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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18:12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도난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external/www.heritagechannel.tv/story_1109_1.jpg
1. 개요2. 상세3. 사건 이후

1. 개요

1967년 10월 24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문화재 도난 사건. 도난당한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은 다행히 다시 되찾았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

2. 상세

1964년 국보 제119호로 지정된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은 문화재 애호기간 특별전시를 위해 덕수궁 박물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옮겨져 2층 제3관에서 전시 중이었다. 그런데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40분경 순찰 중 경비담당자가 입상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어 경찰에 신고했다.

원래는 10월 23일 전시를 마치고 덕수궁 박물관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다음날인 국제연합일(UN창설일)이 공휴일[1]이었기 때문에 10월 24일 하루 더 전시하고 돌아가기로 했던 참이었다.

불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범인이 푸른색 볼펜으로 쪽지를 써서 남겼는데 "국장님[2]께 직접 알려라. 세계 신기록을 위해 24시간 안으로 돌려주겠다. 타인에게 알리는 약은 수작을 부리면 죽은 아이 귀 만지기격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발칵 뒤집힌 경찰은 필적의 감정을 의뢰하고 입상을 전국에 지명수배했지만 어떤 단서도 없이 사건 수사에 진척이 없는 채로 시간만 흘러갔다. 범인은 오전 11시, 오후 3시, 오후 6시에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훔쳤다고 말하는가 하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앞의 태궁이라는 다방"생활이 어려워서 일시적으로 저질렀다. 곧 돌려주겠다."라는 쪽지를 남겼다.

오후 11시 5분경 범인은 다시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금불상을 훔친 범인이다. 금인줄 알고 훔쳤는데 금도 아니고, 귀중한 물건이란 걸 신문이나 뉴스에서 알게 돼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알려주겠다. 한강철교 제3교각 16번,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에 숨겨두었으니 와서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문화재관리국장은 당장 기사와 부인을 깨워서 범인이 말한 장소를 찾아 20분여간 그곳을 뒤진 끝에 마침내 입상을 찾아내 국립중앙박물관 귀금속실로 옮겨 엄중히 보호했다.

경찰은 범인이 단순히 입상을 돈을 위해서 훔친 게 아니라 뭔가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집중했으며 범인이 전시장인 덕수궁 미술관의 구조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일 거라고 보고 관련자들을 심문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뒤 1974년 10월 24일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수사 당시 한 경찰국장은 "쇠붙이 하나 없어진 거 가지고 왜 그리 난리들이냐"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사건 이후

당시 범죄전문가는 추리소설을 많이 본 젊은이가 입상을 훔쳐서 떠들썩한 사건을 만들고 사회를 조롱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문화재 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건 목소리로 미루어 30대 정도의 젊은이[3]일 거라는 추정 외에는 범인에 대해 밝혀진 것도 없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은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뒤의 광배가 앞으로 심하게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건 당시 훼손이 심해서 그렇게 되었으며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메가스터디 사회탐구 강사 이다지가 삼국 문화파트 강의에서 이 사건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다지 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전시회는 하루 입장객 수가 100명으로 제한된 전시회였으며 고구려 불상 자체가 너무 귀한 터라[4] 국내 및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불상이 도난당한 날 경비원은 단 4명뿐이었으며 9시 40분경에 정전이 한 번 되었고 이후 경비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불상이 도난되었으며 이후 범인은 쪽지로 20만원이라는 거액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5] 이다지 강사는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은 높이가 16c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옷소매가 펑퍼짐한 옷을 입으면 옷소매에 숨겨 훔쳐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6]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국보급 미술품을 설령 훔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누가 그걸 사겠냐 하겠지만 이러한 도난 미술품의 고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마피아, 마약 카르텔 같은 거대 범죄 조직의 보스가 고객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이를 매입하는 이유는 그들의 심미적 취항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나중에 법망에 걸려들 경우 이러한 미술품을 인질로 삼아 사법 거래를 하는 용도로 쓰기 위해서라고 한다.

[1] 당시엔 공휴일이었지만 1976년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2] 당시 한국 문화재 행정 최고책임자는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장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은 1999년 문화재청으로 승격되었다.[3] 2020년대 기준으로는 30대는 충분히 젊은이로 불릴 만하지만 1960년대 당시의 평균 수명이나 영양학적 체질을 고려하면 그때의 30대라면 2020년대 기준으로 40대 초중반에 해당된다.[4]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에서도 희소하다.[5] 현재 가치 약 8000만-1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불상을 발견한 사람이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이 딱 20만원이었다.[6] 당시는 10월 하순으로 계절적으로 겨울에 접어드는 시기였기 때문에 롱코트를 입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