에 창이 생겼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님은 앉아 있기를 고집했다. 멈추지 않았다. 눈물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스님은 오후 두세 시쯤에 아무도 모르게 방을 빠져나가 창고 쪽으로 겨우 걸음을 옮기시곤 했다. 나는 조심조심 뒤를 밟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창고 안에는 도둑고양이가 새끼를 서너 마리 낳아 품고 있었는데, 스님은 한 시간 가량 웅크리고 앉아 새끼 고양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주아주 자비스런 모습으로, 아주아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스님은 거의 매일같이 일과처럼 반복했다. 아무도 모르게 반복되는 스님의 밀행(密行). 아마도 누가 알면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에게 해가 될까 저어해서 그러시는 모양이었다.
소천(韶天) 큰스님의 이런 모습은 도둑고양이가 새끼들을 데리고 그곳, 은신처였던 창고를 떠나갈 때까지 계속 이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사랑스런 손주들을 바라보듯, 따사로운 햇볕 고운 오후의 한때를 골라 일과처럼 창고 쪽을 오고가시던 스님의 모습이 새삼 망막을 스친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떼 놓으시며 주위를 경계하며 창고 쪽을 오고 가시던 소천 노스님. 그 즈음 나는 삼년째 노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인천 보각사에서였다. 정화교단 초대 교무부장과 서울 대각사,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주지 등을 역임하며 호법·구국운동을 전개하시다가 69세 무렵에 보각사에 주석하시면서 사무를 일신하고 참선과 교화 운동에 전념하셨다.
소천 스님의 행장은 특이하다. 15세 때 서울 종로에 있는 한남서림이란 책방의 주인으로부터 우연히 <금강경>을 전해 받은 뒤로 스님은 <금강경>에 깊이 빠져들었다. 심취했다.
23세 때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북간도로 탈출, 김좌진 장군 휘하에 머물다 다시 북경 등지를 거쳐 국내에서 활동했다. 일경의 추적을 받자 산중 암자에 피신, 이후부터 불교연구와 구국 구세원리의 선양에 전념했다.
소천 스님은 39세 때 <금강경강의>를 처음으로 간행, 여러 곳에서 설법하며 수많은 병자들을 한자리에서 고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세간에선 스님을 일러 ‘신법사(스님의 속성이 신씨다)’라 부르며 칭송했다.
8·15 광복을 파주의 조그만 토굴에서 맞은 뒤 국토 분단과 좌우익 대립으로 민족이 누란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고자 바른 정신 ‘독립의 넋’ 등 수천 매에 달하는 원고를 집필했으나 출판을 보지 못했다.
스님은 54세 때 6·25 전쟁을 맞아 부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드디어 56세 때 금정산 범어사에서 용성 선사를 은사로, 동선 선사를 계사로 하여 출가했>다. 시쳇말로 늦깎이 중의 늦깎이었다.
스님은 <금강경강의>를 재간하고, ‘금강경독송 구국원력대’를 조직하여 구국 구세 호법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72세 때 활화산 같은 원력으로 <원각경>강의> <반야심경강의> 등을 차례로 간행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금강경을 독송하자. 나라를 구하는 것은 곧 내 집을 구하는 것이며 내 몸을 구하는 것이며 내 마음을 구하는 것이 된다.… 금강경>을 독송하면 왜 나라가 구해질까? 금강경은 모든 유위법(물질), 무위법(진리)이 나온 곳이며 그로 하여 병든 나라와 정신을 깨끗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천 스님께서는 ‘금강경독송 구국원력대의 외침’이란 글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노후의, 그분의 좌선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해 얻은 참혹한 병고의 시달림, 그런 속에서도 놓지 않던 탐구에의 열정. 소천 스님은 팔십 평생을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길에서 보냈다. 만주와 북경, 서울과 심산의 토굴을 전전하며 구도와 구국 구생(救生)의 일념으로 물 흐르 듯 살아왔던 그야말로 수행>납자였다.
파란만장했던 소천 스님, 그분의 행장이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 되돌아 보임은, 꿈결처럼 아련하게 떠올라 옴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병든 노구를 이끌고 도둑고양이가 새끼들을 품고 있는 창고로 들어가 한 시간 가량 웅크리고 앉아 지켜보곤 하던 82세의 어느 날, 햇볕 고운 어느 날 스>님은 입적하셨다. 스님의 육신은 다비되어 본사인 금정산 범어사 부도전에 모셔졌다. 거기, 부도전 한쪽에 고이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