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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4:30:41

양무호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d0024572_49abe14a13370.jpg
제원
함종 방호순양함, 훈련함
전장 105미터
전폭 12.5미터
흘수 4.2m, 7.3m (만재시)
인원 72명
기준 배수랑 3,432톤(추정)
만재 배수량 4,087톤
엔진 왕복 증기 기관 (1,750 마력)
속력 최대 13.5노트
순항 거리 ??.?노트로 ?,???해리[1]
무장 확실하지 않음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추정 80mm 포(12근 포) 4문(함수에 2문, 함미에 2문)
50mm 기관포 2문(함교 근처 후방에 좌우 배치)
신인균 추정 2연장 80mm 함포 2개(4문)
5mm 기관총 2정
역사스페셜 추정 80mm 함포 8문
40mm 기관포 2문
건조사 영국 R. 딕슨 조선소 (Sir Raylton Dixon & Co)
진수 시기 1881년 8월
도입 시기 1903년 4월 15일

1. 개요2. 역사
2.1. 도입 비사
2.1.1. 도입 긍정론2.1.2. 도입 비판론
2.2. 운용 비사
3. 기타4. 역대 함장5. 외부 링크6. 같이 보기

1. 개요

揚武號/KIS Yangmu[2]
한국 최초로 도입한 근대식 증기선이자 순양함이며, 대한제국 말기인 1903년에 들여왔다. 대한제국의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 광무제가 들여온 선박으로 길이는 105미터, 무게는 3,432톤으로 당시 세계적 추세로는 결코 적지 않은 크기의 선박이다.

그러나 그 크기에 비해, 무장은 함포(80mm) 4문과 기관포(50mm) 2문으로[3] 빈약한데 그 이유는 처음부터 군함으로 만들어 진 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 역사

[독일 친왕(親王) 상경(上京) 및 미쓰이(三井)에 발주한 한국군함(韓國軍艦) 양무호(揚武號) 입항 건(件)]

來電第30號
1903년 4월 15일 오후 6시 3분 發
1903년 4월 15일 오후 7시 着

발신인: 인천 가등(仁川 加藤)
수신인: 하야시 공사(林 公使)[4]

독일군함 일치스호(號)가[5] 오늘 교주만(膠州灣)에서[6] 입항, 동함(同艦)에[7] 탑승한 독일 친왕(親王)은[8] 즉시 상륙하여 5번 열차로 입경(入京)함.[9] 경성(京城)[10]으로부터의 출영(出迎)은[11] 독일영사(領事)와 한국 관리로는 조성협(趙性協), 고휘성(高羲誠)두 사람이다.

한국정부에서 미쓰이(三井)에 주문한 군함 양무(揚武)도 또 오늘 오후 5시에 입항함.
- 1903년 양무호의 인천 입항을 보고하는 주한일본공사관 내부 문서.

양무호()[12]는 원래 군함이 아닌 화물선이었다. 영국 미들스버러(Middlesbrough)에 있는 R 딕슨(Sir Raylton Dixon & Co) 조선소[13]에서 만든 3,400톤급 화물선 팰라스(Pallas)로 처음 건조되었으며 선덜렌드에 있는 클라크 조지 사(Clark George Ltd, Sunderland)사에서 쓰다가 1893년 일본 미쓰이물산이 사들였는데 그 당시 일본에선 적지 않은 크기의 화물선이었다.[14] 미쓰이상사는 이 배를 카치다테마루(勝立丸, 승립환)로 명명하고 선착운반선으로 9년 동안 운용했다.[15] 그러나 배를 움직이는 데 하루 43t의 석탄이 쓰이면서 유지비가 많이 들자 일본 정부에서는 퇴역할 필요를 느꼈고, 대한제국반강제적으로 떠넘겼다. 이때 일본은 곱게 넘겨주지 않았고 구입할 때 25만 엔이었던 중고함을 55만 엔으로 부풀려 강매했다. 대한제국은 구입 비용으로 110만 원을 지불했는데 당시 대한제국 전체 국방예산이 약 412만 원이었다.[16]

그렇게 처음으로 도입한 군함인 양무호는 본격적인 군함으로 운용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처음부터 군함으로 설계되어 건조된 배가 아닌 데다 구색 맞추기 경무장으로 조그마한 포 몇 문만 장착하여 무장이 빈약했다. 또한 운용기간이 길다 보니 고장이 잦은 낡은 배였고 하루에 40톤이 넘어가는 석탄을 소비해서 운용비용도 많이 들었다.[17] 결국 대한제국은 제대로 된 군함의 역할을 하지도 못하는 배를 거금을 들여 사온 것이었다.[18]

고종은 양무호 구입 전, 근대식 항해술을 익힐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영국에서 교관까지 데려오며 통제영학당을 설립했지만 이마저도 청일전쟁으로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본은 양무호를 매각하면서 항해술도 같이 전수해주겠다는 계약을 했지만 막상 이 배가 정식 배치된 후에도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군함의 역할을 하지 못한 배를 강매당하고, 실질적으로 선박을 운용할 인원도 제대로 양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2.1. 도입 비사

원래 고종 광무제는 일본에서 군함을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황실 비자금을 통해 독일영국에서 근대식 군함을 새로 주문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접근했을 정도로 군함 군함 도입에 노력을 기했다. 하지만 정작 독일과 영국 측에서는 한국의 도입의사를 단칼에 거절했고, 설상가상으로 한일병탄을 꾀하던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함 도입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곧장 훼방을 놓아 군함 구입 계획을 무산시켰다.[19] 결국 어느 쪽으로든 새로운 근대식 군함을 얻을 방법은 막혀버렸기 때문에 일본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독립신문 등에서도 고종이 근대식 군함을 들이려 하고 해군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두고 나라 기반은 생각하지도 않고 방위비를 과도하게 쓴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고종이 그렇게 해군력을 중시하게 된 이유는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때 서양의 근대식 증기 군함들이 쳐들어오고 이로 인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의 외세의 위협을 목도하면서 "적어도 근대적인 해군력은 있어야 나라 구실을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어떻게든 자기 재위 안에 근대식 증기 군함을 도입하고 해군의 틀을 양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애시당초 운요호 사건만 해도 고작해야 소형 초계함운요호에게 농락당한 사건이었다.
결국 해군을 포기한 해안방어의 맹점을 일본이 파고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기동전력이 필수적이었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왜 자체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사오려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고종은 16세 때 아버지 흥선대원군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장인을 불러모아 특명을 내려 근대식 외륜증기선을 제조하고 운행한 결과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책 <해국도지>와 <화륜선도설>을 통해 화륜선과 증기 기관의 설계도를 배운 상태였고 이를 통해 한선 몸체에 외륜과 증기 기관을 장착한 배를 몇 척 건조하기도 했다. 고종은 그때부터 제대로 기술을 들여온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여 아예 근대식 군함을 서양에서 도입해 오는 방식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사실 조선업의 높은 진입장벽을 생각하면 이렇다 할 기술적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자체 개발은 불가능했다.[20]

2.1.1. 도입 긍정론

다만 이 거래가 단순히 일본에 의해 덤터기를 쓴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는 반론이 있다. 해당 선박이 대한제국이 근대적인 해군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위해 들여온 배이며, 전투용이 아닌 훈련용이라고 가정하면 그리 납득 못할 선택은 아니라는 것.

화물선을 군함으로 도입한다는 점이 다소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일본의 막부 해군이 최초로 보유했던 군함 반류마루도 영국의 왕실유람선을 개조한 것이었다.[21] 즉, 내구도가 높은 배를 군함으로 개조해 쓰는 시도 자체는 당시로선 그리 이상한 게 아니다. 또한 양무호 자체가 체급이 꽤 컸기에 청일전쟁 시절 일본해군에 의해 가장순양함[22]으로 개조되었던 전적이 있다. 문제는 당시에는 파괴공학 같은 분야가 발전하지 않은 터라 일본이 배를 마개조하면서 선박 자체의 피로도를 잔뜩 쌓아 놓았고, 대한제국으로 넘겨졌을 땐 기존 주포를 탈거하여 80mm의 소구경 함포밖에 장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양무호 자체가 군함으로선 만족스런 배가 아니긴 해도, 해당 거래는 선박뿐만이 아니라 기초적인 설비, 식기, 무장까지 전부 포함되는 것은 물론, 마쓰이 측에서 데려온 인력 양성을 위한 교관단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이 이루어지고 인력이 양성되기도 전에 러일전쟁으로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글에서도 부정론의 반론이 될 수 있는 설명이 있다. 해군 양성을 위한 예산은 프랑스에서 융통해준 차관으로 해결했으며, 순양함의 경우, 역시 프랑스 측에서 러시아 쪽 조선소를 소개시켰던 배경이 컸다. 거기에 당시 외교 관계나 거리 및 조선소의 건함 스케줄, 건함 경쟁으로 인한 비용 상승 등의 복합적인 문제로, 당시 대한제국 관계자들도 유럽이나 미국 등 여러 곳을 알아보았으나 마땅한 배를 사올 만한 여건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은 곳은 러일전쟁으로 무산된 러시아 극동지역 조선소와 실제로 몇 척 사왔던 일본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훈련함으로 쓸 배를 구매할 수 있는 곳은 매우 한정적인 터라 가장순양함으로 개장한 화물선 밖에 선택지가 남지 않았다.

2.1.2. 도입 비판론

위의 링크에 서술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지 않다. 당시 근대 열강 해군에서는 낡은 배라 해도 제대로 된 군함을 훈련함으로 전용했다. 굳이 덩치만 크고 수명이 다 되어가는 화물선을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오래된 함선에는 선체 피로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최악의 경우 항행 중 배가 분해될 수도 있는데 자칫하면 대형 해난사고가 터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화폐 가치 산정에도 문제가 있다. 분명 1엔과 1원은 같은 가치를 지녔으나, 이것은 은 기준이었고 금 기준으로 봤을 때 1금엔=2은엔=2원이었다. 아무리 훈련용이었고 대금을 분할지급했다고 쳐도 1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 너무 과도한 건 아닌지에 대한 의문 또한 제기된다.

양무호 다음으로 건조 및 구입한 광제호는 35만 원이였고 7년 뒤에 건조된 중국의 중산함은 34만 엔이었다. 즉 제대로 된 군함 2척은 살 수 있는 돈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이렇게 돈 낭비만 심한 매매였으면 아예 안 사고 돈이나 아끼는 것이 나았다는 게 주된 비판이다. 비록 해군 양성은 포기해야 했어도 서양에서의 군합 도입길이 막히고 군함같지도 않은 군함을 강제로 비싼 돈 들여 살 바에는 해군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게 논지

2.2. 운용 비사


▲인천시에서 방영한 양무호와 광제호에 대한 짤막한 비화

거금만 날리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들여온 양무호는 한번도 한민족의 바다를 지키는 군함으로 쓰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 배는 대영제국의 민간회사에서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하던 팰러스(Pallas)호를 슬슬 퇴역시기가 되어서 일본에게 팔아넘기고 대한제국이 군함이 필요하다고 해서 급하게 무장을 올린 것이라 제대로 된 군함이 아니었다. 게다가 군함 도입 이전 설립한 해군사관학교도 무산되어 정작 군함을 다룰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양무호는 움직이는데 40톤의 석탄이 필요하고 고장이 잦아 유지비용이 막대하게 들어 임무는커녕 인천항에 정박만 시키는 날이 많았다. 또한 무장도 고작 80mm 함포 4개, 5mm 기관총 2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양무호와 비슷한 크기의 군함들을 살펴보면 양무호의 무장은 굉장히 빈약한 편이었다. 군기(軍器)와 포탄들은 적당히 배치하도록 했고 여기에 한술 더 떠서 포탄들도 대부분이 공격용인 고폭탄, 철갑탄이 아닌 예포용 포탄이었다. 그 와중에 함내식당은 서양식 고급 장식품들로 꾸미고 주방에는 서양식 고급 조리기구들을 배치했으며 침실은 서양식 고급 장식품들로 장식해 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예포 쏘고, 함내식당에서 고급 서양 요리 먹고, 서양 장식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에서 잠 자는 행사용 배였다.

그나마 신순성이라고 항해술을 배워온 사관이 있었고 이 사람이 양무호의 함장으로 내정되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양무호를 몰고 제대로 된 임무를 할 기회가 없었다. 이 신순성이라는 군인은 이후 일본에서 들여온 군함 광제호에 기용되었다가 나중에는 상선 항해사로 일하게 된다.

러일전쟁 발발 후 제물포 해전 당시 인천에 정박해 있었지만 별다른 개입은 하지 않았다.

결국 제 구실 한 번 못하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된 후 선원실습선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러일전쟁 때 일본이 이 배를 징발해 지원함으로만 썼는데, 잠시 신형 엔진으로 교체해 쓰다가 전쟁이 끝난 후 기술유출을 염려해 다시 원엔진인 구형엔진으로 교체해 대한제국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한일합방을 앞둔 1909년에는 일본 하라다상점(原田商店)의 계열 해운사인 하라다 기선에 4만 2천 엔에 매각되었고[24] 1913년에는 하라다 기선에서 팔마재벌(八馬財閥)의 팔마상점(八馬商店)에 매각되었다. 당시 팔마상점 선박부는 양무호를 포함해 중고상선 11척을 차례로 구입해 선대를 증강중이었다. 이후로 양무호는 화물선으로 소소히 쓰이다가 제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9월 13일에 상하이를 출항하여 항해 중 해난사고에 의해 제주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25]

3. 기타

무장이 어땠는지 정확하지 않다. 일단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80mm 단장포 4개와 5mm 기관총 2개라고 등재되어 있지만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축소모형은 80mm 함포 4개와 50mm 기관포 2개를 올린 모형이고 역사스페셜에서는 80mm 함포 8개, 40mm 기관포 2개라고 나왔으며 영어 위키백과 에서는 80mm 함포 4개, 47mm 함포 4개라고 나왔고 신인균은 80mm 쌍열포 2개, 5mm기관총 2개라고 말했다. 게다가 양무호의 사진은 무장 해제 상태로 촬영한 사진과 그 사진의 해상도와 화질을 올린것 2개가 전부여서 넷 중 뭐가 맞는지 알 수 없으며,[26] 결정적으로 실전 사례가 없기에 이 무장들이 어떤 기종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일단 확실한 것은 주포 구경이 80mm라는 것.

하지만 영어 위키백과에 등재된# 이 함포가 포신은 단장이고 구경은 8cm 이고 개발시기가 1893년인걸 보면 이 함포일 가능성이 있다.

청나라 말 복건수사의 기함도 이름이 양무(揚武)로 한자까지 똑같다. 다만 이 배는 목조 초계함이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양무호를 사기 위해 러청은행에 마련된 비자금 증서를 찾기 위해 간접적으로 나온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55만엔과 선박으로 대강 파악이 가능하다.

가끔식 양무호를 단순히 '만수성절(고종의 생일 기념일)때 예포 발사에 쓰려고 구입한 배'라는 설이 돌아다니는데 이는 당시 기자였던 시오자키 세게츠(鹽崎誓月)가 쓴 책인 <최신의한반도 부만주잡기>에서 나온 내용이다. 다만 위의 도입 비사를 보면 알겠지만 고종은 양무호를 구입하기 이전부터 해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을 가했기에 단순히 생일식에 예포를 쏘기 위해서 군함을 구입했다는 것은 뜬금없는 소리다. 따라서 저 내용은 일본인 기자가 한 날조거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역대 함장

5. 외부 링크

6. 같이 보기



[1] 최대 몇 해리까지 항해가능한지는 기록이 없다.[2] Korean Imperial Ship[3]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주장 기준[4] 당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의미함.[5] 독일 동양함대 포함 SMS 일티스를 의미한다.[6] 독일령 칭다오 식민지를 의미함.[7] 같은 함선. 전술한 일티스함을 의미함.[8] 독일 제국의 왕자를 의미한다. 친왕(親王)은 동아시아에서 황태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가령 1899년에 방한했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의 경우 대한제국에서는 '하인리히 친왕'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 지칭하는, 1903년에 방한한 독일 왕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불명이다. 하인리히 황자 이후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한 독일 황실 인사는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인데, 그는 1904년에 방한했다.[9] 수도에 들어감.[10] 당대 한국의 수도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였으나, 일본인들은 1870년대 이래로 서울을 경성(京城)으로 칭했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이 명칭은 경술국치 이후 경성부라는 공식 명칭으로 정착한다.[11] 나와서 맞이함.[12] 무력을 키우다[13] 영국의 레일튼 딕슨 경이 설립한 조선사로 Sir Raylton Dixon & Co가 풀네임이나 약칭으로 R.Dixon으로 불려서 그렇게 표기한 듯 하다.[14] 당시 일본의 화물선 평균 톤수가 600톤[15] 국내 인터넷에선 일본에서도 석탄운반선으로 정도로만 운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청일전쟁 시기에는 해군력 증강을 위해 120mm 함포와 47mm 속사포를 장착하는 등 세계대전 때 영국군의 가장순양함처럼 운용되었다.[16] 55만 엔, 당시 국방예산 약 30% 투입. 다만 3년 분할 지급인 매년 10%씩이다.[17] 다만 어디까지나 화물선치고는 많다는 것이지 군함 기준으로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니다. 군함에 들어가는 석탄은 수백 톤 단위로 나간다.[18] 사실 당시 대한제국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제대로 된 군함을 구입한다 해도 구축함이 최대였을 것이다. 일본이 시키시마급 전함 4척을 구입하는 데 5800만 엔을 썼는데 이 정도 금액은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30년치 와 맞먹는다.[19] 이 과정에서 비자금 전달책인 이동인을 암살했는데 일본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실종되었다는 말도 있다.[20] 이보다 수십 년 뒤인 울산급 호위함의 시멘트 사례만 봐도 군함 건조기술은 쉽게 축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해군과 한국 조선업체들은 참수리급 고속정, 포항급 초계함 등을 건조하면서 각종 조함 규정과 매뉴얼, 노하우들을 장기간 계속 쌓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의 기틀과 한국 조선산업의 토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외세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외부 기술 도입선도 없던 대한제국에서 조선업을 발전시키기란 어려웠다.[21] 다만 반류마루는 구매한 게 아니라 영국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22] 상선으로 위장에 활동하는 군함[23] 여기 링크 걸린 글 말고 다른 연재글에 언급이 되는 것으로 양무호를 도입하고 몇년 후 러시아에서 순양함 4척과 일본 미쓰이로 부터 보조전력으로 구축함 8척이 도입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군함들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훈련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원 양성을 막 시작할 때 러일전쟁이 발발해서 해군 양성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24] 이후 1933년 11월 하라다 기선은 大阪商船三井船舶 주식회사에 합병되었다.[25] 싱가포르로 이동 중에 침몰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제주도 근해에서 침몰했다는 일본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면 제주도 근해에서 양무호를 찾아 인양하는 것도 언젠가는 가능하다.[26] 그나마 정부기관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측의 주장인 80mm 단장포 4개, 50mm 기관포 2개가 유력하다. 정부기관의 주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