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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06 16:29:28

요안니스 콤니노스

Ἰωάννης Κομνηνός

1. 알렉시오스 1세의 아버지
1.1. 가족
2. 요안니스 2세3. 알렉시오스 1세의 조카4.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지스

1. 알렉시오스 1세의 아버지

(1015년 – 1067년)

콤니노스 왕조와 이후 모든 동로마 황제들의 직계 선조이다. 황제 이사키오스 1세의 동생이자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아버지이며 황제 로마노스 4세의 사돈이지만, 정작 본인은 황제가 아닌 인물(...)

1015년 바실리오스 2세의 충신이었던 마누일 이로티코스 콤니노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 후일 황제가 되는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있었고, 누이가 한 명 있었다. 아버지 마누일은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초기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 진압에 공헌하여 파플라고니아 카스타모누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영지를 하사받아 새로운 군인 명문가를 개창한 인물이었다.[1]

요안니스와 그의 형제자매가 아직 어렸을 적, 아버지 마누일이 사망하였다. 당시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아버지 없이 남겨진 요안니스 형제를 불쌍히 여겨 직접 형제를 피후견인으로 삼고 스투디온 수도원에 입적시키고 길렀다. 이는 형제들에게 엄청난 정치적 후광을 제공해주었다.

그 이후부터 형 이사키오스의 쿠데타 이전까지 요안니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2]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요안니스가 명문 군벌 출신의 안나 달라시니와 결혼했다는 것과 이사키오스의 쿠데타 시점에서 둑스(Doux) 작위를 갖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이사키오스의 쿠데타 이후에는 형으로부터 고위 품계 쿠로팔라티스(Kouropalates)를 제수받고, 서부군 총지휘관(Domestikos ton scholon)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사키오스 1세가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와의 마찰로 퇴위를 결심했을 때, 요안니스는 형으로부터 제위를 양위받을 것을 제안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내인 안나 달라시니가 요안니스에게 제위를 승계하라고 애원했지만 요안니스는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제위는 이사키오스의 친구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에게 넘어간다. 양위를 거부한 요안니스는 요안니키오스라는 수도명으로 그가 어릴 적 자란 스투디온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로서 1067년 7월 12일 생을 마감하였다.

1.1. 가족

안나 달라시니와 결혼한 요안니스 콤니노스 사이에선 8명의 자식이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이름을 알리고 있다.

2. 요안니스 2세

1의 인물의 손자. 항목 참조.

3. 알렉시오스 1세의 조카

(1073년? - 1136년?)

알렉시오스 1세의 둘째형이자 제국의 2인자인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crator)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알라니아의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20여세가 되는 1092년, 명장 요안니스 두카스의 뒤를 이어 제국 서부의 요충지 디라히온의 둑스(Doux)로 임명받아 1차 십자군 등의 위기를 잘 넘기고 1106년까지 진수했다. 후임은 그의 동생 알렉시오스이다.

4.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지스

(1132년? - 1182년)

2의 인물의 외손자. 테오도로스 바타지스와 요안니스 2세의 사녀인 에브도키아 콤니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그의 동생 안드로니코스와 같이 군문에 들어 1170년 즈음에는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나 동생 안드로니코스는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가 벌어졌던 동방 원정에 종군하여 별동대를 이끌다 전사했다.

그가 명성을 날리게 된 계기는 이듬해인 1177년의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이다. 황제의 외조카이자 신임받던 지휘관인 요안니스는 룸 술탄국이 침공해오자 황제의 명을 따라 정예병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는데, 여기서 요안니스는 매복계로 룸 술탄국 군대를 대파하였다.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국경을 넘은 요안니스는 보복의 의미로 초토화 작전까지 시행했고, 이 성공으로 인해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로마 제국 측에 잠시 불리했던 아나톨리아 전선의 전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누일 1세 사후에는 제국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직에 올라있었는데,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정권의 실세로 오를 무렵 독재자 기질을 보이는 그와 대립하여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최전방 트라키시온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재가 뛰어났던 그답게 병중에도 관구군을 비롯한 휘하 병력을 지휘하여 안드로니코스 라파르디스(Andronikos Lapardes)가 이끄는 진압군을 필라델피아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병중에 무리했던 탓인지 곧 병사했는데, 정작 안드로니코스는 이 패배를 국난 타개를 위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포장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1] 동부군 총사령관으로서 혈전 끝에 니케아를 수성하였다. 니케아 성벽에는 십자군 사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무릎 꿇은 타워'라고 불리는 타워가 있는데, 이는 타워가 마누일의 수성 중 송두리채 잘려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혈전이었다는 뜻. - Alexiad 11권[2] 손녀 안나 콤니니가 작성한 알렉시아스에서도 고작 3번 언급되는 게 전부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