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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젠 분화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平成新山の噴火
(1991年6月3日の火砕流)
1991년 (헤이세이 2년) 6월 3일 운젠타케 헤이세이신잔 쇄설류 분출 사고


1. 개요2. 과거의 분화 사례3. 1991년 헤이세이 신산 분화4. 이후

1. 개요

EBS의 관련 다큐

1991년나가사키현화산 운젠산이 분화한 사건.

2. 과거의 분화 사례

에도 시대 이래 현재까지 기록된 운젠산의 주요 분화 사례는 총 3건으로 1663~1664년, 1792년, 1990~1995년[1] 이다.

이 중 첫 분화는 3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나 두 번째 분화에서는 토사가 아리아케해까지 쏟아졌고 해일이 발생했다. 이에 아리아케해를 끼고 있던 히고 국[2]히젠[3]에서 약 15,000명의 사망+실종자라는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4]

3. 1991년 헤이세이 신산 분화

1960년대 말부터 화산 활동의 이상 징후가 계속 관측되었고 지진, 가스 분출, 동식물 피해 등이 보고되었다. 그런데 막상 1990년 11월에 발생한 분화가 별 피해 없이 약하게 끝나자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몇 달 후 1991년 봄부터 재분화가 시작되었고 5월 말에는 소규모 화쇄류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난 권고에도 불구하고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과 기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각각 멀리서 보면 안전하겠지?라는 생각과 "눈길을 끌 만한 자극적인 장면을 찍어오라"는 상부의 닦달 때문이었다.

급기야 일요일이었던 6월 2일에 이르러서는 도로에 교통 체증이 생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일부 기자들은 민가에 무단침입해 거처로 삼으면서 전기 시설과 물자를 쓰다가 지역 경찰에게 적발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3일 15시 경 대규모 화쇄류를 동반한 진짜 분화가 일어났다.



분화 당시 영상 자료. 이 중 시작 부분부터 40초 가량은 화쇄류가 덮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카메라들로부터 나온 자료다. 사고 피해자들의 모습이 여과 없이 나오기 때문에 연령 제한이 걸려 있다.

그나마 전날(일요일)이나 당일(월요일) 오전까지 터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인명 피해가 줄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당연히 경고를 무시하고 위험 지역 안에 들어가 범법 행위를 저지르던 방송 관계자들 중 다수는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문제는 화산학자를 제외한 나머지 희생자들 중 적잖은 수가 저 방송 관계자들이 저러지만 않았어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이들의 행태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6]

한편 사망한 3명의 화산학자들 중 모리스-카티아 크래프트 부부는 분화와 운명을 함께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평소에도 화산을 연구하다 죽을 각오로 일하고 있었으니 뭐...[7][8] 하지만 화산학자들의 위험성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자체와 주민들 모두 사태의 심각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피난하지 않은 농민과 작업자들의 피해도 발생했다.[9]

나머지 한 명은 해리 글리켄으로, 세인트 헬렌스 화산폭발할 때 숨진 데이비드 알렉산더 존스턴의 제자다. 원래 글리켄은 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폭발했던 5월 18일에 당직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존스턴과 일정을 바꿨고 그 덕분에 화를 면했는데 이후 화산이 폭발하고 존스턴이 사망하자 그가 자기를 대신해 죽었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11년 후 본인도 존스턴과 마찬가지로 화쇄류에 휘말려 사망했다.

4. 이후

현장의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자위대에서 수습에 나섰다.



이듬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주민들 중 대부분은 화산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화쇄류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며 토석류가 더 위험한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희생자들 역시 대부분이 화쇄류의 엄청난 속도를 보고 뒤늦게 도망치려고 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위의 초근거리 영상 자료들이 공개된 후 이러한 인식은 바뀌게 되었다.

1995년까지 산발적인 화산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 여파로 생겨난 헤이세이 신산(平成新山)이 운젠산의 새로운 최고봉이 되었다.

이후 피해 복구 작업이 완료되었지만 일부 지역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여전히 분화 당시의 모습을 남겨두고 있다.[10]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시마바라시에 운젠 재해 기념관, 미나미시마바라시에 토석류 피해가옥 보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편 시마바라시 남부에는 수무천(水無川)이라는 하천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는데 운젠산이 다시 분화할 시 화쇄류, 토석류 등에 대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산에서부터 아리아케해까지 이어지는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며 마을을 갈라 놓았다.

지역 사철인 시마바라 철도는 이 분화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가뜩이나 경영 상태도 좋지 못했는데 분화로 시설 피해와 수요 감소 문제까지 생겨 버렸다. 버스로 옮겨간 수요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결국 2008년 4월부로 시마바라 철도선의 절반에 가까운 시마바라항역~카즈사역 구간을 폐선했다.[11]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역 버스 노선도 같은 회사에서 운영 중이라는 것이다.

지자체, 정치인들의 잘못된 대처로 인해 피해 규모가 더 커졌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당시 덴노였던 아키히토 부부가 현장을 방문해 피해 지역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12] 지역에 적극적인 복구 작업과 후원이 이어지면서 반감이 누그러들었다.

반면 직접 피해를 키운 당사자들인 언론사들은 주 분화 이후 자위대의 헬기로 근접 취재를 시도하다가 헬기가 화산재에 고장나 불시착하는 등 뻘짓이 이어졌는데 사고로부터 20년이 경과한 2011년에 이르러서야 닛폰 테레비의 고위 인사만 과거 방송국의 부주의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으며 이마저도 변명에 가까웠다.


[1] 주 분화는 1991년이기 때문에 이후의 서술에서는 1991년 분화로 통칭한다.[2] 현재의 구마모토현 일대[3] 현재의 나가사키현, 사가현 일대[4] 전혀 대비가 안 된 갑작스러운 일이었던데다 지리적 특성 상 대다수 인구가 해안가에 거주 중이었고 당시 기술력으로는 외진 곳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에 비해 부상자는 천여명에 불과했다.[5] 마이니치 신문 3명, 요미우리 신문 1명, 니혼게이자이 신문 1명, 테레비 아사히(아사히 신문 산하) 2명, NHK 2명, 닛폰 테레비 2명 등[6] 현장 수습 과정에서 방송국 카메라가 발견되었는데 화쇄류가 닥치기 직전까지 계속 촬영 중인 이들과 피난시키려는 경찰이 찍혀 있었다. 현재 카메라와 촬영된 내용의 일부가 운젠 재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7] 화산 재난 영화인 단테스 피크에서도 화산학자는 끝까지 연구하다가 대피가 늦어 죽고 만다. 이외에도 태풍, 쓰나미 등의 각종 자연재해를 다룬 영화에서 주인공과 친분이 있는 연구자들이 대피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대표적인 클리셰가 되었다.[8] 이 둘의 삶은 두 차례나 다큐멘터리화되었는데 베르너 헤어초크도 포함되어 있다.[9] 사실 담배풀 경작 중 중요한 관리 작업이 화산 활동 때문에 지연되었던 것도 한몫했다.[10] 사실 복구 비용이 막대하고 안전 문제도 있다 보니 버려진 지역도 존재한다. 비슷한 시기 발생했던 재해인 고베 대지진이나 우스잔 분화 역시 일부 지역을 남겨놓아 당시 피해 상황을 보존하고 있다.[11] 다만 폐선 이후에도 폐선 구간의 시설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유는 불명.[12] 아키히토는 황태자 시절부터 이런 자세를 취했으나 천황이 된 후에 행함으로서 역대 천황 중에서는 최초가 되었다. 이후에는 다른 황족들도 재해, 사고 현장 방문 시 이렇게 행동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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