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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8:22:30

옘마 골드만

<colbgcolor=#000><colcolor=#fff> 옘마 골드만
Emma Goldman
파일:엠마 골드만.jpg
출생 1869년 6월 27일[1]
러시아 제국 코브노[2]
사망 1940년 5월 14일 (향년 70세)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혁명가, 사회운동가
성향 아나키즘, 페미니즘
종교 무종교 (무신론)
서명 파일:옘마 골드만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여담4. 연관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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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가, 사회운동가.

"If I can't dance, I don't want to be part of your revolution."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런 혁명에는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발언으로, 그 뜻은 혁명이 타인이나 사회적 약자, 그리고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압제라는 것. 실제로 민족 해방 등의 기치를 내걸고 이루어진 수많은 혁명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수는 정작 정권을 잡고 나서는 극단적 민족주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온건파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코뱅 집권 후의 프랑스나, 이란 혁명, 그리고 튀니지 혁명 이후의 아랍 국가들의 현 상황을 보면 지금도 의미심장함을 주는 명언. 이 발언은 68운동의 중대한 슬로건이 되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상층에도 말을 건네는 겁니다. 그들은 노동자들보다도 더 계몽이 필요해요. 삶은 대중을 매섭게 가르치지만, 불행히도 사회적으로 선택되어 교육받았고, 또 스스로 우수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2. 생애

옘마 골드만은 유대인 3세로 1869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 다니다가 188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녀는 미국 봉제공장에서 다양한 국적의 이민노동자들과 일하면서, 노동자로서의 현실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1887년 헤이마켓 사건으로 노동운동가들이 처형됐다. 분개한 그녀는 전투적 아나키스트로서 19세기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이 때 골드만은 자신의 평생 동지가 되어 줄 알렉산더 버크만을 만났다. 1893년 10월 소요 선동죄로 재판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뉴욕에 수감됐고 수형 생활 중 많은 책을 읽어 소양을 넓힌다. 그녀는 굉장한 책벌레였다. 공장에서 일할 때도 자신이 번 돈으로 꼭 책을 샀고, 경찰에게 붙잡혀 갈 때도 책을 가져가기 위해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감옥 내 병원 일을 도왔다. 출감한 후에는 간호사 일을 배웠고, 여전히 재봉 일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혁명적 노동운동가들과의 만남을 계속 가졌다.

골드만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어머니 대지(Mother Earth)》를 발행하고, 미국 각지로 강연을 다니며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했다. 또 여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여 산아제한과 자유연애를 주장하기도 하였다.[3] 1910년대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맞서 반전주의 운동을 활기차게 벌였다. 그녀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에 참전하면 안된다며,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였고 더불어 징집도 반대했다. 이 일로 1917에는 2년 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반전 운동을 계속 했고, 경찰과 정보기관의 눈 밖에 나 1919년 추방당하고 만다.[4]

추방당한 골드만은 자신의 조국이자 내전을 겪던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차르의 전제정치를 반대함과 동시에 볼셰비키의 권력 독점도 비판했기에, 곧 소련에 불만을 느꼈다. 볼셰비키 정권 아래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투옥되었다. 골드만은 러시아에 와서 감옥에 갇힌 아나키스트들을 만났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버크만이 좀 더 볼셰비키 정권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두 명은 최대한 러시아에서 버텼지만,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으로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의 씨가 마르자 결국 2년 만인 1921년 그녀는 소련을 떠났다.[ 이후 1923년 <러시아에 대한 나의 환멸>이라는 책으로 러시아의 볼셰비키를 비판했다.

러시아를 떠난 후 골드만은 아나키즘 운동을 지원하는 데 매진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계속 했고, 자신의 자서전도 출판했다.[5]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0년 캐나다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떴다.

3. 여담

4. 연관 기록물



[1] 율리우스력 기준으론 6월 15일.[2]카우나스.[3] 골드만은 《반란자 여성(Women Rebel)》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산아제한을 담당하는 병원을 개원했다. 물론 경찰에 의해 와장창 엎어졌지만.[4] 검찰의 보고에는 그녀를 "무서운 설득력을 가진 위험한 인물"이라고 써 놓았고, 존 에드거 후버가 골드만의 추방을 검토했다.[5] 심지어 자신을 추방한 나라인 미국에서도 강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