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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24 01:49:08

심리록

파일:심리록.png

1. 개요2. 편찬 역사3. 내용4. 이본5. 의의6. 관련 영상

1. 개요

審理錄.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리청정을 시작한 때부터 사죄(死罪) 사건에 관하여 손수 내린 판결들을 모은 책. 총 32권 16책. 규장각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역사

정조 즉위 직후인 1777년 6월에 우리나라 형구(刑具) 제도를 바로잡아 규격대로 시행하게 할 목적으로 흠휼전칙(欽恤典則)의 제정에 착수하여 완성한 후 다음해인 정조 2년, 1778년 정월부터 시행했고, 정조 5년, 1781년에는 역대 형사 제도의 집대성인 10권 10책의 추관지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에 또 경국대전, 속대전과 속대전 이후의 단행 법령을 통합하는 법전 편찬에 착수하여 정조 9년, 1785년 9월에 경국대전에 이은 우리나라 두 번째의 통일 법전인 대전통편을 완성하여 10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정조 9년 9월에는 영조(英祖)대에 시작된 전율통보에 대해 따로 관청을 만들어 이를 수정, 증보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정조 11년, 1787년에 최종 완성했다. 14년, 1790년에는 영조 대에 만들어진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에 대하여 다시 고증하여 바로잡고 한글로 토를 달고 필요한 주석을 달게 하는 작업을 하여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冤錄諺解) 또는 증수무원록대전(增修無冤錄大全)이라고 불리는 검험법서(檢驗法書)를 1792년 11월에 간행하였다.

정조 22년, 1798년 5월부터 좌승지 홍인호(洪仁浩)와 그의 동생 홍의호(洪義浩)가 정조의 결재를 받고 정조가 손수 판결했던 각종 죄인의 심리와 처리에 대한 기록을 엮었다. 1799년에 내용을 교정하여 순조 1년, 1801년에 심리록이란 명칭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심리록은 여러 법학자들에 의해 대전통편, 추관지와 함께 조선 시대 관찬 법제사 3대 업적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3. 내용

정조가 재위 기간 중 직접 처리한 사죄에 대한 판부 등이 거의 2천 건으로 추측되는데, 심리록에는 그 중 1,112건의 사건이 연도별, 군현별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다.(규장각본 규1770 기준) 사건 하나하나마다 죄인이 거주하는 군현명과 성명, 사건 개요, 관찰사와 형조의 조사 보고, 국왕의 판결 순으로 적었다. 사건 개요에는 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피해자, 사망일자, 사건이 관에 접수된 시기 등을 기록하였고, 국왕의 판결에는 정조가 심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재조사를 명령하거나 심리를 완료하여 형량을 선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규장각본 규1770에는 강원도 37건, 경기도 117건, 경상도 165건, 전라도 185건, 충청도 131건, 평안도 143건, 함경도 41건, 황해도 132건, 서울 161건의 사건 판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 대비 범죄 건수는 서울 5.56, 경기 1.18, 경상 0.67, 전라 0.98, 충청 0.98, 강원 0.72, 황해 1.50, 평안 0.71, 함경 0.38로 인구수 대비 범죄 건수가 많은 지역은 서울, 황해도, 경기도 순이고, 범죄 건수가 인구 대비 적은 지역은 함경도, 경상도 순이었다.[1]

4. 이본

5. 의의

정조의 사죄판부집(死罪判付集)인 심리록은 사죄의 심리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하여 형사 재판 제도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정조의 형정 일반에 관한 깊은 전문가적 지식과 투철한 흠휼 사상의 소산이며, 우리 역사상 어느 왕조 어느 왕대에서도 편찬되지 못했던 성질의 판례집이다.

심리(審理)라 함은 사죄(死罪) 사건, 특히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 죽은 자나 살아 있는 범인이 억울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명확히 진실을 밝히는 절차를 뜻하는 고유 용어이며 이른바 사죄 삼복(死罪三覆)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과학적인 사죄 삼복법과 검험법은 우리나라에선 조선 태종대와 세종대에 처음 신명(申明)되었고 특히 세종 말년에 신주무원록이 등장하며 실효를 거두게 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한 감이 있었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사죄 삼복법에 따른 검험과 심리가 궤도에 올라 예외 없이 철저히 행해진 것은 정조 대에 비롯된다. 정조는 특히 흠휼(欽恤) 사상이 투철하여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각 도에서 올라온 사죄(死罪) 옥안을 일일이 검토하였으며, 옥안을 검토할 때면 시신(侍臣)들이 날이 저물도록 번갈아 가며 판부(判付)나 전교(傳敎) 등을 받아 썼지만 정조는 권태의 빛이 없을 정도였다. 정조 재위 기간 중의 판부나 전교, 유지(有旨) 등은 심리 제도의 확립과 판결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어제(御製) 바로 그 자체이다.

정조가 우리나라의 심리와 옥안수계(獄案修啓) 제도를 정비하고 발전시킨 과정을 대강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2]

위와 같은 정조의 심리 정식은 이후 어김없이 준수되었다.

6. 관련 영상


흠흠신서, 신주무원록과 신주무원록의 증보판인 증수무원록의 내용도 나온다.


[1] 심재우.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審理錄』을 통해 본 18세기 후반 서울의 범죄 양상.[2] 박병호(朴秉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심리록해제(審理錄解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