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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2 01:11:27

하세가와 요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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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요헤이
長谷川陽平|Yohei Hasegawa
<nopad>파일:j-169352bw_R2-683x1024.jpg
<colbgcolor=#000><colcolor=#fff> 한국명 김양평 (金陽平)
출생 1971년 11월 4일([age(1971-11-04)]세)
일본 도쿄도 나카노구
가족 아버지 류 라이타, 어머니 나츠 케이코
데뷔 1995년 곱창전골
소속사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
소속그룹 곱창전골 (1995)
황신혜밴드 (1998~1999)
델리스파이스 (1999)
뜨거운 감자 (2008)
김창완밴드 (2010~2012)
장기하와 얼굴들 (2010~2018)
장르 록 음악, 펑크 록, 개러지 록, 사이키델릭, 시티팝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V LIVE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음악활동4. 방송활동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재한일본인 음악가.

2. 상세

일명 양평이 형.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기타 및 프로듀싱을 맡았었다. 참고로 혼자 살고 있는 부유한독신남. 일본인 중에 료헤이라는 이름이 많아서 료헤이라 잘못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요헤이가 맞다.[1]

한국 생활 초기에는 하양평으로 호칭했었는데 김창완이 "내 형제같은 사람이니 김씨 아니겠냐"고 한 이후로 김양평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후 자유로 가요제무한도전 쓸·친·소 페스티벌을 통하여 양평이형이라는 호칭이 더해지게 되었다.

일본인임에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상당한 편이다. 한국어로 말할 때는 다소 어눌하지만, 일본어로 유창하게 말할 때는 멋있다고 한다.

곱창전골[2][3]을 이끌고 있는 사토 유키에[4]라든가, 장사하자로 유명한 '하찌와 TJ'의 가스가 히로후미 등 한국에 넘어와 활동하는 일본 뮤지션들은 은근히 많은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편이다. 사실 모국인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하세가와 요헤이의 양친은 문서가 작성되어 있지만 하세가와 요헤이 본인의 문서는 없는 반면, 한국어 위키백과나 나무위키에는 버젓이 하세가와 요헤이의 문서가 존재한다. 공식 커리어에 곱창전골이 제일 첫 줄에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일본에 있을 당시엔 저니맨 생활이 꽤나 길었던 걸로 추정된다. 한국행이 여러모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셈.

부모님 모두 일본에서 유명한 연예인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유명 배우 류 라이타(竜雷太)이며[5], 어머니는 배우 나츠 케이코(夏圭子). 양친은 이혼했다. 하세가와는 트위터로 자신의 프로필에 아버지 프로필이 연결된 것에 매우 신기해했다.

트위터를 자주 하기 때문에 트위터를 통해서도 좋은 음악 추천이 많이 올라온다.

3. 음악활동

초등학교 2학년 때 부터 비틀즈의 음악에 빠졌다는 그의 말대로 음악에 대해 상당히 폭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LP 모으는 것이 취미. 장기하에게 이 취미를 전파하여 덕질의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했다.

10대 시절엔 펑크에 빠져 섹스 피스톨즈를 커버하는 밴드도 했었고, 20대에 접어들어서는 그저 브릿팝이 좋다는 이유로 영국까지 다녀올 정도로 브릿팝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알바를 하던 레코드점 단골 손님이[6] 어느 날 한국 여행을 갔다가 죽이는 노래를 들었다며 밴드 둘을 추천해 주었는데, 이게 양평이형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 밴드가 바로 신중현과 엽전들산울림이었고, 그들의 음악에 빠진 하세가와는 판을 사야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7] 한국에 주기적으로 들락거리다가 어느새 홍대에서 밴드를 하게 되어 현재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집은 LP로 가득 차서 LP가 주인이고 사람이 얹혀 사는 수준이라고 할 정도.

장기하와 얼굴들 이전엔 곱창전골, 델리스파이스, 황신혜밴드, 뜨거운 감자, 김창완밴드 등에서 연주했다. 처음에는 웬 이상한 일본인이 홍대에서 공연 보고 뛰놀더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차차 실력으로 네임드가 된 케이스. 그 중에서도 김창완과는 한때 일개 팬이었던 입장에서 같이 작업하는 동료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성공한 덕후'다. 프로듀서로도 활동 중이어서 미미시스터즈나 룩앤리슨 등을 프로듀싱해주기도 했다.

2010년부터 장기하와 얼굴들의 객원 멤버 및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2013년 객원멤버에서 정규멤버로 등업(…)했음이 알려졌다. 위트로 무장한 장기하와 얼굴들 1집을 넘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게 된 2집의 많은 요소들을 가이드했다. 장기하와 얼굴들 해체 이후 2023년 4월 장기하 단독공연에서 다시 장기하와 함께 활동 중인 것이 확인되었다.

연주/프로듀싱 스타일은 사이키델릭과 펑크 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1960년대 개러지 록/사이키델릭이라던지 크램스 같은 사이코빌리 장르에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하다. 특히 프로듀싱 해준 룩앤리슨 1집은 크램스나 온리 원스 같은 독특한 펑크 록을 했던 밴드들의 영향이 강한 편. 퍼즈 이펙터를 쓸 땐 '하세가와 요괴이'라고 불릴 정도로 과격하게 쓴다고 한다. 물론 음악광답게 다른 장르의 음악들에도 빠삭한 면모를 드러낸다.

4. 방송활동

장기하가 DJ를 맡았던 SBS POWER FM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에서 매주 수요일 '양평 LP바' 코너를 진행했다.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없는 LP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매니아 청취자들을 모았던 프로그램의 간판 코너.(이런 비슷한 코너를 2005년에도 김C가 진행한 라디오에서 했었다.)

2013년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하하와 함께 하면서 가장 인지도를 많이 쌓은 멤버. '식판 든 사나이', '집이 부자',[8] '양평이형' 등의 이미지를 대중에 각인시켰다.

소녀시대 써니의 팬이다. 무한도전 쓸·친·소 페스티벌에서 만나 SNS를 텄으며, 공연 초대를 해서 인증샷이 올라오기도 했다. 쓸.친.소에서 써니의 애장품이 경매에 나오자 혓바닥 RPM을 최대치로 가속해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득템! 65만원이 적정가라고 할정도면 말 다했다(?!)

후지타 사유리와 만났을 때 서로 일본말로 인사하지 않고 한국말로 인사했다고 한다. 근데 이게 무한도전 쓸친소 특집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사유리와 전화 통화를 시켜줬는데[9] 두 사람이 한국말로 대화한 것.[10] 박명수가 그걸 보고 두 사람 일본인 아니시냐고 물어봤다(…). 써니와 사유리 중에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을 받자 "아~ 그건 안돼에~!" 하며 절규. 그리고 라디오스타에서 또 재현되었다(...).

5. 기타



[1] 참고로 키무라 료헤이는 한자로 '良平'이다. 그런데 이것도 양평이라 읽을 수 있다.[2] コプチャンチョンゴル. 주로 신중현산울림의 곡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을 커버했던,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밴드. 지금은 자작곡을 쓴다. 하세가와 요헤이도 소속되어 있었지만 요헤이는 현재 탈퇴.[3] 밴드 이름을 왜 곱창전골로 했냐는 질문에 “다른 요리는 다 일본에 있는데 곱창전골은 일본에 없어서”라는 답변을 방송 중에 곱창전골을 먹으며 한 바가 있다.[4] 한운희의 남편이다.[5] 본명은 하세가와 타츠오. 태양을 향해 외쳐라케이조쿠, 거리 ~운명의 교차점~에 출연. 2014년에는 군사 칸베에에, 2015년에는 고독한 미식가 시즌 5에도 출연했다. 일드 좀 봤다면 바로 알 수 있는 배우다. 2018년 히트작인 컨피던스 JP 7화에서도 나왔다(보통 일드는 12회 내외로 제작되는데, 한국과 달리 각 회차 별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형식이다).[6] 곱창전골의 사토 유키에라는 얘기도 있다.[7] 진짜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음악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고,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된 시기도 아니었으니 한국 음악을 들으려면 한국에 직접 가서 사는 수밖에 없었던 것.[8] 카루이자와에 있는 별장은 욕실이 큰 방 만하고, 욕조에 장기하와 얼굴들 멤버가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본인 말하는 걸 들어 봐도 자기가 대학입시에 낙방하자 부친이 한 번 살고싶은 대로 살아 보라며 대학 등록금 만큼을 매달 용돈으로 줬다는 등(...) 보통 집안이 아니긴 한 듯.[9] 이 방식이 좀 특이하다. 일명 전화 소개팅이라 불렸는데, 사유리와 양평이형 둘에게 동시에 전화를 건 뒤 스피커폰을 켜고 휴대폰 두 대를 맞대서 서로 대화가 가능하도록 했다.[10] 물론 방송이라 그랬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사유리는 엄연히 일본에서 대학도 졸업한 고학력 출신이라 당연히 일본어를 까먹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냥 예능적인 모습인 듯 하다. 다만 실제로 오랫동안 모국어를 안 쓰면 바로 안 떠오를 때도 있다.(사유리도 일본 특집으로 일본에 가 매점에서 주문을 해야 되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질 않아 주문을 못 하고 돌아섰다.) 사유리나 하일 같은 경우는 그렇다고 쳐도 메이저 시절 박찬호도 한국어로 인터뷰할 때 단어를 잘 못 떠올리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워낙 영어만 쓰는 환경이다 보니 거의 쓰지 않던 한국어가 바로 안 떠오른 것. 이 때 유행어 비슷하게 된 게 미국식으로 주저하는 "엄..."이었다. 이때문에 박찬호가 눌변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생기기도...(물론 한국 돌아와서는 투머치 토커 본능을 일깨워 맹 활약 중이다.) 박찬호같이 말을 잘 하는 사람도 오래 안 쓰면 녹이 스는 게 언어인 것.그 와중에 영친왕은 50년 가까이 일본에서 살면서 주변인이 전부 일본인으로 채워진 환경인데도 한국어를 안 잊어버렸다..[11] 리더 소카베 케이이치랑 트위터 맞팔하고 있다.[12] 출처: 크르르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