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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2세(은하영웅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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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2세
August II von Goldenbaum · アウグスト2世
인물 정보
<colbgcolor=#eee,#222> 신체 정보 남성, ???cm, ?형
생몰년 SE 529 ~ SE 562 (33세)
재위 SE 556 ~ SE 562 (6년)
가족 관계 리하르트 3세(아버지), 일레네(어머니)
동생 셋
에리히 폰 린더호프(사촌동생)
국적 및 소속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최종 직위 은하제국 황제
별칭 유혈제,流血帝,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폭정2.3. 최후
3. 역사상 유사 사례4. 여담

[clearfix]
파일:Goldenbaum-Dynasty.png 골덴바움 왕조 역대 황제 파일:Goldenbaum-Dynasty.png
리하르트 3세 아우구스트 2세 에리히 2세

1. 개요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골덴바움 왕조의 제14대 황제다.

유혈 황제(流血帝, 유혈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은하영웅전설 세계관에서는 인류 역사상 희대의 살인마이며, 6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 피를 뿌리며 제국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은 전대미문의 암군이자 폭군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아우구스트는 황태자 시절부터 다른 의미로 비범했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옥좌에 앉았을 때, 이미 인생의 모든 쾌락을 맛봤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아 왔다. 황음[1], 과도한 미식, 폭음 등을 즐겼으며, 통풍 발작을 억제한답시고 아편을 상습적으로 복용하여 육체가 붕괴되어 갔다. 이런 무절제한 생활 끝에 신체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지방과 수분이 몸의 99%를 차지하게 됐고, 골격과 근육이 허약해져 육체를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항상 휠체어 로봇의 깃털 쿠션에 앉아서 다녔다.

이러다 보니 아우구스트는 원래라면 황태자가 되지도 못했을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선제 리하르트 3세는 일찍이 그에게 매우 실망했다. 그러나 그는 리하르트 3세의 장남이라는 정통성이 있었는데다가 그의 어리석은 세 동생들은 아우구스트를 대신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아우구스트는 황태자 지위를 즉위 전까지 별 무리 없이 유지했다.

2.2. 폭정

리하르트 3세의 우려대로, 아우구스트 2세는 황제가 되자마자 그 잔학무도한 성품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는 즉위 이후 선제의 총희들에게 금전을 주고 내보내는 관례를 깨고 이들을 모조리 자신의 후궁으로 삼아 비난을 받았는데, 어머니이자 황태후인 일레네가 이에 대해 나무라자 '선물'이라며 한 방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태후는 갑자기 기겁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 방 안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선제의 총희들이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 끝에 죽은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리하르트 3세가 정실인 어머니를 두고 여색을 즐겼으니 어머니의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이유로 벌인 짓이었다.

그렇게 총희들에게 피를 뿌린 그는 동생 셋마저 제위 찬탈을 모의했다는 누명을 씌워 살해한 뒤, 그 시체를 토막내어 유각견 무리에 던져주었다. 그리고 역적을 태어나게 했다는 죄로 자기 어머니에게까지 자결을 강요하여 죽이는 패륜마저 저질렀다. 이것도 모자라, 즉위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정부 각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궁정에서 본보기를 충분히 보인 황제는 이제 거리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을 기분 내키는 대로 잔혹하게 처형했고, 시체를 벌거벗겨 거리에 내세우기도 했다. 또한 이상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는데, 다이아몬드 주사기로 대상자의 눈동자를 찔러 안저,眼底,와 두개골을 뚫고 뇌에 손상을 입혀 미쳐 죽게 만드는 고문기구 '아우구스트의 주사기'를 발명했다.

이렇게 일개 쾌락살인마 따위가 황제의 자리에 있으니, 당연히 그의 치세 동안 은하제국은 국정이 돌아가기는 커녕[2] 일개 평민부터 대귀족들까지 황제에게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나라 전체가 얼어붙어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황제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이 있었다. 가령 근위여단장 샴버크 준장은 아예 직접 나서서 황제의 '직감'에 따라 반역자를 색출한 후, 그 일족까지 모조리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참 모순적이게도, 아우구스트 2세의 재위기간은 은하제국 역사상 가장 평등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평민, 하급귀족, 대귀족, 황족 할 것 없이 그저 황제의 말 한 마디만 떨어지면 '평등'하게 일족이 멸족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이다.[3]폭군의 학살극 앞에 은하제국의 계급갈등은 자취를 감추고 평민이고 대귀족이고 모두 덜덜 떨고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우구스트 2세 시기에 살해당한 사람의 수는 최소 600만, 최대 2,000만으로 추정된다. 작중 표현에 따르면, 황제가 그 굵디굵은 손가락을 움직여 명령을 내릴 때마다 오딘의 인구가 감소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 황제가 인육을 먹고 그 피를 포도주에 섞어 마신다는 괴기한 풍문까지 돌아다녔을 정도다.

2.3. 최후

하지만 아우구스트 2세의 폭정으로 형성된 공포는 시간이 갈수록 황제에 반발하는 여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아우구스트 2세의 사촌동생 에리히 폰 린더호프 후작이었다. 린더호프 후작은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하고, 앞으로 닥칠 위기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일찌감치 자신의 영지로 도망쳤다. 그 덕분에 6년 간 펼쳐진 피의 광풍으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6년만에 황제의 마수가 마침내 그에게까지 닿은 것이다. 수도에 있는 근친들을 싸그리 죽인 아우구스트 2세는 도망친 사촌동생을 떠올리고는 출두를 명했다.

하지만 당연히 죽기 싫은 린더호프 후작은 발버둥이라도 쳐보겠다는 심정으로 황제의 출두 명령을 거부하고, 인근의 제국군 부대에게 호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여 만약 패배한다면 황제의 손에 죽기 전에 자결하기 위해 독이 든 캡슐을 소지하고 다녔지만, 머지않아 거대한 호응이 잇따랐다. 콘라트 하인츠 폰 로엔그람 백작을 비롯한 젊은 제독 세 명이 황제를 저버리고 린더호프 후작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 모두 황제의 폭정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처자식을 황제에게 잃어 원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토벌에 나선 제국군도 폭군을 위해 싸우기 싫었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 트라바흐 성역의 전투에서 린더호프 후작은 전의를 잃은 토벌군은 단번에 격파했고, 토벌군은 그대로 반란군에 투항해 버렸다. 이때 토벌군의 투항자가 전사자의 20배를 넘었다.

그렇게 수많은 은하제국 신민들의 한 줄기 빛이 된 린더호프 후작은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이끌고 유혈 황제 아우구스트를 심판하기 위해 오딘에 상륙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이미 죽은 뒤였는데, 범인은 다름아닌 그의 심복인 근위여단장 샴버크 준장이었다. 대세가 정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상황 판단도 못 한 채 느긋하게 애완 유각견에게 먹이나 주던 황제의 등을 떠밀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희대의 폭군 아우구스트 2세는 애지중지하던 유각견들의 우리에 떨어져, 그대로 자신의 애완견들에게 잡아먹히는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4]

어쨌든 아우구스트 2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 린더호프 후작은 그대로 에리히 2세가 되어 즉위했다. 에리히 2세는 특출나게 대단한 정치를 한 것은 아니지만 폭군으로부터 제국을 구해낸 공적이 있고 아우구스트 2세가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비교우위로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다.

우습게도 선조인 아우구스트 1세는 가정적으로 폭군이라 머리카락 페티시즘이 과하게 있는 괴짜였지만 적어도 정치만은 명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잘 해내던 거랑 달리 아우구스트 2세는 정반대였다. 똑같은게 지기스문트 1세는 나름 정치를 잘 이룬 황제였지만 지기스문트 2세는 암군으로 길이 남아버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3. 역사상 유사 사례

4. 여담



[1] 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2] 그의 뒤를 이은 에리히 2세가 특출난 통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아우구스트 2세 시절에 망가진 제국과 제도를 되살리느라 애썼다는 것이나 아우구스트 2세의 재위기간이 고작 6년에 불과함을 감안하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즉위한지 일주일도 안 돼 정부 각료들을 몰살시켰다는걸 감안하면 그의 재위중에 제대로 된 정부 조직이 작동했는지조차 의문. 그렇다면 나라가 그 지경이 된 것도 납득이 된다.[3] 이 '평등'에 대해서 말하자면 본래 문벌귀족쯤 되면 발언의 자유가 어느정도 있어서 평민이라면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사회질서유지국에 끌려갈 판이지만 문벌귀족의 경우에는 사석에서 황제를 욕해도 넘어가진다. 문벌귀족의 위세는 그정도로 강한데 이 시기에만큼은 '평등'하게 실제 역모가 아닌 꼬투리 잡힌걸로도 일개 평민 따위와 똑같이 일족이 박살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4] 샴버크 준장은 이후 에리히 2세로부터 폭군을 처단한 공로를 인정받아 무려 3계급 승진을 하여 대장이 되었지만 곧 폭군을 비호한 죄가 물어져 처형되었다.[5] 그나마 골덴바움 왕조는 황제만 교체되고 끝났지만 유송은 멸망했다. 게다가 아우구스트 2세는 성인이기라도 했지 후폐제는 사망했을 때가 14세, 즉위했을 때는 9세다.[6] 고작 제정신으로 옹립이 될 정도로 이 인간이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만큼 유송에는 제정신이 아닌 구성원이 많았다.[7] 소보의, 소보인, 소종, 소자현 정도만이 살아남았다.[8] 명제의 황족 도살은 부족한 정통성에도 있었다. 명제는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형의 아들로 말하자면 조카다. 문제는 창업군주의 아들이 아니면서도 창업군주의 후손들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황제가 되다보니 정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9] 중국사 중에서도 특히 남조 국가에서 유난히 비정상적인 군주가 많이 등장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당시 남조는 오석산이라는 일종의 마약이 상류층 위주로 유행해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10] 사생아까지 합치면 자식이 365명에 달한다는 말이 있으며, 워낙 여자를 탐하다 보니 어느 날 함께 잔 여자가 알고 보니 자기 자식이라는 악소문이 돌았다. 호색한 기질은 외교에서도 이상하게 발휘되어서 타국 군주들에게 선물이랍시고 포르노 그림을 선물했는데 명백히 외교 결례이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군말없이 받았다고 하며 유일하게 러시아 차르는 내 취향이라며 좋아했다고 한다.[11] 간단히 설명하자면, 후임 황제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당연히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해야되지만, 구체적인 수치까지 드러내기엔 황가의 체면이 있으니 '폭정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도로 전해졌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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