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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8:44:07

오현주(1892)

<colbgcolor=#000><colcolor=#fff> 오현주
鮮于筍
파일:오현주.png
출생 1892년 2월 29일
충청도 공주군
(現 충청남도 공주시)
사망 1989년 (향년 97세)
본관 해주 오씨
가족 오빠 오긍선, 언니 오현관
배우자 강낙원
학력 정신여학교 (졸업)
경력 혈성부인회 회장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1. 개요2. 생애
2.1. 친일 행적
3.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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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교사, 친일반민족행위자. 과거에는 독립운동가였으나 훗날 김마리아를 포함해 자신의 동지들을 밀고한 배신자이다.

2. 생애

1892년 2월 29일 충청도 공주군(現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교육을 받다가 여성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군산 멜볼딘여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당시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은 수감자들의 옥바라지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는데 오현주는 4월 언니 오현관, 같은 정신여학교 출신인 이정숙, 장선희과 같이 '혈성부인회'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그녀들은 돈을 모아 수감자들도 돕고 외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활동들을 전개했다.

그 후 규모가 커지면서 오현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임득산과 만나기도 하였으며 이후 최숙자 등의 인물들과 협력하여 만들게 된 비밀결사 조직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이다. 그녀는 단체 내에서 회장 겸 재무주임을 지냈으며, 전국에 지부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는 김마리아, 이정숙, 장선희, 황애시덕, 백신영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오현주도 그녀들 중에 한명이였다.

2.1. 친일 행적

파일:오현주의 다른 모습.png
1942년 안동교회 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5번째로 있는 사람이 오현주다.
만주에서 귀국한 체육계 친일 인사이자 오현주의 남편 강낙원은 그녀에게 "조선은 독립하지 못한다. 큰 화를 입기 전에 조직에서 발을 빼라."라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1919년 오현주는 결국 이 말에 순응하여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정보와 같이 활동하였던 동지들을 전부 밀고해버린다. 이때 체포된 동지들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반면에 오현주는 단 하룻밤만을 유치장에서 지내다가 바로 풀려났다.

그리고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집에서 5개월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지냈고 3천원 가량의 돈을 받았다. 오현주, 강낙원 부부는 동지를 팔아받은 이 거액의 돈을 갖고 크고 넓은 새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3.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자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다.", "남편이 데려온 유근수가 경찰인 줄 모르고 발설을 했다."라는 식의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출소 이후 천수를 누리고 1989년 향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남편 강낙원과 함께 2002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밀정 부문에 수록되었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정보가 부족하여 수록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오빠인 오긍선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