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順晟
1878년 1월 27일 ~ 1944년 2월 7일 (향년 66세)
1. 개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상선사관이다. 본관은 거창(居昌)[1], 자는 시경(時景).2. 생애
1878년 1월 27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신제원(愼濟遠, 1841 ~ 1906. 5. 15)과 어머니 함안 조씨[2]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일찍이 관립 한성일어학교를 수료하고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구마모토(熊本)상업학교[3] 고용인으로 일하면서 도쿄 간다(神田)상업학교[4] 예비 항해학교#를 졸업하였고, 이어 1901년 10월 동경고등상선학교[5][6]를 졸업하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갑종 해기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 후에 상선사관, 조선 말부터 들여온 대한제국 황실 혹은 정부 소유 함정들인 창룡호와 현익호에 부함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02년에 대한제국군이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를 도입하면서 근대적인 배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 그를 초대 함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양무호는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04년에 그는 세관순시선인 광제호로 소속을 옮겼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그는 민간으로 이동해 상선사관으로 근무하였다. 군 복무기간은 결국 1902년에서 1904년으로 짧은 편이었다. 최종계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함장이란 직위등으로 볼 때 영관급 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원들과 찍은 사진. 세관순시선 광제호 시절의 사진이며 맨 뒷줄 오른쪽 끝이 신순성 3등운전사이다. |
1919년 인천 해원양성소가 설립되고 코사이마루는 해원양성소 실습선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신순성은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코사이마루의 촉탁을 맡으면서 1920년부터는 인천 해원양성소 교무계의 촉탁도 겸직하였다.# 이후 1938년까지 인천해원양성소 실습선 광제호 실습교관으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을 1년 6개월 앞두고 1944년 2월 7일 사망했다.
3. 여담
그가 한일합방 전날 광제호에서 내린 태극기를 개인적으로 보관해 왔고, 그 태극기는 1945년 광복이 이루어지자 당시 한국에 남아있던 유일한 기선인 부산호의 취항식에서 다시 게양되었다. 신순성 본인은 광복을 1년 앞두고 1944년에 세상을 떠난 터라 이를 직접 보진 못 했고, 아들 신태범(愼兌範) 의학박사#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기증했다.조선인들은 배 타는 일을 천한 일로 여겨 기피했는데,[7] 그는 일찌감치 해양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점에선 항공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노백린과 비슷했다.
조선이나 대한제국 배경 대체역사물에선 해군 제독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1] 장성공파(章成公派) 30세 성(晟) 항렬.[2] 조기룡(趙基龍)의 딸이다.[3] 구마모토(熊本)현립구마모토상업고등학교의 전신이다.[4] 토시마가쿠인(豊島學院)고등학교의 전신이다.[5] 現 도쿄 해양대학[6] 원래는 해군장교를 양성할 계획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유학하도록 유도했지만 일본 정부가 불허했다. 조선인과 대만인 입학자를 조금이라도 받은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달리 순혈주의가 강한 일본해군병학교는 학교 문을 닫을 때까지 외국인을 받지 않았다. 본국에는 해군사관학교가 없었는데 이는 이미 한참 전에 통제영학당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7] 선상에서 쓰러지는 것이면 몰라도 바다에 빠져 죽을 경우에는 주검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이는 사망자를 매장하고 상을 치르는 유교에서 매우 기피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