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바 공국 Principato d'Elba | ||
국기 | 국장 | |
1814년 ~ 1815년 | ||
위치 | 엘바 | |
수도 | 포르토페라이오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공작 | |
주요 공작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
언어 | 이탈리아어 | |
통화 | 토스카나 리라 | |
성립이전 | 프랑스 제1제국 | |
멸망이후 | 토스카나 대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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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종전 이후 퐁텐블로 조약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엘바 섬으로의 유배가 결정되자 세워진 국가.2. 역사
퐁텐블로 조약 당시 전쟁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의 유배지 선정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갔다.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 섬[1]이나 영국령인 세인트 헬레나, 독립한 지 얼마 안 됐었던 미국[2], 포르투갈령의 아소르스 제도, 그리고 토스카나와 가까운 엘바 섬이 거론되었는데 이 중 러시아 제국이 생떼를 부리면서까지 엘바 섬을 강력히 주장해(...) 나폴레옹의 유배지는 엘바 섬으로 결정되었다.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은 그나마 전직 황제에 대한 예우로서 엘바의 공작 자리를 얻게 되나 유일한 적장자인 나폴레옹 2세에게 세습이 불가능했으며 나폴레옹이 사망할 시 엘바는 그대로 토스카나 대공국에 합병될 예정이였다.[3]엘바 공국의 공작으로 취임한 나폴레옹은 여기서도 영주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철광석 광산을 개발하면서 도로를 설치하고 교육 시스템을 점검하고 농업과 관련된 법령까지 선포했다. 하지만 엘바 섬의 주민들은 이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일단 엘바 섬 사람들 자체가 처음부터 나폴레옹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을 뿐더러 앞서 말한 광산 개발과 도로 공사에 주민들을 혹사시켰기 때문(...). 그 때문에 엘바 섬 주민들은 나폴레옹에게 내는 세금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퐁텐블로 조약에서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가 주기로 한 200만 프랑의 연금이 거절당하고 기병대 증강에 많은 돈을 써서 돈이 부족해 예민한 상태였던 나폴레옹은 기병대를 보내 주민들의 세금을 강제로 걷기까지 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해서 세력을 키운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엘바 섬을 떠나 백일천하를 일으킨다. 이에 엘바 공국은 공작이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워털루 전투 이후 빈 회의의 결과에 따라 엘바 섬의 통치권은 토스카나 대공국에 이양되면서 멸망한다.
3. 군사
엘바 공국 해군기 |
나폴레옹은 퐁탠블로 조약에 따라 고참 근위대 870명을 데려왔는데,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해군을 양성해 66명의 수병과 1척의 배를 소유했다고 한다. 이 군대들은 훗날 백일천하 시작 당시 파리로 북진하는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되었다.
4. 관련 문서
[1] 코르시카 섬은 잠깐 논의가 오고 바로 반려되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로 돌아가면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가 강한 코르시카 주민들을 선동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고 섬 자체가 그렇게 작은 섬도 아니기 때문이다. 코르시카 섬이 엘바 섬의 39배 면적이다.[2] 거기다 이 무렵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자마자 유럽의 일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한 건 세계대전부터다.[3] 당시 토스카나 대공은 나폴레옹의 장인이자 적인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의 동생 페르디난도 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