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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47:19

아시아여성기금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
Asian Women's Fund
약칭 아시아여성기금
창립일 1995년 12월 8일[1]
종류 재단 법인
사업 목적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보상
민간모금(속죄금 1인당 200만원)
日정부예산(의료복지 1인당 300만엔)
총리의 사죄 서한
이사 시모무라 마쓰코
공식 사이트https://www.awf.or.jp/k2/foundation-03.html

1. 개요2. 설립3. 보상 과정4. 보상 결과 요약5.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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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라야마 도미이치[2] 내각 당시의 일본이 세운 재단.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돈이나 현직 총리의 편지를 주거나, 복지시설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의 이름으로 돈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보상 기금을 직접 출연하지는 못했고, 위의 재단을 설립해서 정부자금[3]을 재단에 기부하는 식으로 위안부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2. 설립

1994년, 사회당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를 수반으로 한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당 3당의 연립정권이 탄생하였고, 그 해 8월 31일, 무라야마 총리는 전후 50년을 향한 담화[4]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국민과 나누기 위해 '폭넓은 국민 참여의 길'을 탐구하겠다"라고 밝혔다.

이 담화에 따라 연립여당 3당은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다케베 쓰토무(武部勤)를 위원장으로 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소위원회'가 출범하여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기타 관련 양국간 조약[5] 등에 따라 새로이 국가가 개인에게 보상을 할 수는 없었고, 이에 대해 개인보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당 내에서 강력하게 제기된다. 이 보고에 따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와 국민이 협력하여 '기금'을 설립,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전국민적인 보상의 마음을 나타내는 사업과, 여성을 둘러싼 오늘날의 문제해결을 위한 사업을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1995년 6월 14일, 이가라시 코조(五十嵐広三) 관방장관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우호기금'의 사업내용과 일본 정부의 방침을 설명하고, 더불어 '기금' 설립을 호소하는 '발기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 여성기금의 설립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에 즈음한 내각총리대신의 인사말'을 발표하고, 7월 19일에 하라 분베이(原 文兵衛) 전 참의원 의장이 기금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약칭 아시아 여성기금)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3. 보상 과정

3.1. 한국

레스토랑에서 저희들이 먼저 가서 다다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오셨습니다. 대단히 곱게 차려 입으시구요. 웃음기 없이, 약간 경직된 얼굴을 하고서는, 눈을 내려 깔고, 이 쪽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얼굴을 안 보면서 일이 진행되었는데, 절차에 대한 설명 등 이것저것 하고 나서 돈을 전달하기 전에 총리의 사죄의 서한을 먼저 읽었습니다. 총리의 서한을 읽기 시작하니, 그 때부터 울기 시작하시는데, 이사장의 편지 차례가 되니까, 이사장의 편지 쪽이 길었는데, 조금 더 감정이랄까 마음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러자, 그 한국인 위안부였던 여성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말 '악'하고 소리치는 듯한, 몸의 저 깊은 곳에서 짜내는 목소리로 우셨습니다. 통곡이라고 하나요.

그래서 도중에 저도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어요. 이쪽도 충격이 커서요. 다다미 방에서 좌식탁자를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도중에 제가 건너편으로 가서, 그녀를 안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하고 함께 울었습니다. 저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꼭 안고서 다만 '미안합니다'라고 울면서 계속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엉엉 우시면서, "당신은 아무 죄도 없어요."라고 말하시더군요. "먼 데까지 일부러 와주셔서 고마워요."라는 취지의 말을 하시고는, 그래도 계속 흥분상태로 울고 있어서 한동안 서로 껴안은 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은 저한테 죄가 없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그래도 저는 일본인으로서 역시 죄가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신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조금씩 진정이 되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남은 문장을 읽었는데, 그랬더니 굳어진 얼굴이 부드러운 얼굴로 바뀌어 있는 거에요. 뭔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바뀌었죠. 그리고 제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며 그 때부터 조금씩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10월29일, 시모무라 미쓰코(下村満子) 아시아여성기금 이사

그러나 위의 보상 절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해당 단체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부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단체를 아는 사람들도 노력 자체는 인정하지만, 주체가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 차원의 지원이라는 인식이 있어 일본 정부에 대해선 여론이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았다.

피해자 사이에서의 의견은 갈리는데, 이 기금을 받기로 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33명과 이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사이에서 갈등이 불거졌다. 수령을 거부했던 정의연은 배상금도 아닌 위로금을 왜 받냐고 반발했다. 위안부 심미자 할머니 고발, 더러운 돈이다 기금 받은 할머니 정부지원서 제외

십수년이 지난 뒤 정대협의 후속 단체인 정의연에 대한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인해 해당 기금에 대한 존재 및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재조명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용수 할머니는 2015년의 10억엔 합의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에 핀트가 어긋난 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후 위안부 할머니 중 정의연 측과 갈등을 빚는 쪽도 존재했으나 당시에도 제대로된 사죄없이 돈으로 매수하려 든다고 비판적인 당사자들도 많았고 논란이 촉발된 계기인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역시 2015년 합의에 대한 불만이기 때문에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3.2. 대만

총리대신의 사죄의 서한 등을 전달했을 때, R씨는 남편분과 함께 왔습니다. R씨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남편분은 그 때의 기분을 즉흥적으로 노래로 불렀습니다. 어떤 내용의 가사인지 물어 보자, "일본 여러분들이 제 아내에게 해 주신 친절을 잊지 않을게요. 앞으로 제가 기도할 때는 반드시 일본 여러분들의 행복도 빌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노래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S씨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한번 더 총리의 사죄의 서한을 꺼내어 천천히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같은 피해자이면서 오랜 친구에게 "이제 됐지? '용서해 달라'고 여기에 적혀 있어."라고 미소 지었습니다.

L씨는, 아시아여성기금의 하라 분베이(原文兵衛) 이사장(당시)과 만나 수줍어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실은 천황폐하의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은 분 (주: 고 하라 분베에 이사장∙전 참의원의장을 가리킴)을 만나서 사과를 받았으니까. 이걸로 됐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 - 아시아여성기금

이처럼 화해가 이루어지나 싶었으나 2018년 대만에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되자 일본 우익 인사가 찾아가 발길질을 했다는 기사가 뜨는 등 갈등이 증폭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본인 주장으로는 스트레칭이라는 말을 하기도 해 더욱 공분을 자아냈다.

3.3. 네덜란드

저는 이번 일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금액으로, 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저는 일본 총리의 성명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1999년 6월3일).

이번 일은 제게 큰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으며, 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시모토(橋本) 총리의 사죄(apology)를 평가합니다. 저는 여동생에게 보내서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쉬는 날 류마티스를 치료하러 갔을 때, 남편이 전화를 해서 이 서한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1999년 6월4일).

저는 사업금을 받고 대단히 기뻤으며, 또한 하시모토씨의 서한에도 크게 만족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내가 받은 피해}가 한 형태로 인정받은(recognition) 것입니다. 저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으며 심신이 떨렸습니다.귀하의 노력에 대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1999년 6월 9일).

귀하가 저를 위해 해 주셨고, 앞으로도 해 주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금전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15세의 소녀였던 제가 받았던 그 비참함의 모든 것이 인정된 것에 대해서 입니다. 그 일이 지금도 여전히 차유되지 않고,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던 그 상처의 아픔을 덜어 줄 것입니다 (1999년 6월).
네덜란드 피해자들이 해머 PICN 위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

3.4. 필리핀

태평양전쟁 이후 필리핀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조인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관련된 배상, 그리고 재산 및 청구권의 문제에 관해서 일본과 필리핀 간의 법적 해결이 끝난 것으로 되었다.

3.5. 인도네시아

보낸 돈이 피해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일본 내부에서도 별로 여론이 좋지 않다고 한다. 한일기본조약에서 박정희가 한 짓과 판박이다.

4. 보상 결과 요약

국가 보상금 수령자 수 비고
필리핀 3명 보상 사업의 일환으로 의료복지 지원 사업이 시행되었다.
대한민국 61명 당시 추산 생존 피해자 수는 207명
대만 13명 당시 추산 생존 피해자 수는 36명
네덜란드 78명
인도네시아 추산 불가[6] 3억 8천만엔 규모의 고령자 사회복지 추진 사업이 시행되었다.

5. 비판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배상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모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배상을 요구하던 피해자들은 반발하였으나, 그들의 입장을 무시한 채 기금 재단의 설립을 강행하였다는 비판을 들었다. 다음 링크에서 비판 대상이 되는 와다 하루키 교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을 추진한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 중 한 명이었고, 이를 추진하면서 한국의 지식인 및 일본 리버럴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이후 재단 설립 등에서 불거진 여러 논란 속에서 나온 공개서한이다. 서경식 교수가 와다 하루키 교수에게 보낸 공개서한1. 서경식 교수가 와다 하루키에게 보낸 공개서한2

서한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피해자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었고, 일본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새로운 연대의 지평을 열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며, 일본인이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던가요. 그것은 겸허라는 옷을 입은 자기중심주의는 아니었던가요. (중략) 그런 심성(자기중심주의-인용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이미 돈을 주었다거나 피해자의 목적은 결국 돈이었다는 따위의 일본 사회에 편재하는 최악의 차별 의식과 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7]

[1] 일본 총리부 및 외무성 공관 재단법인으로 설립[2] 무라야마 담화의 그 무라야마 총리 맞다.[3] 사업 운영자금을 일본 정부 재정에서 각출했다.[4] 무라야마 담화와는 다른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의 정식명칭은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이다.[5] 대표적으로 한일기본조약 같은 것들. 다른 피해국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6]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한 강간 등 피해자까지 포함되어 그 추산이 힘들어졌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도네시아에서 실시하는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사업 및 원조는 인도네시아 정부(특히 사회성)를 통해 실시되어야 하며, 다른 조직과 개인을 통해 실시되는 일은 없다."라고 못박고, 직접 테이블에 나오게 됐다.[7] 서경식,『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한승동 옮김, 도서출판 나무연필(2017),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