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함종 어씨[1] |
출생 | 1907년[2] 8월 9일 |
경상남도 창원군 중면 경화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 |
사망 | 1943년 5월 13일[3] |
경상남도 창원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788호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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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7년 8월 9일 경상남도 창원시 중면 경화리(현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에서 아버지 어찬우(魚酇愚, 1878 ~ 1926. 8. 14)와 어머니 김녕 김씨(1873 ~ 1912. 9. 30) 김석주(金碩柱)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일본 가나가와현으로 건너갔는데, 1933년 9월 중순 반제국주의 전쟁대책위원회 가나가와지구 구성대책위원회의 책임자가 되어 대책위원회 조직부원 함기철(咸璣徹)과 함께 그해 일본군에 입영하는 병사들을 대상으로 반군국주의·반전주의의 선전 및 선동을 계획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초부터 함기철과 함께 가와사키시와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관내 각 정(町)의 일본군 입영 예정인 병사들에 대해 현지조사를 한 뒤, 반전주의 운동에 관한 격문의 원고를 작성·인쇄하여 같은 달 21일부터 병사들 앞으로 보냈다.
비슷한 방식으로 반전주의 운동에 관한 격문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석견교통 우편함에 5통 넣은 것을 비롯해 가와사키시 가와사키우편국 구내 우편함 등지에 총 100여통을 넣었다가 1933년 12월 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그는 1934년 6월 8일 요코하마형무소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류되었으며,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1월 30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조선으로 귀국하여 은거하다가 1943년 5월 13일 창원군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5년 어강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2008년 4월 28일 당초 창원시 진해구 자은동 하구마을 선영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