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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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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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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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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fonso_de_Albuquerque.jpg

Afonso de Albuquerque
아폰수 드알부케르크[1]
(1453~1515)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포르투갈의 군인으로 포르투갈의 동방 개척에 혁혁한 업적을 남긴 인물. 그 업적 덕에, 동양의 카이사르, 바다의 사자, 포르투갈의 마르스[2] 등으로 불렸다.

2. 생애

1453년 리스본 근처의 알랸드라에서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부터 북아프리카에서 십 년간 군대 경험을 쌓다가 1471년에는 알폰소 5세의 밑에서 장교를 지내면서 모로코탕헤르, 아씰라를 정복하였다.

나이 50세가 되던 1503년 4월 6일, 사촌 프란시스쿠와 함께 인도로 원정을 갔다.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와 니콜라우 코엘류 등과 함께 항해하며 코친의 왕을 도와 캘리컷의 왕인 자모린을 공격하는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왕에게 쾰른과 함께 코친에서 포르투갈 요새를 구축하고 무역을 확립하는 권한을 받고 1504년 7월에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506년 4월에 다시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동아프리카의 소코트라를 정복하고 수크에 요새를 건설하여 인도양홍해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507년 5월에 호르무즈를 점령하고 7월에는 무스카트의 도시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중노동과 기후에 시달려 오랫동안 함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1508년 1월에 호르무즈를 포기하고 소코트라에 정착하여 연안의 마을들을 습격하고 호르무즈에 반환하고 인도로 향하였다.

1508년 12월에 인도 총독이 되어 인도로 갔지만 전임 총독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에게 체포되었다. 1509년 2월 2일에 알메이다가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캘리컷, 구지라트의 연합 함대를 물리치자 감옥에서 풀려나 총독 자리를 물려받았다.

1509년에는 캘리컷을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1510년 9월에 고아를 정복하였으며, 1511년 8월에 말라카 해협의 관문인 말라카를 정복하였다.[3] 이로 인해 말라카를 중심으로 했던 지역 강국 믈라카 술탄국이 큰 타격을 입었고, 그 잔당은 남쪽으로 이동해 조호르 술탄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또한 1511년에 버마(버고/페구 왕국)와 아유타야 왕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했다. 수마트라에 있는 믈라카 술탄국의 기존 봉신국이었던 캄파르(Kampar)와 인드라기리(Indragiri)에도 사절을 파견해 이들을 포르투갈 영향권으로 편입했다.

말라카 점령 직후에는 주요 희귀 향신료 육두구정향의 원산지인 말루쿠 제도(몰루카 제도)를 향해 유럽 최초로 3척의 배를 파견했다. 이때 항해를 이끈 것은 알부케르크 본인이 아니라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António de Abreu)와 프란시스쿠 세항(Francisco Serrão)이었다. 당시만 해도 포르투갈인들은 말루쿠 제도로 가는 항로를 잘 몰랐으므로 현지 선원들을 고용해 길 안내를 맡겨야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512년 마침내 포르투갈 함대가 1512년 초 육두구의 원산지 반다 제도에 도착했다. 이들은 암본 등 말루쿠 제도의 다른 지역도 잠깐 탐험한 후 현지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가득 선적하고 말라카로 귀환하려고 했지만 프란시스쿠 세항이 이끄는 배는 스람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난파했다. 이때 트르나테 술탄국 지역 주민들이 이들을 구조했는데, 트르나테 술탄이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말라카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포르투갈인들의 항해로 인해 마침내 유럽으로 정향과 육두구를 직수입하는 무역로가 뚫리게 되었다.

1513년에는 아덴을 공격하였다가 실패한 후, 1514년에는 다시 인도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515년에는 홍해의 항해를 관리하기 위해 호르무즈에서 요새인 페이토리아를 건설하였다. 1517년에는 마누엘 1세의 명으로 페레스트렐루(Rafael Perestrello)가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 광저우로 파견했다.

그러나 정복한 지역에 대한 그의 통치는 매우 잔혹하였다. 스리랑카를 공격했을 때 부처의 치아를 보물로 여기고 보관하는 불치사를 습격하여 많은 불교 신도들 앞에서 부처의 치아를 부쉈으며,[4] 이슬람을 정복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심지어는 성지 메카를 습격하고 무함마드의 무덤을 파헤쳐 무슬림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대에 걸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그 외에, 에티오피아에 터널을 파서 나일 강의 물을 홍해로 돌려 이집트를 사막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어마어마한 돈이나 시간이 걸려 무시당했지만.

이러한 행동 때문에 피정복민들이 죽어라 저항했고 반란도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정복지에서도 연이은 반란에 시달리던 포르투갈 왕실에서 그를 탄핵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호르무즈에 요새를 건설한 해에 인도 총독을 박탈 당하고 고아로 돌아가던 도중 배에서 병사하였다.[5] 향년 62세.

하지만, 이후로도 포르투갈은 이런 종교적 강압 통치를 고집했고 결국 16세기 후반에 일부 점령한 실론(스리랑카)에서는 몇십여 년도 안 되어 현지에서 패배해 물러나야 했으며 2만이나 되는 병력이 전멸하는 참패를 겪었다.[6] 동남아 각지에서도 이랬고 결국, 포르투갈은 동티모르나 마카오, 고아 같은 일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빼고 모두 잃게 된다.

3. 여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쓰도록 하고 있다.[2]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신인 그 마르스다.[3] 참고로 이 말라카 공격에 뒷날의 세계일주 항해로 유명해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참가했다.[4] 다만 스리랑카 왕실이 이미 석가모니의 치아를 몰래 빼돌리고 돌로 만든 레플리카를 대신 갖다놓아 속인 덕분에, 석가모니의 불치사리는 현재까지도 무사히 전해진다.[5] 포르투갈의 왕인 마누엘 1세가 알부케르케의 정적 L. 소아레스를 후임 인도 총독으로 파견한 데 실망하여, 소아레스를 마중 나온 배 앞에서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6] 물론 이 병력 대부분은 라스카린(Lascarins)이라 불리는 현지 원주민 병력이었고 단일 전투에서 포르투갈인은 많아야 1,500명 정도였다. 문제는 포르투갈 자체가 17세기 초에도 인구 100만밖에 안되는 소국인데다 거리상 병력 충원하기도 벅찼기 때문에 작은 손실도 회복하기 힘들었단 것이다. 게다가 이 병력이 전멸하는 사태가 여러번 발생하다보니 대미지가 누적된다. 국력과 기술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18-19세기 제국주의 영국도 수많은 패배를 겪어가며 인도를 정복하고 그나마도 현지인 지배자들의 자치권을 대폭 인정해야 했는데 15-16세기 포르투갈이 뭘 할수 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