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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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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쿠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심볼.svg
파일: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트로피.png
베스트팀
파일:ESM.png

2004 Ballond'or
수상
안드리 셰브첸코
2위
데쿠
3위
호나우지뉴
}}} ||
FC 바르셀로나 스포츠 디렉터
Director de Futbol Club Barcelona
파일:Deco Barca.jpg
<colbgcolor=#064E9C><colcolor=#E4BB74> 이름 데쿠
Deco
본명 안데르송 루이스 지 소자
Anderson Luís de Souza
출생 1977년 8월 27일 ([age(1977-08-27)]세)
상파울루주 상베르나르두두캄푸
국적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4cm / 체중 73kg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행정가
주발 오른발
소속 <colbgcolor=#064E9C><colcolor=#E4BB74> 선수 SC 코린치안스 (1996~1997)
SL 벤피카 (1997~1999)
FC 알베르카 (1997~1998 / 임대)
→ SC 살게이로스 (1998~1999 / 임대)
FC 포르투 (1999~2004)
FC 바르셀로나 (2004~2008)
첼시 FC (2008~2010)
플루미넨시 FC (2010~2013)
행정 FC 바르셀로나 (2021~2023 / 스포츠 디렉터)
FC 바르셀로나 (2023~ / 스포츠 디렉터 이사)
국가대표 75경기 5골 (포르투갈 / 2003~2010)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선수 은퇴 후6.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출신, 포르투갈 국적의 전 축구 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

현재 FC 바르셀로나의 스포츠 디렉터 이사 겸 단장 역할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초창기

1996년 코린치안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1997년 19세의 나이로 포르투갈로 건너가 벤피카에 입단했다. 팀 훈련 당시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출전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해 2부 리그에 소속된 FC 알베르카에 1시즌 동안 임대되었다. 임대 기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쳐 시즌 종료 후 벤피카로 복귀한 뒤 1군 엔트리에 합류할 수 있었으나, 팀과의 재계약 문제에서 갈등을 빚어 결국 2부 리그 팀인 SC 살게이로스로 한 시즌 더 임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19경기 동안 단 2골을 그치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당시 벤피카의 감독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의 주목을 받지 못해 그냥 흔한 선수로 전락하는 듯 싶었다.

2.1.2. FC 포르투

포르투는 1998-99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데쿠의 영입을 결정했다. 서서히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자리를 잡아간 뒤 2002년 팀에 새로 부임한 주제 무리뉴를 만나 포르투의 핵심 선수로 중용되었다. 데쿠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펼쳤으며, 2002-03 시즌 팀이 프리메이라 리가, 타사 드 포르투갈, UEFA컵 우승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2003-04 시즌에도 이러한 활약이 계속되어 팀의 리그 2연패에 크게 공헌했으며, AS 모나코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팀 통산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비록 타사 드 포르투갈 결승에서 벤피카에게 패하여 포르투갈 팀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시즌 종료 이후 유로 2004에서의 활약도 더해져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UEFA 올해의 미드필더,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를 수상하고 발롱도르 순위 2위에 오르는 영예를 안게 된다. 데쿠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꼽힌다.

2.1.3. FC 바르셀로나

유로 2004 이후 프리미어 리그 첼시의 감독으로 떠난 무리뉴를 따라 첼시로 팀을 옮길 것이라는 이적설이 있었지만, 데쿠의 선택은 라리가바르셀로나였다. 이적료 책정 과정에서 포르투와 바르셀로나 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었으나, 결국 1,500만 유로에 히카르두 콰레스마를 얹어주는 방식으로 4년 계약을 성립시켰다. 참고로 당시 포르투가 원했던 이적료는 2,500만 유로였다.

바르셀로나 이적 후 가진 첫 경기는 공교롭게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친선경기였다.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의 전술에 잘 녹아들었으며, 팀의 핵심이었던 호나우지뉴, 사무엘 에투와의 호흡도 척척 들어맞았다. 지난 시즌과 유로에서의 활약이 반영되어 2004년 발롱도르 순위 2위에 오른다. 2004/05 시즌 라리가 우승과 2005/06 시즌 라리가와 챔피언스 리그 더블 달성에 크게 일조했다.

2006/07 시즌 초반에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및 자신의 생애 두 번째 'UEFA 올해의 미드필더'를 수상해 두 개의 클럽에서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2월에 열린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당시 17세 소년 알레샨드리 파투가 활약하던 SC 인테르나시오나우에게 막혀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골든볼'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당시 유럽 정상급 팀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바르셀로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7/08 시즌 바르셀로나는 레이카르트 임기 최악의 부진으로 레이카르트 감독과 함께 팀의 중심에 서 있던 호나우지뉴와 데쿠도 팀 개혁의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2007년 당시 에드미우송의 인터뷰로 많은 논란을 낳았던 바르셀로나의 검은 양 사건의 중심에는 호나우지뉴와 데쿠가 있었다. 결국 2008년 펩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 부임 직후 해이해진 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데쿠를 방출시키고, 호나우지뉴는 알아서 팀에서 나왔다.

리오넬 메시의 데뷔전에서 그와 교체되어 나왔다.

2.1.4. 첼시 FC

유로 2008 직후 이적료 1,000만 유로에 3년 계약으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를 따라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적설이 돌았던 첼시로의 이적을 완료했다.

포츠머스와의 프리미어 리그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터뜨려 팀의 4:0 승리에 기여했다. 다음 경기인 위건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도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어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러한 활약으로 8월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10월 팀 훈련 도중 허벅지 부상을 당해 3주 정도 결장했으며, 이후 11월 AS 로마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는 좋지 못한 경기력에 퇴장까지 당해 팀의 1:3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바르셀로나 시절에 비해 본격적인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전반기 좋지 않은 팀 성적으로 인해 스콜라리 감독이 경질되자 주전 자리를 잃게 되었다.

스콜라리 경질 이후 "내가 첼시에 온 이유는 스콜라리 때문이었다"며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불만을 표출했으며, 이에 포르투 시절 팀 동료였던 히카르두 카르발류와 함께 인터 밀란으로 이적해 자신의 옛 스승인 무리뉴와 합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2] 하지만 첼시는 자신들이 데쿠를 영입할 때 지불했던 가격인 1000만 유로를 고집했으며, 인터 밀란은 활약도에 비해 나이가 많고 이적료가 높다며 영입을 포기했다.

첼시에서의 선수 생활이 끝이라고 생각되었던 찰나에 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카를로 안첼로티가 왔으며, 안첼로티 특유의 4-4-2 다이아몬드 전술로 인해 출전 빈도가 높아졌다.

헐 시티와의 2009/10 시즌 프리미어 리그 개막전에서 디디에 드록바의 골을 어시스트한 뒤 다음 경기인 선덜랜드와의 경기에서 오른발 발리슛으로 득점하여 팀의 3:1 승리에 일조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본인의 100번째 유럽클럽대항전 출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시즌 초반의 좋은 활약으로 부활하나 했지만, 박싱 데이 기간에 입은 두 차례 부상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비슷한 시절 비슷한 위치였던 미하엘 발락이 레버쿠젠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의 클래스를 보여준 것에 반해, 데쿠는 끝까지 클래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이 당시에는 베트남 V.리그 1 이적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2.1.5. 황혼기와 은퇴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첼시와의 계약이 끝나자, 팀 동료인 줄리아누 벨레티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브라질 리그의 플루미넨시와 2년 계약에 합의했다. 입단 이후 2010년 브라질 리그 우승을 맛보면서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보냈으며 2013년 8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계약은 12월 만료지만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2013년 5월, 도핑 테스트에 걸렸지만 이 테스트는 오판이었다. 도핑에 걸렸지만 데쿠의 시료를 스위스 로잔으로 보내 정밀검사한 결과 전혀 금지 약물이 검출되지 않은 것. 사실 이 리우 연구소는 이전부터 도핑 오판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데쿠 이전에도 몇 명의 선수를 오판으로 골로 보내고, 그 결과 WADA로부터 권한을 박탈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포르투 시절 당시 좋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 히바우두, 주니뉴 파울리스타 등에 밀려 2002년 FIFA 월드컵은 물론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치른 A매치에 단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으며, 포르투갈에서 6년 동안 생활한 뒤 2003년 포르투갈 시민권을 취득해 귀화에 성공했다. 그만큼 당시 브라질의 스쿼드가 대단했는데 스쿼드의 빈약함으로 고생하고 있는 현 브라질과는 천지 차이였다. 지금이라면 데쿠 정도의 선수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선발 1순위로 뽑힌다.

당시 데쿠의 귀화는 포르투갈에서도 큰 논란을 불러왔다. 포르투에서 그를 감독했던 무리뉴조차 포르투갈 국대라면 좀 더 국가와 강한 연계가 있는 선수를 뽑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루이스 피구도 팀 정신을 깨는 행동이며, 태어난 나라를 위해 뛰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후이 코스타도 비슷한 요지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귀화한 뒤 끝끝내 발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브라질 출신인 루이스 스콜라리. 이로 인해 스콜라리도 외국인 감독인데 국가대표팀을 이끈다는 점에서 함께 비판받았다. 데쿠는 본인에게 있어서 포르투갈은 이제 집이며, 가족을 만나거나 휴가가 아닌 이상 브라질에 가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해명했다.

논란 끝에도 결국 귀화한 직후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대표팀 데뷔전으로 자신의 전 조국이었던 브라질을 상대하게 되었다. 데쿠는 여기서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팀의 2:1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66년 월드컵 이후 무려 37년 만에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꺾는 위업을 달성했다. 데뷔전 이후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자리잡았으며, 포르투갈의 UEFA 유로 2004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파일:attachment/Deco_Red_Card.jpg
이후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이란과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는 등 팀의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와의 16강전인 뉘른베르크의 전투에서 욘 헤이팅아에게 파울을 범해 경고를 받은 뒤[3] 프리킥 상황에서 공 가지고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어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4]

양 팀 합쳐서 레드 카드 4장, 옐로 카드 16장이 나오는 혈투를 벌인 끝에 포르투갈이 1:0으로 승리하여 8강에 진출했지만 데쿠는 징계를 받아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 나오지 못했다. 다행히 천신만고 끝에 팀은 잉글랜드를 승부차기로 꺾고 4강에 진출했으며, 징계가 풀린 데쿠 또한 4강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4강전에서 지네딘 지단프랑스를 맞아 0:1로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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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8에서 미하엘 발락과 볼 경합을 벌이는 데쿠.

UEFA 유로 2008에도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조별 라운드에서 1위 경쟁 후보로 꼽혔던 체코를 상대로 득점에 성공해 팀의 3:1 승리를 도와 팀이 1위로 8강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독일크로아티아에 잡혀 2위로 올라오는 바람에 포르투갈은 8강에서 탈락했다.
파일:external/www3.pictures.zimbio.com/Ivory+Coast+v+Portugal+Group+G+2010+FIFA+World+0rIzQGybmaml.jpg
그 뒤 2010 남아공 월드컵 무대도 밟았지만, 코트디부아르와의 첫 경기 이후 엉덩이 부상을 당해 이후의 경기에는 나오지 못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으며,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A매치 75경기 5골.

3. 플레이 스타일

포르투에서 바르셀로나 초반으로 이어지는 전성기 동안 데쿠는 미드필더의 교본과도 같다는 찬사를 받았다. 탄탄한 밸런스를 토대로 신기에 가까운 패스와 드리블, 기술적 능력과 슈팅, 심지어 매서운 프리킥까지 모두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수비적으로도 열정적이며 성실하게 뛰어다니면서 좋은 태클을 성공시켰다. 일각에서는 '로이 킨파트리크 비에라같은 전투적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시대에 등장한 데쿠라는 새로운 유형' 이라고 할 정도로, 풍부한 활동량을 가졌으면서도 그 둘에게는 없었던 기술적인 능력마저 탑재한 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았다. 오죽하면 농반진반 팀의 모든 미드필더를 데쿠로 구성해도 좋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괜히 사비이니에스타가 데쿠 그늘에 한동안 가려져 있었던 게 아닌 것.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도 가능했으며, 전술 이해도와 다재다능함으로 왼쪽, 오른쪽 가리지 않는 스위칭 플레이 역시 공수 모두 절묘하게 구사해 흠 잡을 구석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재능을 눈여겨본 조세 무리뉴의 포르투에서 4-4-2 포메이션의 핵심축으로 가동했는데, 2003-04년까지 포르투갈 내의 모든 우승컵은 물론 UEFA 챔피언스 리그까지 우승할 정도로 파괴적인 힘을 보여줬다. 이때 무리뉴의 황태자였던 데쿠의 능력과 기대치가 전 세계에 각인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황금세대와 유로 2004 결승까지 올라가는 등 데쿠의 능력은 최고점을 찍었다.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고 난 초반기에도 이러한 활약상은 이어졌는데,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바르셀로나가 2010년 전후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기 전, 바르셀로나는 호나우지뉴와 데쿠가 플레이를 진두지휘하며 유망주 메시에게 열심히 경험치를 먹여줬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05-06 시즌 챔스 우승 이후 목표가 사라졌는지 절친 호나우지뉴와 마찬가지로 클럽 등 유흥에 관심을 두며 일각의 우려를 받다 아니나 다를까 2007년부턴 플레이가 급속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는데, 결국 보다못한 팀이 2008년 지뉴와 묶어 데쿠를 쫓아내고 메시와 '세 얼간이' 위주로 팀을 개편하게 된다. 2008년 첼시 이적 이후에도 30대에 접어들어서인지 잦은 부상이 발목을 잡기 시작해 폼이 확 떨어진 모습을 많이 보였고, 결국 2013년 36살에 브라질 리그에서 은퇴하는 등 커리어 초반의 활약상을 생각해보면 빠른 커리어 슬럼프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커리어 초반에 받았던 기대치만큼 대성하지는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고점이 워낙 좋았고, 커리어 전체적으로도 바르셀로나 등에서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포르투갈 황금세대의 당당한 일원이었던만큼 지금도 레전드 선수로 대우받는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선수 은퇴 후

6. 같이 보기

1 히카르두 · 2 파울루 페헤이라 · 3 후이 조르즈 · 4 J. 안드라데 · 5 F. 쿠투 · 6 코스티냐 · 7 피구 · 8 프티 · 9 파울레타
10 후이 코스타 · 11 시망 · 12 · 13 미겔 · 14 발렌트 · 15 베투 · 16 카르발류 · 17 C. 호날두
18 마니시 · 19 티아구 · 20 데쿠 · 21 누누 고메스 · 22 모레이라 · 23 H. 포스티가
파일:브라질 국기.svg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1 히카르두 · 2 페헤이라 · 3 카네이라 · 4 R. 코스타 · 5 F. 메이라 · 6 코스티냐 · 7 피구 · 8 프티 · 9 파울레타
10 비아나 · 11 시망 · 12 · 13 미겔 · 14 발렌트 · 15 모르테 · 16 카르발류 · 17 C. 호날두
18 마니시 · 19 티아구 · 20 데쿠 · 21 누누 고메스 · 22 산투스 · 23 H. 포스티가
파일:브라질 국기.svg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1] 중앙 미드필더 , 공격형 미드필더[2] 로만이 독단으로 영입한 미하엘 발락으로 인해 스콜라리와 갈등을 빚다가 경질되는 운명을 맞았다.[3] 이건 다분히 의도적인 파울이다. 왜냐면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카르발류가 부상을 당했는데 공을 넘겨주지 않고 그냥 공격했기 때문이다.[4] 그 뒤, 클럽 팀 동료이자 상대팀 선수인 반브롱코스트가 퇴장당한 뒤 데쿠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