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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5:22:11

오성옥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오성옥
吳成玉|Oh Seongok
파일:오성옥감독.jpg
출생 1972년 10월 10일 ([age(1972-10-10)]세)
대전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전삼성초등학교 (졸업)
동방여자중학교 (졸업)
동방여자고등학교[1] (졸업)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 (체육학 / 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2]
직업 핸드볼 선수 (센터백 / 은퇴),
핸드볼 감독
교수
현직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2024. 9~)[3]
소속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선수 종근당[4] (1995~1999)
히로시마 메이플레이즈 (1999~2004)
히포 니더외스터라이히[5] (2004~2010)
히로시마 메이플레이즈 (2010~2011)
지도자 히포 니더외스터라이히 (2008~2010 / 플레잉 코치)
히로시마 메이플레이즈 (2011~2015)
대한민국 청소년 여자대표팀 (2016~2022?)
SK 슈가글라이더즈 (2021~2022)
해설 위원 KBS (2016)
MBC (2024)
신체 171cm, 65kg
가족 배우자, 슬하 1남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해설 위원 경력5. 수상 기록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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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핸드볼 선수 출신 감독.

올림픽에 5번 연속 출전했으며 대한민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라는 위업을 달성하는데 공헌했다.[6] 현역시절 포지션은 센터백으로, 한 해 선배인 임오경과 함께 경기를 조율하고 직접 골을 성공시키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빠른 슈팅력, 돌파력, 실수가 거의 없는 볼에 대한 센스, 센터 백으로써의 경기 운영 능력은 물론, 지거나 이기고 있을 때에도 침착하게 풀어나가는 멘탈을 가지고 있어서 스타 플레이어가 많았던 같은 세대 여자핸드볼 선수중에서도 단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천재형 핸드볼 선수로 불렸다. 대중들에게는 7미터 페널티 드로를 담당했던 카리스마 넘치던 1년 선배 임오경보다 덜 알려졌지만 결코 뒤지지 않는 핸드볼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2.1. 1990년~1994년

파일:오성옥리즈시절.jpg
파일:1992barcelonafinal1.jpg
중학교 시절부터 차기 국가대표 에이스급으로 이름을 날렸다. 동방여자고등학교 재학중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우승했다. 한국체육대학교 2학년 때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여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당시 금메달을 놓고 벌인 노르웨이와의 결승전은 의외로 쉽게 승리했는데, 독일과 준결승에서 26대 25로 승리한 경기가 명승부로 남아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2.2. 1995년~2000년

1995년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자핸드볼 실업팀인 종근당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팀 훈련이 너무 힘들었고 이미 올림픽 우승을 달성해서 다시 올림픽 출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나, 코치진의 설득 끝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해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파일:애틀란타오성옥.jpg
한국 여자 핸드볼의 덴마크와의 올림픽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2012 런던 올림픽 이전까지 이어졌다.[7][8][9] 덴마크와의 결승전 경기 내내 한국이 리드를 하다가 후반 10분을 남기고 29대 29에서 동점을 허용하고 재연장전을 실시해서 37대 33으로 아쉽게 패했다. 결승전은 8월 5일에 치러졌는데 시상식이 끝나고 오성옥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은메달이라는 성적도 대단한 것이지만 접전 끝에 금메달을 놓친 한국 여자 대표팀은 오성옥 선수 가족의 비보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려 눈물 바다가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은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경기 최종 종료 전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대표팀은 물론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고 휴식기를 가지기도 했으나 곧 복귀했다.

1999년 일본 히로시마 메이플레이즈에 진출해 있던 임오경의 권유로 일본리그에 진출했다. 이때 임오경과의 맹활약으로 꼴찌였던 팀의 7회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하고 5회 연속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4년 전 올림픽에서 만났던 덴마크를 준결승에서 다시 만났으나 31대 29로 패배하면서 여자 핸드볼의 올림픽 덴마크와의 악연이 이어졌다. 이후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노르웨이를 만나서 21대 22로 패하면서 대한민국 여자핸드볼이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 이후부터 이어오던 메달 획득에 실패했으나 국내의 열악한 지원과 선수 층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16년 연속 4강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올림픽에서의 활약 덕분에 오성옥은 대회 BEST 7에 선정되었다.

2.3. 2004 아테네 올림픽

파일:아테네오성옥.jpg
32세의 나이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당시 올림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인데,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소집부터 올림픽 결승전까지 극적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실제 경기나 한국 대표팀의 상황은 영화와 비교가 안 될만큼 극적이었다.[10]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한 대표팀은 소집 과정에서부터 난관이었는데 한국의 노련한 선수들이 대거 은퇴한 상황이었고 국내 선수들의 경험부족으로 올림픽에서 활약할 선수를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대표팀을 맡은 임영철 감독의 설득으로 임오경, 오성옥, 우선희 등의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했다.
결승전에서 또 덴마크를 만났고 전후반전, 재연장의 접전 동안 34대 3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축구의 승부차기에 해당하는 승부던지기에서 2대 4로 패했다. 핸드볼은 심판 판정이 경기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는데 당시 경기에서 심판은 경기 2분을 남기고 2점 차이로 리드하던 한국팀의 수비 상황에서 덴마크의 분명한 터치 아웃에도 불구하고 공격권을 다시 덴마크에게 줬고 이후 덴마크가 골을 따라잡으면서 연장전까지 가게 되었다. 노장 선수들로 구성된 한국팀은 연장전까지도 잘 버텼으나 이후의 승부 던지기에서 패했고 라커룸에서 모두 펑펑 울다가 누군가 ``야 그래도 은메달이야``하고 소리를 질러 울음을 그쳤다.

오성옥은 이 당시에는 노장 취급을 받던 32세였으나, 올림픽 맹활약을 눈여겨 본 오스트리아 여자핸드볼 명문 히포 니더외스터라이히와 2004년부터 계약하면서 여자 핸드볼 필드 플레이어로써 최초로 유럽 리그 진출을 달성했다.[11]

2.4. 2008 베이징 올림픽

파일:핸드볼베이징.jpg
36세의 나이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신인들로만 멤버를 구성하면 또 다시 올림픽 메달 획득이 힘들어 질것으로 예상한 국가대표팀의 임영철 감독이 오스트리아까지 찾아가서 오성옥이 합류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여자 핸드볼 올림픽 대표팀은 20여 명의 예비 선수를 선발해서 훈련 과정 평가 등을 통해 최종 15명을 선발했다. 이때 오영란, 허순영 등이 함께 우생순 멤버로 최종까지 남게 되었다. 당시 오성옥과 대표팀의 막내였던 김온아와의 나이 차이는 16세였다. 그러나 오성옥, 허순영, 오영란 선수들은 후배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열외 없이 더욱 열심히 훈련에 참가했다.

준결승에서 만난 노르웨이에게 28대 29로 패배했다. 경기 종료 5초 전까지 28대 28 동점 상황이었으나 노르웨이가 종료 버저비터 직전에 던진 공이 종료 이후 골라인으로 통과되는 것을 비디오로도 확인[12] 되었으나 심판은 노르웨이의 승리를 선언했다. 한국은 국제핸드볼연맹에 경기종료 2시간 이내에 제소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헝가리와 동메달 결정전을 치렀다.

그러나 오성옥은 노르웨이와의 준결승전 이후 탈진해 버리면서 링거를 맞았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경기 중반까지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오성옥의 포지션에 교체되어 들어온 김온아의 맹활약으로 33대 28로 대승하며 동메달을 따냈다. 오성옥은 함께 뛰어준 어린 선수들에게 너무 고마워 큰 절을 하고 싶고, 4년전 은메달을 땄을 때보다 이 동메달이 더 기쁘고 소중하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국제핸드볼연맹이 선정한 올림픽 여자핸드볼 베스트 7 플레이어에 선정되었다.

3. 지도자 경력

파일:청소년대표팀감독오성옥.jpg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오스트리아 히포 니더외스터라이히의 플레잉코치로 뛰었으며, 이후 히로시마 메이플레이즈에서 1년 간 선수로 활약하다가, 선수로서는 완전히 은퇴했다. 이후 같은 팀에서 2015년까지 감독으로 일했다.

2016년부터 한동안 대한민국 청소년 여자 핸드볼 대표팀 감독직을 맡았다. 청소년 대표팀 최초의 전임 감독으로 취임 첫해에 청소년 세계선수권에서 대표팀을 동메달을 획득하도록 이끌었고, 2017년 청소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2018 청소년 세계선수권 동메달이라는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13] 2021년 3월 SK 슈가글라이더즈 여자 핸드볼 감독직을 수락했다.

2022년 일신상의 이유로 SK 슈가글라이더즈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수행하기로 예정되었으나 해당 학교에서 임용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돌연 임용을 취소하며 법적 대응까지 이루어졌으나, 최종적으로 2024년 9월 임용되었다.

4. 해설 위원 경력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KBS 해설 위원을 맡았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MBC 해설위원을 맡는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단체전
은메달 1996 애틀랜타 단체전
은메달 2004 아테네 단체전
동메달 2008 베이징 단체전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 부다페스트 단체전
동메달 2003 자그레브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단체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1 히로시마 단체전
금메달 1993 산터우 단체전
금메달 1995 서울 단체전
금메달 1997 암만 단체전

6. 기타



[1] 現 동방고등학교[2] 석사 학위 논문: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기법을 활용한 여자 핸드볼 경기 분석 기록에 따른 팀 예측(2021. 8)[3] #[4] 종근당 여자 핸드볼단[5] 오스트리아 소재[6] 오성옥 이전 여자 핸드볼은 올림픽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한 적이 있었다.[7] 2012 런던 올림픽 조별 리그에서 덴마크에 승리하면서 한국 선수들은 우승이라도 한 듯이 기뻐했다.[8] 당시 결승에서 만난 덴마크와의 경기는 올림픽 명승부이자 여자핸드볼 역대급 PTSD를 가져오는 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9] 이후 올림픽에서 이어진다.[10] 실제로 여자핸드볼 결승전은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선정한 올림픽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11] 히포 니더외스터라이히는 1989년부터 2000년 까지 8회의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이 있는 강팀이다.[12] 핸드볼 규칙상 경기 종료 후 골라인 통과된 공은 무효이다.[13] 이때 동갑내기 오영란이 국가대표로 8년만에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