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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9 03:06:42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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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국립 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에스토니아호 모형. (출처: 위키백과)

1. 개요2. 멀쩡히 운항하던 15년3. 한밤중의 비극4. 사고 수습5. 이후6. 관련 기사와 설명 참고7. 매체8. 유사 사건 사고

1. 개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된 에스토니아호 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영어). 원본

1994년 9월 28일 새벽 1시경에 일어난 스웨덴-에스토니아를 오가던 대형 카 페리선인 에스토니아호가 발트해침몰한 사고. 풍랑으로 인해 뱃머리의 램프도어가 파손되면서 일어난 사고로, 승무원과 승객 총 989명 중에 853명이 한밤중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전까지 15년 무사고로 잘만 운영하던 배가 한순간의 풍랑과 결함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실은 채로 침몰했으며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와 함께 많이 거론되는 페리선 사고 중 하나이며 이 사고로 인해 페리선에 대한 안전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2. 멀쩡히 운항하던 15년

파일:external/www.simplonpc.co.uk/Estonia02.jpg파일:external/www.estoniaferrydisaster.net/pg213a.jpg
에스토니아참고 입을 벌리듯 열리는 선수부 램프도어 참고
1979년 노르웨이의 팔레이 아우구스텐(Parley Augustsen)은 자신이 이끌던 해운사에서 노르웨이-독일 구간에서 굴리기 위해 독일 마이어 조선(Meyer Werft)[1]에 15,566톤의 대형 카 페리선을 주문했다. 그런데 정작 조선소 측에서 전부 만들어 놨더니 아우구스텐 측은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돌연 인도를 취소하고 말았고 그로 인해 다른 해운업체인 핀란드의 샐리 해운(Rederi Ab Sally)측에서 얼떨결에 이 배를 첫번째로 매입하게 되었다.

맨 처음 배를 인도받게 된 샐리 해운은 당시 계열사였던 바이킹 해운(Viking Line)[2]에서 이 배를 바이킹 샐리(Viking Sally)라는 이름으로 1990년까지 핀란드-스웨덴 구간에서 굴렸다.[3] 이후엔 핀란드 기선 운수(Finland Steamship Company. 현재는 Effoa 해운으로 개칭)라는 해운업체에서 이 배를 매입하여 핀란드-스웨덴 구간에서 굴리게 되었는데 자회사인 실야 해운(Silja Line)[4]에서 1991년까지 실야스타(Silja Star)라는 이름으로 굴렸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진 또다른 자회사인 바사 해운(Wasa Line)[5]에서 바사킹(Wasa King)이라는 이름으로 굴렸다. 이후 동년(1993년) 에스토니아와 스웨덴 합작 해운사인 에스트 해운(Estline)에서 이 배를 매입하여 에스토니아(Estonia)라는 이름[6]으로 에스토니아-스웨덴 구간에서 굴리게 되었다. 에스토니아호는 운영 해운사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15년 동안 이상 없이 잘만 운항하던 배였다.

3. 한밤중의 비극

파일:external/www.historiadebarcos.wc.lt/estoniaa_catastrophe.gif파일:external/redice.tv/3251estonia3.jpg
풍랑에 가라앉는 모습 상상도 원본 침몰후 해저에 가라앉은 잔해 상상도[7] 원본
1994년 9월 27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출발해 다음날 스웨덴스톡홀름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에스토니아호에는 승객과 승무원 등 989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 당시 항해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외해로 나서자 풍랑이 갑자기 거세졌는데 그 다음 날 새벽 1시경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뱃머리의 차량 출입용 램프도어의 잠금장치가 부서지면서 떨어져나가 찬 바닷물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15분 뒤 배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에스토니아호는 자동차가 자력으로 배에 오르고내릴 수 있는 RORO(Roll on Roll out) 카페리선이었다. 자동차 출입문 램프도어는 뱃머리 부분에 있고 뱃머리가 오토바이 헬멧의 바이저처럼 위로 젖혀져서 입을 벌이고 자동차를 출입시킨다. 만일 운항 중에 이러한 램프도어가 결함으로 열리거나 떨어져나가면 자동차를 주차하는 1층의 넓은 공간으로 물이 들어차게 되어 단번에 전복되기 쉽다. 일부 카페리들은 뱃머리로 물이 들어와도 자동차가 적재된 1층 화물칸에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2중 물막이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더 널리 설치된 것은 이 사고 이후였고 에스토니아호는 그걸 가지고 있지 않았다.

파도에 쓸려 배가 오른쪽으로 30~40도 기울어지면서 선내 이동이 불가능해졌고 채 한 시간도 안 돼 수많은 승객들이 객실에 갇힌 채로 침몰하고 말았다.[8] 선장이 여객선의 침몰이 확실해진 후에야 비로소 경고방송을 내보냈는데 하필이면 한밤중이어서 많은 승객이 잠들어 있었고 그나마 깨어 있던 사람도 에스토니아어로 나오는 방송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9] 당시 갑판 위의 승객들만 생존할 수 있었으며 생존자의 3분의 1이 승무원이었고 대부분 젊은 남자였으며 55세 이상 생존자는 7명뿐이었고 12세 미만의 어린이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승객이 단잠을 자고 있던 한밤중에 닥쳐온 참극이었다.

4. 사고 수습

구조와 수색 작업을 주도한 스웨덴 정부는 각계 원로들로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수습 방안을 검토했다. 이 위원회는 수심이 깊어[10] 잠수부의 수색작업이 매우 위험하고 인양은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선체 수색과 인양을 하지 말 것을 정부에 권고하였다. 스웨덴 정부는 이를 근거로 다른 두 핵심 당사국인 에스토니아와 핀란드[11]의 동의를 얻어 수색과 인양을 포기했다. 유족들은 처음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정부는 유족들과 심도 있게 논의한 후 겨우겨우 동의를 얻어내 결국 3개월만에 시신 94구만을 수습한 후 나머지 수색과 인양을 실패한 채로 마무리했다. 유족들에게 부패한 시신을 그대로 보여줄 경우 유족들의 심경에 더욱 상처를 줄 수도 있었고 기술상 문제나 인양작업에 드는 경비 등을 생각해 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스웨덴 정부는 침몰한 선박을 수중무덤으로 보존하겠다고 발표했고 침몰 지점은 인양하지 못한 영령들을 엄숙히 추모하는 추도 해역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잠수부들이 무단으로 유해나 유물의 인양을 시도할지 모른다며 시신 유실을 막기 위해 자갈과 콘크리트를 배 위에 부어 현장을 완벽히 봉인하는 작업을 시도했지만 봉인 작업은 기술적 문제로 초기에 실패하였고 봉인할 경우 진실 규명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는 것 때문에 유족들이 유럽인권위원회에 봉인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까지 했기 때문에[12] 선체 주변에만 자갈과 콘크리트를 붓는 선에서 작업을 중단했다.

그리고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고지역 접근금지' 국제조약을 마련해 에스토니아호 사고 지점은 특별한 경우가 아닐 경우 어느 선박도 지나다닐 수 없고 인양작업도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1994년 9월 스웨덴으로 가려던 818명의 여행객들은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서 에스토니아호라는 거대한 안에 영원히 갇힌 셈이다.

5. 이후

이 사고로 인해 국제사회는 카 페리선의 안전 증진을 위해 복원성 규정을 개정하고 공공방송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국제협약 내용을 대폭 강화했다.

사고로부터 3년 뒤에 국제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를 했지만 졸속수사인 데다 유족들이 납득하기엔 너무 미흡했고 일부 밝혀진 진상은 허위였다. 게다가 사고로부터 10년 뒤에 또다른 불편한 진실이 드러났는데 정상 운항시의 에스토니아호가 군사장비를 몰래 운반하는 데 쓰인 운반책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족들은 지금까지도 독립적인 진상조사 기구 설립을 원하고 있다. 관련 기사, 또 다른 관련 기사

세월호 참사와 에스토니아 참사의 유사점을 재조명한 기사가 있다.

2019년에 유족들이 프랑스의 선박검사기관과 독일의 조선사를 상대로 프랑스에서 제기한 피해배상 청구 소송이 기각됐다.

2020년 9월에 디스커버리 제작진이 해저에 침몰한 에스토니아호의 선체에서 길이 4m에 달하는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다.

6. 관련 기사와 설명 참고

7. 매체

8. 유사 사건 사고



[1] 한국 언론에서 보도할 때 이름을 그대로 읽어서 마이어 베르프트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현재는 페리선보단 크루즈선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며 세계 5대 크루즈 조선사다.[2] 현재는 샐리 해운이 부도나면서 독립했다.[3] 배 자체에는 문제는 없었지만 1986년, 1987년에 각각 승객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4] 지금은 에스토니아의 탈링크 해운(Tallink)에 인수되었으며 아직도 유럽 고급 카페리 서비스로는 굴지의 회사다. 자사 선박 중 몇몇 큰 선박들은 크루즈페리라고 하는데 크루즈페리는 것은 카페리이면서도 객실을 좀더 고급스럽고 깔끔하게 꾸미면서 크루즈선에 준하는 시설들을 약간씩 갖추어 고급 서비스를 더한 선박이다. 예를 들자면 스파(작은 수영장 또는 목욕탕)라든가, 뷔페와 고급 음식점 또는 고급면세점 등의 기존 카페리선에선 보기 힘든 서비스들을 조금씩 추가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북유럽 떠나는 해외여행객들이 이 해운사의 배를 은근 타는 모양이라고 한다.[5] 현재는 실야 해운과 통합되어 사라짐.[6] 에스토니아호는 당시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배였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개방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도색도 에스토니아 국기가 연상되는 하양과 검정, 파랑 조합으로 칠했다.[7] 선수부 램프도어가 떨어져나간 것을 볼 수 있다.[8] 참고로 1시 30분 경에는 이미 90도 기울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정말이지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사고였다.[9] 그 이유는 하필 당시 승객의 대부분은 에스토니아인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승객들 중에는 스웨덴인들이 많았는데 사망자 중 절반이 넘는 500명 이상이 스웨덴인들이었다. 따라서 스웨덴에는 에스토니아호 사고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10] 약 80m 깊이에 가라앉아 있다.[11] 사고 현장이 핀란드의 대륙붕에 포함됨[12] 물론 유족들의 요청은 위원회에서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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