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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C499><colcolor=#ece5b6> 후량 제2대 황제 세종 명황제 | 世宗 明皇帝 | |||
출생 | 542년 | ||
소량 회계군 회계현 (현 장쑤성 사오싱시) | |||
즉위 | 562년 2월 | ||
후량 남군 강릉 (현 후베이성 징저우시) | |||
사망 | 585년 5월 (향년 43세) | ||
후량 남군 강릉 (현 후베이성 징저우시) | |||
능묘 | 현릉(顯陵) | ||
재위기간 | 후량 황태자 | ||
555년 ~ 562년 2월 | |||
제2대 황제 | |||
562년 2월 ~ 585년 5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c499><colcolor=#ece5b6> 본관 | 난릉 소씨 | |
휘 | 규(巋) | ||
부모 | 부황 중종 모후 효태후 조씨 | ||
형제자매 | 6남 1녀 중 3남 | ||
배우자 | 효명황후 | ||
자녀 | 7남 4녀 | ||
자 | 인원(仁遠) | ||
묘호 | 세종(世宗) | ||
시호 | 효명황제(孝明皇帝) | ||
연호 | 천보(天保, 562년 ~ 5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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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중국 남북조시대 후량(後梁)의 제2대 황제.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효명황제(孝明皇帝). 휘는 소규(蕭巋).2. 생애
대동 8년(542년), 소찰과 귀빈 조씨(曹氏)[1]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인원(仁遠)으로 구변과 문학을 갖추었고 내전(內典)을 좋아했다.562년 소찰이 죽자 즉위하였고, 이듬해 연호를 천보(天保)로 고쳤다. 재위 기간 중 여러 차례 남진의 장수 오명철에게 패해 강남의 여러 지역을 빼앗기면서 나날이 후량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577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이 북제를 멸망시키자 북제의 수도였던 업(鄴)에 황제의 몸으로 스스로 입조(!)해서 이를 축하했다. 이 때 소규는 우문옹에게 후량을 건국하게 도와준 북주의 옛 은혜를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다.[2] 아마도 단순히 아부 외에도 북주에게 잘 보여서 나라를 존속시키고, 특히 나날이 진나라에게 공격받아 쇠망해 가는 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어프로치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우문옹은 소규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스스로 비파를 연주해주며 직접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소규는 신뢰를 얻어 우문옹은 후량의 수도 강릉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북주 군대를 철수시키고, 총관으로 임명하여 사실상 후량의 자치를 인정했다. 이는 우문태가 소찰을 도와주고 후량의 황제로 세워줬으나, 의심하여 강릉 서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보다는 상황이 나아진 셈이다.
581년,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됐지만 역시
582년 강릉 총관에서 파직되었으나, 매우 불안했던 소찰의 정권과 달리 소규의 정권은 나름 안정되어 수도 강릉에서는 양나라로부터 계승된 문화가 꽃피었다. 소규 본인도 학문에 재능이 있던 인물로 《효경주역의기》와 《대소승유미》 등 많은 저술을 지었다.
개황 5년(585년), 사망 후 아들 소종이 뒤를 이었으며 현릉(顯陵)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효명황후 장씨(張氏)
- 후주 소종
- 소모(蕭某) - 이름 불명
- 소환(蕭瓛) - 의흥왕(義興王)
- 소전(蕭瑑) - 진릉왕(晉陵王)
- 소경(蕭璟) - 임해왕(臨海王)
- 소순(蕭珣) - 남해왕(南海王)
- 소창(蕭瑒) - 의안왕(義安王)
- 소우(蕭瑀) - 신안왕(新安王)
- 진안공주(晉安公主) - 장녀로 정식 칭호는 진안군공주(晉安郡公主)였다가 남매인 소종이 즉위한 뒤로부턴 진안장공주(晉安長公主)로 바뀌었다. 후량 멸망 이후 수나라에 들어와 양민황후 소씨의 언니로서 임성부인(任城夫人)으로 봉해졌고 왕곤(王衮)에게 시집갔다.
- 소씨(蕭氏) - 두위(竇威)의 아내이다.
- 양민황후(煬愍皇后) 소씨(蕭氏) - 수양제의 황후. 통칭 소황후.
- 소씨(蕭氏) - 후막진의(侯莫陳毅)의 아내이다.
[1] 효황태비(孝皇太妃)로 추존.[2] 사실 후량 건국 당시 도와준 것은 서위이지만 서위의 황제가 꼭두각시라서 실권자 우문태가 대신 집정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우문태가 건국을 도와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문태의 아들이 우문옹이었으므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