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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9:01:21

아돌프 말란

아돌프 말란
Adolph Malan
파일:Adolph Gysbert Malan.jpg
이름 아돌프 기스버트 말란
Adolph Gysbert Malan
출생 1910년 10월 3일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주 웰링턴
사망 1963년 9월 17일 (향년 52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주 킴벌리
국적
[[남아프리카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선원, 파일럿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어린 시절3. 공군으로 보직 변경4. 해협 전투에서5. 말란의 공중전 십계명6. 지휘관이 되다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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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라. 네 전술이나 기동이 최적이 아닐지라도 재빨리 대응하는 것이 낫다."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태어난 그는 선원 출신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2차 대전전투기 에이스이다. 선원 말란(Sailor Malan)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 어린 시절

1910년 10월 3일에 남아프리카 연방의 소도시 웰링턴에서 프랑스 위그노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돌프가 14살이 된 1924년 2월, 항해사 후보생에 자원한 그는 훈련선으로 쓰이고 있던 장갑순양함 보사(HMS General Botha)에 승선하게 되고, 이렇게 해양 실무를 익히다가 4년 후인 1928년에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상선의 항해사로 임명되었다. 상선단에서 바다를 가르며 몇 년간 선원 생활을 하던 그는 1932년에는 영국 해군에 자원하여 정규 교육을 다시 받고는 1935년 7월 18일에 해군 소위로 발령을 받게 된다.

3. 공군으로 보직 변경

1935년이 되자, 나치 독일의 정권을 한몸에 쥐게 된 히틀러베르사이유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며 점차 그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해에 해군 소위 말란은 자신의 군종을 바꿔 전투기 조종사가 되길 원해서 RAF에 지원한다. 공군에서 말란의 별명이 선원(sailor)이 된 것은 이처럼 그의 선원 경험과 해군 장교 보직 때문이었다. 1936년 1월부터 브리스톨 비행학교에서 타이거 모스 훈련기로 조종 교육을 받게 된 말란은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비행에 대해서 높은 적성을 보이고 있었고 겨우 두 달 만에 정식 파일럿 면허를 받게 된다. 이듬해 12월 20일에 그는 첫 자대인 제74스쿼드론(No. 74 Squadron RAF)으로 옮겨졌고[1], 비행대장이 그의 조종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1937년 1월부터는 당대 최고의 전투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몰게 된다. 1939년 3월 2일에 아돌프 말란은 중위 계급장을 달게 되며 편대를 지휘할 권한을 얻게 되는 엄청난 기량 상승을 보였다.

4. 해협 전투에서

74스쿼드론은 독일이 영국과 전쟁을 선포한지 고작 15시간 만에 실전에 돌입하게 된다. 1939년 9월 6일, 말란이 이끌던 A 편대는 한 무리의 적기를 발견하고는 돌진했으나, 불행히도 그 적기들은 독일기가 아닌 제56스쿼드론의 호커 허리케인들이었다. 어이없는 기습을 받은 허리케인 편대는 뿔뿔히 흩어졌으나 순식간에 2대가 격추 당하고 그중에서 조종사 1명은 탈출하지도 못한 채 즉사하고 말았다.[2] 곧 착각임을 깨달은 말란은 즉시 전투 중지를 명령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군사법정에 서게 되었다. 말란은 그 사고의 생존자인 존 프리본[3]과 법정 공방에 들어갔고, 프리본은 말란을 가리켜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렇지만, 공군 상층부는 당시 전황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전투기 부대 사령관인 휴 다우딩이 중재에 나서 말란과 휘하 비행대원들은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심기일전한 그는 1940년 5월 도버 해협의 전투와 프랑스 북부 공중전에서 3대의 독일기를 격추시켰고, 3대에는 심각한 손상을 입히며 2대를 공동 격추한다. 특히 그는 영국군이 됭케르크 해변에서 탈출하던 때에도 He 111 폭격기를 2대나 떨구며 영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밖에도 핑거 포 전술을 열정적으로 퍼뜨리며 낡은 전술에 손질을 가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말란은 이런 공적으로 1940년 6월에는 우수비행십자장을 수여받는다.

이 시기에 그는 루프트바페 최고의 에이스인 베르너 묄더스와 7월 28일에 북프랑스 상공에서 마주쳐 장엄한 하늘의 결투를 벌였고, 조종석을 노린 말란이 승리를 거두면서 왼쪽 다리에 피격당한 묄더스는 불시착해 한달 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5. 말란의 공중전 십계명

1. 네 눈으로 적기 조종사의 눈의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라. 그것이 보일 때만 1~2초 정도의 짧은 점사를 가하라.
2. 사격할 때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전신에 단단히 힘을 줘야 한다. 두 손으로 스틱을 잡고, 조준기에 집중하라.
3. 항상 날카로운 감시를 유지하라. 언제라도 손가락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라.
4. 높은 고도는 너에게 주도권을 줄 것이다.
5. 항상 적이 공격해오는 쪽으로 선회하여 적과 마주쳐야 한다.
6.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라. 네 전술이나 기동이 최적이 아닐지라도 재빨리 대응하는 것이 낫다.
7. 전투 공역에서 30초 이상 직선 비행하지 말아라.
8. 급강하할 때는 항상 편대 일부를 원래 고도에 남겨놓을 것.
9. 충분한 훈련을 받은 팀웍과 주도권, 고도만이 공중전에서 유리한 결과를 낳는다.
10. 재빨리 접근하여 강하게 때리고 빠져라!

6. 지휘관이 되다

말란은 영국의 전쟁 기간 동안 꾸준히 격추 스코어를 올려 나갔다. 그해 8월 8일, 드디어 말란은 자신의 74 비행대대의의 대대장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940년 12월까지 통산 12대의 격추 기록을 달성해낸다. 영국의 항공전이 끝난 후, 말란은 더글러스 베이더 같은 쟁쟁한 에이스들과 함께, 북부 유럽의 독일기 소탕 작전에 필요한 파일럿으로 뽑혀, 활약을 하게된다.

영불 해협 상공에서 벌어진 독일기 소탕 작전 동안 말란은 10대의 Bf 109를 격추시켰고, 9대의 적기에 손상을 주었으며 2대를 공동 격추시켰다. 1941년 7월까지 약 15개월 동안 끊임없이 힘겨운 지휘관 임무와 처절한 공중전의 피로에 지친 그는 지휘부에 대하여 자신을 비행대장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말란은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전투기 파일럿 양성 교육에 참가해 공중전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 공군 훈련소의 책임자로 근무하게 된다. 그는 1946년에 공군에서 은퇴하고, 자신의 고향인 남아프리카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말란이 세운 공식 격추 기록은 단독 격추 27대, 공동 격추 7대를 이루어낸 상태였다.

그의 공식 격추 기록에 더해서 비공식 격추 기록이 좀 더 있는데, 거기에는 1기의 미확인된 공동 격추와, 3기의 단독 격추, 16기의 독일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것들이 포함된다. 만약 이런 비공식 격추까지 인정된다면, 그의 통산 격추는 단독 격추 30기, 공동 격추 8기가 된다.

7. 사망

말란은 1959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비행대대였던 비긴 힐의 74 비행대대을 방문했고[4], 그 후로 파킨슨병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1963년 9월 17일에 숨을 거두었다. 전쟁 영웅 아돌프 말란의 생은 길지 않았지만, 노년에는 넬슨 만델라를 지원하며 인종 차별을 막기 위한 운동에 힘을 보태었다.

세월이 더 흐른 1969년에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한 전쟁 영화 공군 대전략에서, 영화배우 로버트 쇼가 연기한 깐깐한 비행대장 스키퍼는 다름아닌 아돌프 말란을 모델로 만들어낸 캐릭터이다.[5]


[1] 11그룹 소속으로 위터링 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2] Montague Hulton-Harrop 공군 소위로 2차 대전 도중 전사(?)한 첫 번째 영국 공군 조종사이다. 그리고 이것이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의 공식적인 첫 격추기록이자 영국군 허리케인의 첫 번째 손실로 기록된다. 그리고 직후 스핏파이어도 아군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면서 스핏파이어의 첫 전투손실을 기록하게 된다.[3] John Connell Freeborn(1919~2010) : 그는 이 사고를 딛고 11대를 격추시켜 에이스가 되었다.[4] 이 비행대대는 1971년에 해체되었다 몇 차례 재편되었으나 2000년에 해체된 이후 다시 재편되지 않고 있다.[5] 여담으로 스키퍼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주역이었던 11그룹 지휘관 키스 파크의 별명이기도 했다. 이쪽도 잠깐이지만 선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는데 그 덕분에 붙었던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