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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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드렉슬러 | 아돌프 히틀러 | 마르틴 보어만 | }}}}}}}}}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초대 당수 안톤 드렉슬러 Anton Drexler | ||
출생 | 1884년 6월 13일 | |
독일 제국 뮌헨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현 뮌헨) | ||
사망 | 1942년 2월 24일 (향년 57세) | |
나치 독일 뮌헨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현 뮌헨) | ||
정당 | '''[[독일 조국당| 독일 조국당 ]]''' (1917~1918)'''[[독일 노동자당| 독일 노동자당 ]]''' (1919~1920)(1920~1923, 1933~1942) | |
약력 | 제1대 독일 노동자당 의장[1] | |
1920년 2월 24일 ~ 1921년 7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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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의 창시자이자 초대 당수. 나치당의 실질적인 창당자이지만 히틀러 등장 이후에는 철저히 권력에서 밀려난 탓에 세계 대전 시기의 역사에 관심있는 이들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종종 히틀러를 나치당의 창당자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며, 창당 자체는 이 인물이 했다.객관적으로 본인이 직접 잘못한 것은 없지만 어찌됐든 히틀러를 발굴한 인물이며 나치당의 실질적인 창당자였기 때문에 서구권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2. 생애
1884년 뮌헨에서 태어나 1902년 베를린에서 자물쇠 제조공, 기계 정비공 등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극우 성향의 독일 조국당에 가입했고 독일 조국당이 해체되어 독일 국가인민당으로 대다수 당원들이 넘어가는 와중에 참여하지 않고 1919년 카를 하러, 고트프리트 페더,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함께 독일 노동자당을 창설했다. 그런데 창설 초기에는 말이 좋아서 정당이지 사실상 사회에 불만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모인 친목단체에 불과했으며 가입자도 40명 수준이었다.이 별볼일 없는 동호회 수준의 단체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 덕분이었다.
초창기의 독일 노동자당은 인적 세력도 자금력도 없었기 때문에 뮌헨의 맥주 하우스를 전전하면서 모임을 가졌다. 이 때 당시 독일군 소속의 히틀러는 이 독일 노동자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들의 모임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1919년 9월 뮌헨의 술집에서 열린 모임에서 히틀러가 본격 등장하는 계기가 발생한다.
당시 아달버트 바우만이라는 교수가 고트프리트 페더의 앞선 연설 내용을 반박하면서 "바이에른이 프로이센 자유주와의 관계를 끊고 오스트리아와 함께 분리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때 청중들 무리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갑자기 뛰쳐나와 바우만의 말을 가로막고 범게르만주의에 입각하여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당시까지 별볼일 없었던 청년 히틀러가 대중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이다.
히틀러의 즉흥적인 반박 연설은 당시 맥주집 청중들을 크게 감동시켰으며 안톤 드렉슬러도 그의 연설에 감명받은 사람 중 한명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드렉슬러는 행사가 끝난 후 히틀러에게 자신의 당에 대한 소책자를 쥐어주면서 자기 당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고, 히틀러는 며칠간 고민 끝에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히틀러가 입당한 후 히틀러는 빠른 속도로 당내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으며 금세 드렉슬러의 입지를 뛰어넘어 당내 1인자로 등극했다. 이에 드렉슬러는 히틀러의 사상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둥 독선적이라는 둥
히틀러의 가세로 독일 노동자당의 세력은 계속 확대되었고 당명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으로 변경되었는데, 이 와중에 드렉슬러는 실권이 없는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났고 결국 1923년 탈당했다.
이후 정치적인 행보가 전혀 없이 조용히 지내다가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장악한 1933년 나치당에 복귀한다. 하지만 나치당의 창설자라는 명목으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어떤 직책도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뮌헨에서 은거하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원 역사와 달리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에도 계속 당수로서 예우해주었기에 히틀러와도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 침공 후 히틀러에 의해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된다. 실권은 프리치가 쥐고 있어 사실상 명예직이었지만 본인은 만족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건강이 안 좋아져 히틀러와 만나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후 뮌헨의 자물쇠 수리공에서 폴란드의 총독까지 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OTL보다 2년을 더 살고 눈을 감는다.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의 대체역사물인 퓌러라이히[2]에서 등장하는 아담 드렉슬러의 모티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