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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0:59:43

엘리펀트 카시마시

파일:엘리펀트 카시마시.png
그룹 명엘리펀트 카시마시
エレファントカシマシ
ELEPHANT KASHIMASHI
멤버(왼쪽부터)
타카미도리 세이지(베이스),
미야모토 히로지(보컬, 기타, 리더),
토미나가 요시유키(드럼),
이시모리 토시유키(기타)
결성1981년, 키타구 아카바네
데뷔1988년 3월 21일
1집 <THE ELEPHANT KASHIMASHI>
장르
레이블유니버설 뮤직 재팬
링크공식 사이트
공식 팬클럽

미야모토 히로지 공식 사이트

1. 소개2. 상세
2.1. 데뷔 이전2.2. EPIC 레코드 시절(1988~1994)2.3. 포니캐년 시절(1996~1998)2.4. 도시바 EMI 시절(1999~2007)2.5. 유니버설 뮤직 시절(2008~2019)2.6. 아뮤즈 시절(2019~2024)2.7. 엘리펀츠 시절(2024~)
3. 공연 및 활동4. 디스코그래피
4.1. 미야모토 히로지 솔로 디스코그래피
5. 멤버
5.1. 미야모토 히로지5.2. 이시모리 토시유키5.3. 타카미도리 세이지5.4. 토미나가 요시유키
6. 기타

1. 소개

일본록밴드. 1981년에 결성해 1986년 소니 뮤직 산하의 CBS 오디션에 합격해 1988년 1집 <THE ELEPHANT KASHIMASHI>로 데뷔했다. 일본의 음울한 문화를 정면으로 비틀어버리는 저항 정신과 서정적인 멜로디로 1980년대 후반~2000년대 초 일본 모던 록,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록이 가진 강렬함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사소한 감정들을 짙게 녹여낸 밴드로 평가 받는다. 30년 이상의 경력 동안 언더와 오버를 오가며 활동하면서도 비주류적이고 주체적인 음악적 태도를 강하게 지켜오고 있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 밴드이기도 하다. 일본 록 역사에서 보자면 R.E.M.[1]이나 RHCP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밴드. 보통 부를 때 밴드 명을 줄인 에레카시로 부른다.

2. 상세

초창기인 EPIC 레코드 시절엔 야성적인 바이브와 강렬한 사운드,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가사가 주를 이루고 포니캐년 시절엔 비교적 부드러운, 혹은 대중적인 스타일이 더해지고 삶에 대한 의지가 한층 뚜렷해진 작품들이, 도시바EMI 시절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성찰 및 탐구적인 테마가 주를 이룬다. 유니버설 시절부터는 부드러워진 바이브와 희망적이고 따뜻한 메시지가 많다. '냉소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지만 희망에 몸부림치는' 염세주의적인 초창기에서, '의지를 다잡고 자아와 마음에 대해 성찰하고 탐구하는' 중반기를 넘어, 후반기인 현재로 와서는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 '함께라면 괜찮다'는 식의 낙천적[2] 테마가 짙어져 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스타일 변화라기보단 작사 및 작곡자이자 밴드의 리더인 미야모토의 일생에 걸친 심리적 변화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88년 데뷔 당시부터 1994년 7집을 낼 때 까지의 레이블은 EPIC Record JAPAN[3]이었고, 1996년 8집부터의 레이블은 포니캐년, 2000년 11집부터의 레이블은 도시바 EMI, 2007년 18집부터 현재까지 레이블은 유니버설 뮤직 재팬이다. EPIC 레코드 시절만해도 인기 있기 보다는 전형적인 컬트 팬덤과 비평적인 지지를 얻던 밴드였는데 포니캐년으로 이적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해 장수 밴드가 되었다.

매니지먼트는 포니캐년 계약 당시부터 2019년 23집까지 페이스 뮤직 엔터테인먼트, 2019년 2월 1일부로 아뮤즈로 이적했다. 그리고 2024년 3월 31일 아뮤즈와의 계약 종료와 동시에 '엘리펀츠(Elephants)'라는 독립 매니지먼트 회사를 자체적으로 설립했다. 이에 따라 미야모토 히로지의 솔로 활동 매니지먼트도 이 곳에서 맡는다. 그리고 등기이사가 미야모토 히로지 본인이다.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의 창법이 독특한데, 흔히 말하는 '생목'으로 부르는게 적절하다고 보일 정도로 창법에서의 기교가 거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어린이 합창단 출신에 보컬 트레이닝도 받아서 기본기가 출중하고 성대와 폐활량도 강하지만, 일반적인 창법에서 벗어나 목소리 톤 뿐만 아니라 발성, 발음을 할 때 평소 말을 할 때와 같은 느낌으로 낸다. 작위적인 느낌이 거의 없는, 굉장히 자연적인 보컬 스타일이다. 현지 팬들은 대부분 이런 미야모토의 보컬 스타일을 두고 '스트레이트'하다고 표현한다. 때문에 고음 부분이나 소리를 크게 지르는 부분에서 긁히거나 허스키한 소리도 자연스레 나게 되고, 이런 불완전함에서 오는 감성과 쾌감이 음악의 매력에 크게 작용했다. 나이가 들면서 음색은 조금씩 변화했지만 기본적인 창법 자체는 현재도 여전하다. EPIC레코드 시절에는 이런 '생목' 창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정석과 완전히 어긋난 창법을 구사하며 등장한 이 시기는 밴드의 연주 스타일이나 작사, 작곡 스타일 이상의 매력 포인트로 작용하여, 현재까지도 에레카시하면 인식되는 야생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본격적으로 창법이 안정적으로 변화한 건 대중성을 부여받은 포니캐년 시절부터인데, 본인만의 거친 발성은 유지하되 호흡이 더 안정적으로 변화하여 가창력 상승과 함께 청순한 감성이 극대화 됐다. 기술적 노련함까지 더해진 도시바 시절과 유니버설 시절은 가창력 면에서 최고의 전성기. 또한 성대가 굉장히 강해서 보통은 가성이나 복부에 힘을 주고 안정감있게 처리하는 고음 영역도 타고난 성량과 생목으로 그냥 밀어붙여서 소화해낸다.[4]

보컬리스트로서의 미야모토 히로지를 정리하면, 기본적인 창법에서 어긋난 창법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승화하여 에레카시 특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이 점이 가장 큰 매력이 되어 청자들의 감성을 크게 자극했다고 할 수 있다.[5]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부른다'는 스타일과 다른 느낌이라 고개가 갸우뚱할 수도 있지만, 이 창법이 에레카시의 음악 색깔과 정체성을 완성하는 존재기 때문에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6]곡마다 다양한 분위기를 낼 수 있고 진정성과 호소력이 짙다는 면에서 오히려 보컬로서의 기량은 매우 뛰어나다.[7] 곡에서 보여진 최대 고음은 2006년 발매한 15집 앨범 '扉'의 수록곡 '星くずの中のジパング'에서의 3옥타브 레#이다.

2.1. 데뷔 이전

1981년 키타구립 아카바네다이 중학교 1학년 6반이었던 토미나가 요시유키와 이시모리 토시유키의 만남이 밴드 결성의 첫 단추였다. 미야모토 히로지도 이들과 같은 반이었지만 밴드에 합류한건 중학교 3학년 때. 타카미도리 세이지는 고등학교 시절 토미나가와 같은 반 동급생으로 만난게 인연이 되어 1986년에 합류하게 됐다. 밴드 결성을 주도하고 이시모리와 미야모토에게 록 음악을 들려준 건 현재 드러머인 토미나가였다. 미야모토 합류 당시에는 이 셋 외에도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가 따로 있었고, 오르간과 매니저를 동시에 담당한 여학생까지 6인조였다. 4인조 체제가 된 시기는 타카미도리 합류 이전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레인보우, RC 석세션, 딥 퍼플의 카피 밴드로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2년 EastWest라는 야마하사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밴드 경연 대회에 출전, 이 대회의 지역 예선에서 훗날 1집의 수록곡이 될 <デーデ>와 <やさしさ>를 부른 게 밴드로서 공식적인 첫 무대였다. 그리고 1986년 타카미도리 세이지가 합류하여 현재의 멤버와 포지션을 정립, CBS 오디션에 입상하고 EPIC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한다.

2.2. EPIC 레코드 시절(1988~1994)

EPIC레코드 시절은 에레카시의 음악 세계가 농축된 시기로 평가받는다. 데뷔부터 꾸밈이나 기교가 전혀 없는 날것 그대로의 야성을 드러내보인 에레카시는 Rockin' On 잡지로부터 사잔 올 스타즈 이후 가장 충격적인 데뷔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려하지 않은 사운드가 오히려 미야모토의 보컬 스타일과 굉장히 잘 어울렸고, 덕분에 키치한 사운드와 일상의 우울감을 표현한 가사가 잘 조화되어 거칠면서도 호소력있는 음악적 색깔을 띄었다.

EPIC레코드 시절의 작품들은 작사 면에서 사회 문제와 문학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 일본 문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앨범이 4집 生活다. 또한 2집 The Elephant Kashimashi II는 체념과 절망이 뒤섞인 일상에 대한 은유적 묘사가 많은데, 그런 상황을 강요한 주체는 사회 구조, 그리고 그 가사 속의 주인공은 다른 이가 아닌 화자 자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외부적 원인은 사회로부터 왔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스스로라는 점을 이야기하며 은유적인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 이렇듯 미야모토의 문학적인 작사 능력이 빛을 발한 2집은 현재까지도 에레카시 커리어 사상 최고의 앨범이자 일본 록 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앨범이 일본 록 씬에서 얼터너티브 록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한 몫한다. 현재도 일본 록 잡지에서 일본 록 명반선을 꼽을때 에레카시의 초기작들은 빠지지 않는다. 주로 상술한 <THE ELEPHANT KASHIMASHI Ⅱ>, <浮世の夢>, <生活>가 자주 꼽히는 편. 롤링스톤 재팬은 일본 록 명반 100선에서 <THE ELEPHANT KASHIMASHI Ⅱ>를 50위에 선정했다.#

이 외에도 1994년에 발매한 7집 <東京の空>는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녹음과정에 있어 최초로 오버더빙을 실행했고, 몇몇 곡의 말미에 스킷을 구성하는 등 사운드에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앨범과 동명의 수록곡 <東京の空>은 12분 45초라는 장대한 러닝타임과 트럼펫 연주자 토시노리 콘도가 참여하는 등 앨범의 음악적 스케일과 완성도가 상당하여 비평적 성과는 준수했으나, 상업적 성과가 저조해 1995년에 EPIC레코드로부터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당하게 됐다. EPIC 시절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팬들에게 여운을 남긴 앨범.

이로 인해 1년이라는 시간동안 음악 활동에 문제가 생기자 미야모토는 리더로서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자신들을 받아줄 소속사들을 직접 찾아다녔고, 나머지 세 멤버 타카미도리, 이시모리, 토미나가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밴드 경력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게된다. 작곡이나 공연 등은 간간히 이루어졌지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에는 제약이 큰 상태였다.

2.3. 포니캐년 시절(1996~1998)

다행히도 1996년 포니캐년과 계약을 체결, 1996년에 8집 <ココロに花を>를 발매한다. 포니캐년의 요구에 맞춰 8집부터 10집까지 포니캐년에서 낸 3장의 음반 전부 이전의 음악 스타일에 비해 조금 더 부드럽고 대중적인 사운드를 담게 됐다. 또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이미지가 강했던 엘리펀트 카시마시에게 포니캐년이 방송 출연 스케줄을 늘려준다. 이 시기에 음악 프로그램 외에도 예능 프로그램 출연 비중이 상당히 많았고, 미야모토는 시트콤 출연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며 평단과 팬덤의 지지는 크나 대중적 인기는 적었던 엘리펀트 카시마시에게 인기와 유명세를 더해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속사의 요구에 맞추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엘리펀트 카시마시는 포니캐년에서 고작 3년 간 3장의 앨범을 연달아 내고 곧장 도시바EMI로 이적한다. 1996년 포니캐년 이적 후 첫 앨범인 8집 <ココロに花を>가 나온 당시, 미야모토는 워크맨으로 수록곡 <かけだす男>를 들으며 시부야 거리를 걷다가 너무나 부드럽고 말끔한 믹싱처리에 회의감을 느껴 그 자리에서 워크맨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또한 방송에서 진행된 무대에서는 밴드 연주를 라이브가 아닌 MR로 진행한 경우가 많았고, 미야모토는 이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공연 중에 본인이 핸드싱크를 하다가 손을 완전히 놔버리거나, 핸드싱크 중인 이시모리의 기타를 뺏어 버리는 등의 행동을 자주 했다. 이토록 포니캐년 소속 시절의 활동이 본인들의 가치관과 잘 맞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도시바EMI 소속 시절의 음반은 전부 진중한 바이브와 하드한 사운드로 채워져 있으며, 예능을 비롯한 TV 방송 출연을 최소화하게 된다.[8]

미야모토는 포니캐년 소속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998년, Bridge지에서 스핏츠쿠사노 마사무네와 함께 한 인터뷰에서 방송 출연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편하고 좋다'고 답변한 적이 있지만 맥락상 긍정적인 의미의 대답은 아니었다. 해당 내용 외에도 다른 질문 및 답변 몇 가지를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TV출연 관련 질문)
시부야 요이치[9] : 'TV에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편하고 좋다'고 적었는데.

미야모토 히로지 : 100번의 공연보다 1번의 TV출연이 더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뭔가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해버릴 때도 있다. 나는 TV 드라마에 사용된 곡(오늘 밤의 달처럼)의 앨범이 여태껏 낸 앨범 중에 제일 많이 팔렸다. 뭐하러 지금껏 앨범을 9장이나 낸건지, 그렇지 않은가? 뭐, 그런 의미에서 편하고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음악적 변화 관련 질문)
시부야 요이치 : <도쿄의 하늘> 이전의 에레카시와, 그 이후의 에레카시는 전혀 다른 것 같다. 미야모토는 별로 다른 걸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미야모토 히로지 : 음악적으로는 그런 것 같다.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태프나 프로듀서, 소속사 등 밴드 외 인물 관련)
시부야 요이치 : 에레카시는 이젠 말 그대로 밴드 멤버 이외를 전부 교체하고 돌연 성공한 것 같다.

미야모토 히로지 : 그에 관해선 벌써 피곤해졌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싶다'라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고 한들, 모두들 우리가 18살이던 때(초창기)의 이미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굉장히 갑갑했다. '좋고 나쁘고를 따져봤을 때, 어쩌면 그렇게 안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들 스스로 '우리 앨범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라는 목표를 삼던 차에 '이런 스태프가 있으면 어떨까'라고,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쪽(시부야 요이치)도 생각했던 거였구나. 그래서 짤렸지만.(웃음) 그렇게 돼서 또 곤란했고 말이다. 돈도 없었고.

유니버설 뮤직 이후의 음악들도 포니캐년 시절처럼 대중적인 곡들과 방송 출연도 다시 늘었지만, 이는 소속사로부터 요구된 면보다는 미야모토를 주축으로 밴드에 전체적인 연륜과 안정감이 더해지며 묻어나오는 밴드 스스로의 진실한 메시지에 가깝다. EPIC레코드 시절과 포니캐년 시절에는 방송에서 편하게 웃지도 않고, 방송으로 진행 되는 무대, 심지어 자신들의 뮤직비디오에서는 기타를 던지거나 물건을 뒤엎고, 도시바로 이적한 후엔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인식되는 것이 싫어 방송 출연 자체를 스스로 지양하던 미야모토가 2018년부터는 적극적으로 방송 출연과 솔로 활동까지 시작하게 된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나며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토록 포니캐년을 통해 성공과 좌절을 동시에 맛본 에레카시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에 와서 포니캐년 시절은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고루 극찬받는데 성공한 에레카시 커리어 최고의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EPIC 레코드 시절과 도시바EMI 시절의 음반들이 고평가받지만, 초창기의 주제의식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메시지를 다양한 음악적 색깔로 부담없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는데 성공하고, 평단으로부터는 지속적인 지지를 굳혔다는 점에서 포니캐년 시절이 종합적으로 커리어의 황금기로 평가받는 것이다. 또한 밴드 커리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인 9집 <明日に向かって走れ-月夜の歌->도 포니캐년 시절에 해당한다. 밴드 최고 인기곡인 <今宵の月のように​>도 이 앨범의 수록곡. 또다른 인기곡으로 꼽히는 <悲しみの果て>도 8집 수록곡이기에 포니캐년 시절에 해당된다.

2.4. 도시바 EMI 시절(1999~2007)

2.5. 유니버설 뮤직 시절(2008~2019)

2.6. 아뮤즈 시절(2019~2024)

2.7. 엘리펀츠 시절(2024~)

3. 공연 및 활동

매년마다 히비야공원 야외 음악당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한다. 매년은 아니지만 일본 무도관에서 새해 맞이 공연도 자주 진행된다. 때문에 무도관 공연과 히비야공원 공연만으로도 라이브 DVD가 많이 발매됐다. 미야모토가 말하기를 '가장 엘리펀트 카시마시 다운 무대'가 히비야공원이라고 한다. 이는 대다수의 팬들 또한 동의한다.

2017년 30주년 기념 전국 투어가 3월 20일에 시작해 12월 9일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정확히는 2018년이 30주년이지만 2017년 전국 투어를 마무리한 뒤, 정확히 데뷔 30주년이 되는 2018년 3월에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의 공연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3월 17일에 공연을 펼쳤는데, 4일 뒤인 3월 21일은 엘리펀트 카시마시의 첫 데뷔 싱글 <デーデ>와 데뷔 앨범 <THE ELEPHANT KASHIMASHI>가 나온 날이다.자세한 정보

2017년 제 68회 홍백가합전에 커리어 최초로 출연하였다. 9집 <明日に向かって走れ-月夜の歌->의 수록곡이자 후지TV 드라마 <月の輝く夜だから>의 주제가로 쓰인 '今宵の月のように'를 불렀다. 밴드의 최고 인기곡이다.

2018년 3월 17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데뷔 30주년 공연을 펼쳤다. 원래는 단독 콘서트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꿈의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게스트로 Spitz미스터 칠드런이 출연하게 됐다. 17일에는 에레카시 단독 라이브,[10] 18일에 세 밴드의 합동 공연이 이루어졌다. 무대 순서는 스핏츠, 미스터 칠드런, 엘리펀트 카시마시, 마지막 앙코르는 세 밴드의 합동 공연으로 진행됐다. 80년대에 데뷔해 일본 록을 이끌어온 세 거장 밴드의 공연.

2018년 소규모 공연장이나 라이브 하우스(Zepp)를 중심으로 한 23집 'Wake Up' 전국 투어가 6월 25일에 시작해 9월 11일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 됐다. 자세한 정보

2018년 TV 도쿄 심야 드라마 '미야모토로부터 너에게'의 드라마 OST를 맡았다. 원래 만화가 원작인데, 주인공의 이름이 '미야모토 히로지'이고 주인공이 작중 읽는 책 제목 중 5집 앨범 수록곡의 제목인 '無事なる男'(무사한 남자)라는 책이 있는 등 원작 자체가 엘리펀트 카시마시에서 여러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에 드라마 화가 되고 난 후 OST를 맡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원작 만화는 1990년 연재를 시작해 1994년 연재를 끝마쳤는데 1990년은 에레카시가 데뷔한지 2년 밖에 안됐을 때다. 그야말로 열정 넘치는 신인 밴드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열정 넘치는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

2018년 10월 1일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와 시이나 링고와의 협연곡 '獣ゆく細道'가 공개됐다. 이는 에레카시 데뷔 30년 만에 밴드 내 멤버가 처음으로 솔로 활동을 가진 경우다.

2018년 11월 6일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와 도쿄 스카 파라다이스 오케스트라의 협연곡 '明日以外すべて燃やせ'가 공개했다.

2019년 2월 12일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가 싱글 '冬の花'를 공개했다.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11]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 계정도 개설했다.

2020년 2월 20일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가 싱글 'ハレルヤ'를 공개했다.

2020년 3월 4일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가 첫 솔로 앨범 '宮本、独歩'를 발매했다. 시이나 링고와의 협연곡인 '獣ゆく細道'를 시작으로 공개된 미야모토의 솔로 곡들이 전부 포함돼있다. 일본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앨범 다운로드 횟수 1위를 기록하며 데뷔했다.

2020년 10월 4일 히비야공원 정기 공연이 열리는데, 이번 라이브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유례없는 인터넷 스트리밍도 지원한다.

2020년 11월 18일 보컬 미야모토 히로지가 두번째 솔로 앨범 'ROMANCE'를 발매했다. 오리콘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했다.

2021년 1월 1일, 미야모토의 솔로 1집 '宮本、独歩'의 수록곡 '夜明けのうた'의 뮤직비디오가 새해 기념으로 공개됐다.

2021년 10월 11일과 11월 3일, 미야모토가 솔로 앨범 '종횡무진' 홍보 차원으로 'YouTuber 대작전'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생방송 컨텐츠를 시작했다. 팬들의 댓글을 통해 궁금했던 것, 즉석에서 불러줬으면 하는 노래, 고민 상담, 읽었던 책, 밴드 활동 시 비하인드 스토리, 데모 음원 청취 등 여러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녹음실에서 진행됐다.

2023년 3월 11일부터 4월 23일까지 데뷔 35주년 일본 전국 투어 공연을 펼친다. 관련 정보

4. 디스코그래피

정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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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LEPHANT KASHIMASHI
디 엘리펀트 카시마시
1988.3.21
THE ELEPHANT KASHIMASHI II
디 엘리펀트 카시마시 2
1988.11.21
浮世の夢
부세의 꿈[12]
1989.8.21
生活
생활
1990.9.1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05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06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07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08_main.jpg
エレファントカシマシ5
엘리펀트 카시마시 5
1992.4.8
奴隷天国
노예 천국
1993.5.21
東京の空
도쿄의 하늘
1994.5.21
ココロに花を
마음에 꽃을
1996.8.21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09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0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1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2_main.jpg
明日に向かって走れ-月夜の歌-
내일을 향해 달려라-달밤의 노래-
1997.9.10
愛と夢
사랑과 꿈
1998.12.9
good morning
굿 모닝
2000.4.26
ライフ
라이프
2002.5.2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m_01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3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4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5_main.jpg
DEAD OR ALIVE」(ミニ・アルバム)
데드 오어 얼라이브(미니 앨범)
2002.12.26
俺の道
나의 길
2003.7.16


2004.3.31

바람
2004.9.29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6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7_main01.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8_main.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19_main_s.jpg
町を見下ろす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2006.3.39
STARTING OVER
스타팅 오버
2008.1.30
昇れる太陽
떠오르는 태양
2009.4.29
悪魔のささやき~そして、心に火を灯す旅~
악마의 속삭임~그리고, 마음에 불을 지피는 여행~
2010.11.17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21_main_02.jpg 파일:external/www.elephantkashimashi.com/a_22-2015_main_02.jpg 파일:wakeup_tu_jkt.jpg
MASTERPIECE
마스터피스
2012.5.30
RAINBOW
레인보우
2015.11.18
Wake Up
웨이크 업
2018.6.6

4.1. 미야모토 히로지 솔로 디스코그래피

정규 앨범
파일:miyamoto20200304.jpg 파일:미야모토 히로지 커버앨범 2집 로망스.jpg 파일:미야모토 히로지 솔로 3집 종횡무진.jpg 파일:jacket_01.jpg
宮本、独歩
미야모토, 독보
2020.3.4
ROMANCE
로맨스[A]
2020.11.18
縦横無尽
종횡무진
2021.10.13
秋の日に
가을 날에[A]
2022.11.23

5.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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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이시모리, 토미나가에 의해 밴드가 결성됐다. 1학년 때 이들과 같은 반 친구였던 미야모토는 중학교 3학년때 합류. 타카미도리는 미야모토, 토미나가와 고등학교 동급생이었고 이 인연으로 인해 토미나가의 권유로 1986년 합류해 지금의 4인 체제가 되었다. 결성 당시 다들 기타 연주만을 할 줄 알았지만, 미야모토가 어린 시절 합창단 출신[15]이기 때문에 보컬을 맡았으며, 토미나가는 본인의 형이 기타와 베이스를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머의 길을 택했고, 타카미도리는 밴드 합류 때문에 베이스로 전향했다. 미야모토가 앨범 작업에 있어 본격적으로 기타를 사용한 시기는 1990년에 발매한 4집 <生活>이다. 때문에 4집 이전 곡들을 공연할 때 기타를 잡지 않고 마이크만 잡는다. 또한 투 기타로 연주되는 곡에서는 대체로 미야모토가 리듬기타를, 이시모리가 리드기타를 맡는 경향이 있다.

5.1. 미야모토 히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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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히로지 宮本浩次 (みやもと ひろじ) 약칭 "미야지".
1966년 6월 12일 생, 도쿄도 키타구 아카바네 단지 출신.[16] 키 170cm, 혈액형 O형.
작사, 작곡, 보컬,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담당. 데뷔 때 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곡들을 작사,작곡 해왔다.[17] 데뷔 때부터 리더로서 밴드 활동을 주도해온, '엘리펀트 카시마시'라는 밴드 자체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존재다.

5.2. 이시모리 토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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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모리 토시유키 石森敏行 (いしもり としゆき) 약칭 "이시 군".
1967년 3월 18일 생, 도쿄도 키타구 아카바네 출신. 키 174cm, 혈액형 O형.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담당. 가끔씩 공연에서 백보컬도 맡는다. 평소에 미야모토에게 짓궂은 장난을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이지만 미야모토의 가장 오래되고 친한 친구다. 중학교 입학식 때 하루만에 친해져서 그 날 하교길도 같이 갔다고 한다. 공연 세트리스트 결정도 미야모토와 이시모리 둘이서 한다.

5.3. 타카미도리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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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미도리 세이지 高緑成治 (たかみどり せいじ) 약칭 "세이 쨩".
1966년 4월 15일 생, 도쿄도 주오구 츠키시마 출신. 키 178cm, 혈액형 B형.
일렉트릭 베이스 담당. 1986년 고등학생 때 밴드에 합류해 4명의 멤버 중 가장 늦게 밴드에 합류한 멤버다. 합류 당시 미야모토가 "(밴드 합류)할거야?"라고 묻자 즉시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밴드는 소니 CBS 오디션에 합격한다. 미야모토가 작곡하지 않은 유이한 곡 중 하나의 주인으로, 1989년 출시한 앨범인 <浮世の夢>에 수록된 <GT>를 작곡했다. 염색을 하지 않아 현재 머리가 백발이다.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든 이 후 중절모나 빵모자를 즐겨 쓰고 있다. 과묵해보이는 이미지와 어울리게 단단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이미지와 달리 미야모토의 말로는 순수한 내면을 갖고 있다고.

5.4. 토미나가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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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나가 요시유키 冨永義之 (とみなが よしゆき) 약칭 "토미".
1966년 4월 14일 생, 도쿄도 키타구 아카바네 출신. 키 171cm, 혈액형 B형.
드럼 담당. 미야모토가 작곡하지 않은 유이한 곡 중 하나의 주인으로, 1988년 출시한 앨범인 <THE ELEPHANT KASHIMASHI Ⅱ>에 수록된 <土手>를 작곡했다. 베이시스트인 타카미도리를 영입한 장본인이고 학창시절 미야모토와 이시모리가 록을 처음으로 접하게 해준 사람이며, 과거 실연당한 미야모토가 한탄&상담 전화를 몇 번이고 걸었는데 이를 단 한번의 거절없이 전부 받아주기도 하는 등 밴드의 숨겨진 버팀목이다.

6. 기타



[1] 포크 록에 영향을 받은 컬리지 록, 인디에서 시작해 국민적 인기를 얻은 과정, 얼터너티브 록의 확산에 기여, 독특하면서도 감성적인 가사 등 닮은 지점이 많다.[2] 낙관적과는 조금 다른 것이, 낙관적은 모든 것을 좋게 되리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낙천적은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하더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가깝다. 에레카시의 현재 스타일은 <RAINBOW>의 수록곡 <雨の日も風の日も>에서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맑게 갠 날도, 안개가 낀 날도 걸음을 멈출 수 없어', '빛나는 나 자신을 깨달았을 뿐, 난 내가 깨달은 만큼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싶어. 나는 언젠가 상처받은 마음을 해방시키고 싶어. 나는 언제든지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 북돋우고 싶어'같은 가사를 미루어보아 '낙천적'인 성향이다.[3] 소니 뮤직 산하의 음반사.[4] 이걸 가장 능숙하게 구사하던 때 또한 도시바 시절과 유니버설 시절.[5] 미야모토가 에레카시의 모든 곡을 작사, 작곡하고 연주 지휘까지 하는 리더이기 때문에 미야모토 히로지 개인의 음악 세계 또한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6] 우리나라의 아티스트들을 예로 들면 신중현, 전인권, 김창완, 장기하 등 밴드 중심으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이 보컬로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7] 앨범 단위로, 혹은 트랙 단위로 들어봐도 보컬로서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편이다. 포니캐년 이후로 방송에서 커버곡도 상당히 많이 불렀는데, 록은 물론이고 발라드나 엔카, 심지어 여성 가수들의 곡까지 본인만의 스타일로 편곡해 부르는데 그 때마다 평가가 굉장히 좋다. 2020년 11월엔 솔로로 커버 앨범도 발매했다. 그리고 밴드의 모든 곡을 직접 작사, 작곡하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에레카시의 음악적 표현 방법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동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창법이기도 하다.[8] 방송 출연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고 그나마 음악 방송만 드물게 나가는 정도였다.[9] 음악 평론가이자 Bridge를 비롯해 음악 관련 잡지를 발매하는 Rockin' On사의 사장. 해당 인터뷰에서 진행을 맡았다.[10] 앙코르 포함, 무려 31곡을 불렀다.[11] 뮤직비디오에 차량을 타고 운전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등장 차량은 닛산 페어레이디 Z 1세대 모델이다.[12] '부세'는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단어.[A] 커버 앨범[A] [15] 1975년에 NHK 도쿄방송 아동 합창단에 입단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어린 시절(초등학교 4학년) 노래하는 미야모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솔로 데뷔 곡이라고 한다.[16] 아카바네 단지(아카바네다이)는 1962년에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도쿄 23구에서 최초로 주택 호수가 1000호를 넘긴 단지이다. 미야모토 히로지는 태어날 때부터 밴드 활동 중반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아카바네 단지에 대한 정보[17] 미야모토가 작곡하지 않은 단 두 곡이다. 자세한 건 타카미도리 세이지, 토미나가 요시유키 문단 참조.[18] 야마모토 타쿠오와는 2002년 12집 '라이프' 앨범 작업 및 투어를 계기로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카우보이 비밥의 여러 OST에서 색소폰 연주를 맡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9]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배우 생활 동안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잦았고 이 때문에 2017년에 연예계를 은퇴했다.[20] 원전 발언은 심지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진지 1년밖에 안지났는데도 저런 말을 한 것이다. 여담으로 '사이토 카즈요시'라는 미야모토와 동년배인 가수가 있다. 카즈요시는 미야모토의 언행과는 대비되게 원전 사고 이후 공연 중 자신의 노래를 즉석에서 개사해서 일본의 원자력발전소와 도쿄전력 등 전력공사들, 일본 정부의 거짓된 행보와 무능함을 비판한 바 있는데,# 카즈요시가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가 에레카시이며 방송에서 에레카시와 콜라보 공연을 한 적도 있고 에레카시의 트리뷰트 앨범에 참가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21] 이시하라 신타로가 어떤 사람인지 대해서는 항목 참조. 쉽게 말해 망언제조기에 수구꼴통이다. 2022년 사망했다.[22] 미야모토가 비행기에서 그를 우연히 만난 적도 있다. 그 때 반가워하며 앨범CD를 건네줬다고 한다.[23] 지금은 사라진 일본의 사회민주주의, 중도진보정당.[24]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꾸준히 경제 성장을 한 시기로, 1950~70년대 까지 이어졌으니 미야모토가 태어난 1966년은 경제 고도 성장기의 한 가운데라고 할 만하다. 이 경제 성장기가 지나면서 공공투자와 복지는 부실해지고 환경 파괴와 공해, 각종 질병 및 인구 분포 문제 등 사회적 부작용이 발생한다.[25] 두 대 모두 재산 사기를 당해서 처분했다.[26] 오히려 Rockin' On 잡지는 편집장 시부야 요이치를 중심으로 에레카시가 데뷔할 때부터 크게 주목하며 고평가했고 지금또한 그렇다. 그리고 에레카시가 EPIC레코드에서 계약 해지를 당할 때 Rockin' On 측에서 직접 소속사 사무실(현재 '페이스 뮤직 엔터테인먼트')을 따로 차려서 밴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직접 나서서 도와줬다. 에레카시가 Rockin' On에 빌붙은 게 아니라, 반대로 Rockin' On이 먼저 에레카시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것이다. 그러니 애당초 미야모토가 굳이 그런 짓을 할 이유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