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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카스타모누 성채
1. 개요
Kastamonu튀르키예 중북부의 도시. 카라뷔크 (사프란볼루)에서 동쪽으로 80km, 초룸에서 서북쪽으로 95km, 시노프에서 서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자리한다. 인구는 약 10만명으로, 카스타모누 도의 주도이다. 동로마 제국 황실인 콤니노스 왕조의 세력 기반이던 곳으로, 카스타모누는 '콤니노스 가문의 성채'라는 의미인 카스트라 콤네논이 카스타모네를 거쳐 튀르크 식으로 변경된 지명이다. 중세 후기 아나톨리아 북부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로, 13세기 초반 왕조와 14세기 잔다르 (이스펜디야르) 왕조의 수도로써 번영하였다.
1923년에는 국부 아타튀르크가 방문하여 터키 세속화의 상징인 복식 개혁을 천명한 카스타모누 연설의 현장이었다. 키질이르마크 강의 카라초마크 지류를 따라 형성된 시가지는 카라초마크 협곡에 남북으로 7km 가량 형성되어 있다. 구도심에는 카스타모누 성채와 오스만 전통 가옥 등의 볼거리가 있다. 시가지 북부에는 카스타모누 대학교가 있고, 남쪽 4km 지점에는 카스타모누 공항이 자리한다. 특산물로 장미잼이 있다
2. 역사
기원전 18세기부터 마을이 있었고, 고대에는 티모니온 (Τιμόνιον)이라 불렸다. 10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콤니노스 왕조의 시조인 마누엘 에로티코스 콤니노스는 978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 당시 니케아 방어에 성공한 공으로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일대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마누엘은 자신의 거점으로 성채를 세우며 '콤니노스 가문의 성채'란 의미인 카스트라 콤네논 (Κάστρα Κομνηνῶν)이라 명명하였다. 1020년 마누엘이 사망한 후 콤니노스 가문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어가 마누엘의 장남 이사키오스 1세가 황제에 올랐고, 차남 요안니스는 군사령관에 올랐으며 후자의 아들 알렉시오스 1세 이후로는 약 한세기 가량 동로마 황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카스트라 콤네논은 콤니노스 황실의 세력 기반이었던 것이다.2.1. 십자군 전쟁기
1101년 십자군 진로
시간이 지나며 카스트라 콤네논은 축약되어 카스타모네가 되었고,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 인들이 유입된 후 튀르크식 발음인 카스타모누라 명명되었다. 11세기 말엽 다니슈멘드 령이 되었고, 1101년 여름 앙카라와 강그라를 점령한 롬바르드 십자군이 포위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그들은 동남쪽 120km 지점 메르지푸에서 다니슈멘드-룸 술탄국 연합군에 의해 괴멸된다. 다만 카스타모누를 향한 쟁탈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황실의 고향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동로마 군은 십자군의 혼란을 틈타 일대를 수복하였으나 1127년과 1131년과 1133년에 다니슈멘드의 귀무슈테긴이 재점령하였다. 하지만 동로마의 국력은 중심지에서 멀었던 카스타모누를 지킬 여력이 되지 않았다. 1135년 요안니스 2세가 친정에 나서 수복한 것을 마지막으로 12세기 말의 혼란기에 결국 룸 술탄국이 카스타모누를 점령하였고, 튀르크 인들이 대거 정착하여 튀르크화 되었다. 이후 4차 십자군 시기에 생성된 동로마계 국가인 트라페준타 제국이 점령하기도 하지만 룸 술탄국이 이를 다시 탈환한다.
2.2. 잔다르 왕조
1211년 카이카우스 1세 즉위 후에 벌어진 내전에서 동생 카이쿠바드는 앙카라와 카스타모누를 기반으로 항전했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1292년 룸 술탄 메수드 2세는 자신을 몽골 수중에서 구해준 장군 테무르 야만 잔다르에게 카스타모누 일대를 하사하였다. 다만 카스타모누는 1229년부터 초반 가문이 자치적으로 통치 중이었기에 서쪽 60km 지점 에플라니를 중심지로 삼았다가, 잔다르의 아들 쉴레이만 베이의 치세인 1309년에야 초반 가문을 멸하고 카스타모누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 동시에 쉴레이만 베이는 사프란볼루와 시노프까지 점령하고 아들들을 총독으로 봉하였다. 본래 잔다르 베이국은 일 칸국에 복속했었으나 1335년경 자립하였고, 카스타모누는 그 수도로써 번영하였다. 당대 도시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카스타모누에 무려 40일간 머물며 '가장 크고 좋은 도시들 중 하나로, 물품이 많고 가격은 낮다'고 기록하였다.14세기 후반 잔다르 왕조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패권을 두고 에레트나 왕조와 경쟁할 정도로 세력이 컸다. 하지만 5대 베이 바예지트 대에 와서 친아들 쉴레이만이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1세로부터 지원을 받아 거병하여 카스타모누를 장악하였고, 바예지트는 시노프를 근거지로 삼으며 잔다르 조는 양분되었다. (1383년) 쉴레이만 베이 2세는 무라트 1세를 따라 1차 코소보 전투에 참전하는 등 오스만 조에 충성했지만, 후자의 아들 바예지트 1세는 1391년 카스타모누를 무력 점령하고 쉴레이만 베이를 죽였다. 이로써 잔다르 조의 카스타모누 지배는 일단 종식되었다. 한편 1385년 시노프에서 즉위한 이스펜디야르 베이는 곧바로 바예지트 1세에게 복속하여 자치를 허락받았다. 1402년 앙카라 전투 후 이스펜디야르 베이는 티무르에 복속하여 카스타모누와 찬크르 등 가문의 옛 영토를 돌려받았고, 막 내전을 마무리한 메흐메트 1세는 우선 잔다르 조의 복구된 영토를 인정하였다.
다만 1416년 이스펜디야르 베이의 아들 카슴이 오스만 지원 하에 반란을 일으켜 찬크르 일대를 장악하고는 자립하였고, 1419년에는 동쪽의 삼순이 오스만 령으로 병합되었다. 그럼에도 이스펜디야르 베이는 계속 오스만 조에 복속하며 남은 영토를 영위하였다. 하지만 메흐메트 1세의 사후 무라트 2세의 즉위를 틈타 1423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시노프로 철수하였고, 오스만 황실과의 혼인 관계를 맺어 화친을 도모하고는 1439년에 사망하였다. 15세기 중반 잔다르 왕조는 오스만 조정에 의해 왕위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쇠락하였고, 동로마를 멸한 메흐메트 2세는 다시 아나톨리아로 시선을 돌려 1461년 이스마일 베이의 동생 아흐메트와 함께 시노프를 점령하였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아흐메트 베이를 카스타모누와 시노프의 총독으로 봉했다가 불과 3달 (혹은 3년) 후 해임하였고, 이로써 잔다르 (혹은 이스펜디야르) 왕조는 17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멸망하였다.
2.3. 근현대
이후 카스타모누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였고, 16세기의 수피 성인 셰이크 샤반 벨리가 정착한 것 외에는 별일 없이 오스만 시기를 보냈다. 20세기 들어 카스타모누는 니켈 광산이 발견되어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 1923년 8월,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은 카스타모누를 찾아 인민공화당 당사에서 '모자와 의복 혁명'을 천명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후 히잡 착용이 금지되는 등 튀르키예의 세속화가 더욱 진전되었기에 카스타모누 연설은 튀르키예 현대사의 한 장이 되었다. 그가 머무르고 연설했던 인민공화당 당사는 이후 카스타모누 고고학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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