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신흥 독립국이 IOC와 올림픽에 대항하여 진행했던 경기. 실제로는 1963년과 1966년 단 2회 개최되었다. 영어로는 가네포(GANEFO: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다.1962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 인도네시아는 이스라엘과 대만 선수들에게 대회 참석을 위한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는데 당시 인도네시아는 중국 등 공산 진영과 매우 친밀했기 때문이다.[1] 이에 정치와 스포츠의 분리를 주장하던 IOC는 인도네시아를 IOC에서 제명한 뒤 무기한 올림픽 참가 금지라는 강력한 처벌을 내렸다. 강퇴당한 인도네시아는 중국, 이집트를 포함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신흥 국가 12개국과 공동으로 신흥국 경기 연맹을 만들어 이듬해인 1963년에 제1회 신흥국 경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신흥국 경기 연맹의 헌장에서는 정치와 스포츠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명시하였는데 이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정치와 스포츠 분리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에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신흥국 경기 대회(가네포)를 불인정하고 가네포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2. 제1회 대회 (1963년 자카르타)
1963년 11월 10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1회 신흥국 경기 대회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아메리카의 51개국 2,700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는데 참가국은 기니, 나이지리아, 네덜란드, 도미니카 공화국, 동독, 라오스, 루마니아, 레바논, 말리, 멕시코, 모로코, 몽골, 버마, 벨기에, 볼리비아, 북한, 불가리아,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세네갈, 소련, 소말리아, 실론, 아르헨티나,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알제리,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캄보디아, 쿠바,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필리핀, 헝가리, 북베트남, 이집트(아랍 연합 공화국)[2], 우루과이, 태국이었다. 대한민국 등에서는 완전히 듣보잡이었지만 외양은 상당히 성대했다. 중국이 국제올림픽위원회를 나간 후 성대하게 데뷔할 수 있었다.북한은 이집트와의 축구 결승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1:1로 무승부를 차지했으나 추첨을 통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소련은 선수를 보내기는 했으나 IOC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올림픽 급 기량의 선수를 파견하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이런 막가는 짓에 IOC는 강력하게 대응해서 일본 등 몇몇 국가의 NOC는 신흥국 경기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제재를 가하겠다는 발표를 했다.[3] 그래서 이런 나라에서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출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1964 도쿄 올림픽은 지나갔다. 북한은 도쿄 올림픽 메달 획득이 유력했던 신금단 선수가 이 대회의 참가를 이유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징계를 받아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자 도쿄 올림픽 불참을 결정했다. 당초 참가하려고 선수들이 일본까지 온 상태였는데 그냥 돌아간 셈.
이 대회에서 세계신기록 4개가 수립되었지만 국제공인이 되지 않아 비공인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 북한의 여자 육상선수인 신금단은 육상 200m, 400m, 800m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3관왕이 되었다. 특히 400m와 800m에서 51초 4와 1분 59초 1로 각각 세계신기록을 수립하였으나 국제육상경기연맹에서 신흥국 경기 대회 참가선수에게 자격정지 경고를 한 바가 있어 이 두 기록을 승인하지 않아 비공인 기록이 되고 말았다.
- 북한의 남자 역도 선수인 리형욱은 역도 반탐급 용상 부문에서 141kg을 들어 세계 기록을 수립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남자 역도 선수인 리치위안은 역도 반탐급 인상 부문에서 108kg을 들어 세계 기록을 수립하였으나 국제역도경기연맹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아 비공인 기록이 되고 말았다.
3. 제2회 대회/제1회 아시아 대회 (1966년 프놈펜)
제2회 신흥국 경기대회는 1967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다스리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정치적. 경제적 고려(같은 해의 제3차 중동전쟁)에 따라 중지되었다. 제2회 대회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니를 제외하고 참가하지 않아서 아시아 국가들만 참가하게 되었으며 기니도 평양에서 치러진 1차 예선에서 광탈했다. 1965년 8월 1일에서 11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1차 예선이, 1966년 11월 25일에서 12월 6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2차 본선이 치러졌다.[4] 이 때 1966 방콕 아시안 게임과 경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중국이 금메달 108개로 종합 1위를 거두면서 시종일관 압도하는 대회였다.
- 일본은 1회 가네포 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참가가 어려운 2진급 선수들의 개인적 참가를 방임하였다.
- 재일동포 출신 북한 권투 선수겸 코치 김귀하(당시 27세)가 일본 대사관에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하였다. 일본은 망명 요청을 거부하여 김귀하 코치는 북한으로 강제송환되었다. 대한민국은 김귀하 코치가 망명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하였으나 캄보디아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 일본,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대한민국은 캄보디아와 단교하였다.
- 북한의 신금단은 1회 대회와 마찬가지로 육상 200m, 400m, 800m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3관왕이 되었으나 기록은 저조하였다.
- 북한은 축구에서 5전 전승으로 우승을 하였다.
아시아 17개국에서 2,0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아프리카의 기니는 아시아국이 아닌 유일한 참가국이었으나 1965년 평양 예선에서 탈락하여 정작 1966년 프놈펜 본선 대회에 참가를 하지 못하였다. 참가국은 네팔, 라오스, 레바논, 몽골, 북베트남, 북예멘, 시리아, 싱가포르, 실론, 이라크, 인도네시아, 일본, 북한, 중국, 캄보디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으로 모두 아시아 국가들로서 총 17개국 약 2,0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제1회 가네포 대회에 비해 참가국이 크게 줄었다.
4. 제3회 대회/제2회 아시아 대회 (1970년 평양, 취소)
나중에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2차 본선을 제1회 아시아 신흥국 경기대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제2회 아시아 신흥국 경기 대회는 1970년 북한의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5] 캄보디아 대회 직후 신흥국 경기연맹이 해체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1965년의 쿠데타로 수카르노가 물러나고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은 것도 한몫 했을 듯하다. 결국 8년만에 인도네시아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으로 복귀했다.5. 관련 문서
[1] 인도네시아의 지도자 수카르노는 ‘교도민주주의’를 내세우며 50년대부터 제3세계의 단결을 촉구했다.[2] 1958년에는 시리아를 포함했으나 1961년에는 시리아는 탈퇴하고 이집트만 같은 이름으로 남은 상태였는데 이대로 1971년까지 이어졌다.[3] 단, 일본, 이탈리아는 2, 3진급 선수들의 개인적 참가는 묵인하였다.[4] 지금도 프놈펜에는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데 실제로는 가네포 경기를 개최했던 경기장이었다.[5] 1967년 9월경 2회 대회의 개최지가 발표되었고 원래는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중국은 개최를 포기하였고 북한이 개최권을 넘겨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