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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필

오재필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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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등번호 8번
조효상
(1999~2003.4.18.)
오승택
(2005)
조윤채
(2006)
한화 이글스 등번호 61번
유혜정
(2005)
오승택
(2006)
김주
(2008~2010)
한화 이글스 등번호 36번
신민기
(2003~2005)
오승택
(2007)
김동영
(2008~2010)
한화 이글스 등번호 8번
서정
(2007)
오승택
(2008)
윤재국
(2009~2009.7.7.)
한화 이글스 등번호 2번
서정
(2009~2010)
오재필
(2011~2012)
박노민
(2013~2016)
한화 이글스 등번호 8번
정원석
(2010~2012)
오재필
(2013)
정근우
(201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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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필
吳梓馝 | Oh Jaepil
[1]
출생 1982년 6월 7일 ([age(1982-06-07)]세)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 한양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2001년 2차 12라운드 (전체 93번, 한화)
소속팀 한화 이글스 (2005~2013)
응원가 현숙 - 정말로[2][3]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한화 이글스 시절
3. 은퇴 이후4. 연도별 성적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화 이글스 소속의 외야수. 현재 SSG 랜더스 소속으로 뛰고 있는 오태곤 선수의 개명 전 이름인 오승택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었다. 하지만 둘 다 개명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고교 시절, 천안북일고에는 4번타자 김태균이 있었다면 공주고에는 4번타자 오재필이 있었다는 식으로 나름대로 라이벌 관계였다고는 하지만 공주고북일고에 비해 그다지 네임드 있는 학교가 아니라서 철저히 묻혀졌고, 2001년 신인 지명에서도 김태균이 1차 지명을 받은 반면, 오재필은 제일 말번인 2차 12순위 지명을 받고 프로가 아닌 대학을 선택해야 했다.

지명을 받았지만 너무 후순위였고, 오재필은 한양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2.2. 한화 이글스 시절

입단 후 차세대 외야수로 주목받았으나 당시 감독이 항상 베테랑만 선호하는 그 분이셨던데다 전신마취 7회라는 부상의 늪에 빠지는 바람에 거의 기회를 받지 못했다.[4]

2006년 7월 14일 홈에서 열린 SK와의 경기에 5:0으로 이기고 있던 9회 초 좌익수로 대수비 출전하면서 1군 무대 데뷔를 했고, 다음 날에 9:8로 지고 있는 와중[5]에 9회 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 데이비스의 대타로 1군 무대 첫 타석에 들어서 SK의 마무리 호세 카브레라를 상대했지만 2루수 뜬공으로 물러났었다.

이후 7월 19일 수원에서 열린 현대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파격적으로 선발 좌익수 1번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1회 초에 2루수 땅볼, 3회 초에 3루수 땅볼, 5회 초에 2루수 뜬공으로 물러난 후 연경흠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이후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된 이후 2006시즌은 더 이상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수술과 재활을 반복한 끝에 2008년에는 주로 백업 요원에 그쳤지만, 50경기라는 기회를 받긴 했다. 개막 이후 한 달 동안 규정타석은 미달이었으나 3할 타율을 올리는 활약도 보였다가, 이후에는 다소 오락가락하면서 시즌 최종 0.228을 기록했다.[6]

여하튼 기대만큼의 활약은 하지 못한 채 2008시즌을 마친 후 공익근무로 병역을 마친후, 2011시즌에 복귀하였다. 정현석이 병역을 위해 경찰 야구단으로 떠났고, 강동우가 수비에서의 노쇠화가 심해지고 // 삼인방이 모두 좌타라 우타 외야가 심각히 부족했던 한화 이글스의 사정과 부합하여 야왕님에게 많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1군에서의 적응 실패(?)로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2군행[7][8], 2군에서 4할 언저리를 오가며 대활약하면서 감독에게 시위하고 계신다?[9]

코너뿐만 아니라 중견수도 가능하며 수비에서도 다른 한화 이글스 외야수들에 비하면 매우 준수한 편이고 타격 능력도 출중하기에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고 본인이 1군에서 적응만 잘한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는 선수로 보이긴 한다. 스윙 궤적도 좋고 자기 스윙 가져가는 것도 수준급이라고 하나, 역시나 선구안이 문제로서 BB/K가 극악의 수준이다. 팀 내 김회성이나 LG 시절의 박병호 등과 같이 2군 리그는 평정하면서도 정작 1군에서는 죽쑤는 예라 하겠다.

2011년 5월 21일 KIA전에서 시즌 첫 홈런을 쳤다.

2011년 9월 확대 엔트리로 1군에 돌아와서 9월 10일 SK전에서는 3안타 3타점으로 혼자 야구하면서 수훈선수로 선정되었고, 9월 13일 KIA전에서는 윤석민에게서 3타점 3루타를 뽑아내기도 하며 분노의 대활약 중이다.

2011년 10월 1일 넥센전에서는 시즌 두 번째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장식. 점수는 6:5에서 순식간에 10:5가 되었다. 비록 경기는 내용면에서 누가누가 못하나의 대결이었지만 승리하여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다.

2011시즌 최종 슬래시라인은 54경기에 출전하여 0.221/0.295/0.349를 기록하면서 2홈런 14타점 8도루를 해냈다. sWAR 기준 0.21으로 백업선수의 몫을 잘 해낸 편이었다. 팀도 무려 공동 6위를 해내면서 야왕 신드롬의 조연으로는 적절한 활약을 했었다.

2012시즌에도 백업 요원으로 46경기에 출전하여 슬래시라인 0.214/0.313/0.271을 기록하면서 1홈런 5타점 6도루를 해냈다. sWAR도 0.24로 작년에 이어 백업으로써는 무난한 활약을 했다.

2013년 6월 27일 부로 강철민과 함께 한화에서 방출되어,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잔부상이 결국 선수 생활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다르게 한화 구단에서는 선수 생활을 지속할 것을 권했으나, 본인 스스로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비록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은퇴를 선언하고 팀에서 나왔지만, 잦은 부상은 그에게서 선수 생활의 의지를 빼앗아 버렸다. 결국 충분한 포텐을 가지고 있었지만 늘 주저앉아야 했던 비운의 선수로 남았다.

3. 은퇴 이후

현역 은퇴를 선언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고, 그 때 몇몇 에이전트들을 보면서 자신의 관심 분야 중 하나였던 에이전트 업무에 뛰어들기로 한 상태. "RA 매니지먼트"라는 에이전시를 차렸다고 한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2005 한화 1군 기록 없음
2006 3 .000 0 0 0 0 0 0 0 0 0 0 .000 .000
2007 1군 기록 없음
2008 50 .228 13 2 0 0 2 8 1 2 1 23 .267 .263
2009 군복무(공익근무요원)
2010
2011 54 .221 19 3 1 2 14 14 8 6 3 36 .295 .349
2012 46 .214 15 1 0 1 5 10 6 9 1 26 .313 .271
2013 9 .125 2 0 0 0 0 0 0 0 1 10 .177 .125
KBO 통산
(8시즌)
162 .210 49 6 1 3 21 32 15 17 6 95 .281 .283

5. 관련 문서


[1] 개명 전 이름은 오승택(吳承澤)[2] 날려라 날려버려 오재필~ 날려라 날려버려 오재필~ 최강 한화 이글스의 승리위해~ 날려라 날려버려 오재필~ 안타!홈런! 최강한화 이글스의 오재필~[3] 오재필이 은퇴를 한 뒤 엄태용이 물려받았다. 키움의 허정협 응원가의 원곡이기도 하다.[4] 일단 2005년 한화에 입단 하자마자 팔꿈치 수술부터 받고 재활한 이후, 후반기에 2군 경기에 출전하다가 외야수비 도중 타구에 공을 맞아 얼굴 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2006년에 잠깐 1군 무대에 데뷔도 했었지만 곧 부상의 악령으로 인해 다음 해까지도 수술과 재활이 반복되는 시간을 보냈었다.[5] 7회 말까지 한화가 SK에게 4:8로 이기고 있다가 8회 초에 안영명, 권준헌이 불쇼를 거하게 지르는 바람에 대거 5점이나 주면서 대역전패를 당해버렸다.[6] 다만 sWAR 기준으로 -0.29인데 이는 사사구 3개 얻는 동안 삼진을 23개나 당한 것과 대타로 나오면서 득점권에서 유독 침묵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7] 당시 군 복무 중이던 정현석의 빈자리를 채울 좌투용 스페셜리스트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좌투수 상대로 15타수 1안타. 6푼 7리[8] 경쟁자인 이양기의 성적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52타수 12안타 .231로 나름(?) 괜찮은 셈.[9] 사실 그 전부터 타격능력은 알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