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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북위 비정통 황제 원호 | 元顥 | |||
출생 | 494년 | ||
북위 하남군 낙양현 (現 허난성 뤄양시) | |||
사망 | 529년 8월 13일 (향년 36세) | ||
북위 하남군 임영현 (現 허난성 뤄허시)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북위 북해왕(北海王) | ||
509년 10월 5일 ~ 528년 5월 | |||
남량 위왕(魏王) | |||
528년 5월 ~ 529년 4월 | |||
북위 비정통 황제 | |||
529년 4월 ~ 529년 8월 1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 탁발(拓跋) → 하남 원씨 | |
휘 | 호(顥) | ||
자 | 자명(子明) | ||
부왕 | 원상(元詳) | ||
형제자매 | 3남 1녀 중 장남 | ||
배우자 | 왕비 번씨(樊氏) | ||
자녀 | 2남 | ||
작호 | 북해왕(北海王) | ||
시호 | 없음 | ||
묘호 | 없음 | ||
연호 | 효기(孝基, 529년) 건무(建武, 5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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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북조 북위의 황족으로 헌문제의 손자이자, 북해왕 원상의 아들이다. 비정통 황제이자 외세인 양나라의 힘을 빌린 반역자였다.2. 생애
영평 2년(509년) 9월 6일[1], 원호가 아버지의 북해왕 작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비장하고 굳센 기백을 지녔으며, 처음에 용양장군(龍驤將軍)•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이후 종정경(宗正卿)•광록대부(光祿大夫)•장겸종정경(長兼宗正卿)•산기상시(散騎常侍)•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옮겨졌다가, 도관상서(都官尚書)로 전임되었고 안남장군(安南將軍) 직책이 더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무군장군(撫軍將軍)•서주자사(徐州刺史)•산기상시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사(御史)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작위가 삭탈되었다.반란군의 수령 숙근명달(宿勤明達)과 질간기린(叱干騏驎) 등이 빈주(豳州)와 화주(華州) 등 여러 주를 침략하여 혼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원호의 왕작을 회복시키고, 본래의 장군직에 사지절(使持節)•가 정서장군(假征西將軍)•도독화빈동진제군사(都督華豳東秦諸軍事)•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서도행대(西道行臺)로 삼아 숙근명달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원호가 연이어 적을 격파하여 빈주와 화주의 포위를 푸니, 그 공로로 식읍 800호를 더 하사받고,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로 임명되었고, 지절, 행대, 도독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하였고, 다른 직책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효창 3년(527년) 정월, 상규(上邽)에서 반란을 일으킨 막절념생(莫折念生)이 평량(平涼)에서 사공 소보인을 크게 격파하고 동진주(東秦州)와 기주(岐州)를 점령한 뒤, 빈주자사도 격파하여 살해하였다. 이때 원호 또한 수도 낙양으로 도망쳐 돌아오게 되었다.
무태 원년(528년) 정월, 반란 세력을 이끄는 갈영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점차 업성(鄴城)을 위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원호를 시중(侍中)•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상주자사(相州刺史)로 임명되어 갈영을 토벌하게 하였다.
건의 원년(528년) 4월 13일[2], 원호가 급군(汲郡)에 도착하였을 때, 선비화한 갈족계 이주부의 추장인 이주영이 이미 수도 낙양으로 입성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제9대 숙종 효명제를 독살한 영태후 호씨와 유주 원조를 황하에 던진 뒤 원자유를 제10대 경종 효장제로 옹립하였다. 갈영의 침공과 이주영이 북위 조정을 장악했다는 소식까지 겹치면서 원호는 결국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주영은 이런 원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를 태부(太傅)로 삼고, 개부, 시중, 자사, 왕의 직함은 모두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호는 갈영이 남쪽으로 침략하고, 이주영이 폭정을 일삼는 상황을 보고 망설이며 관망하였다가, 결국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였다.
이전에 원호는 외숙부인 범준(范遵)이 은주(殷州) 자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범준이 갈영의 위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니, 원호는 범준에게 임시로 업성(鄴城)에 머물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반역할 마음을 품은 원호는 범준에게 업성에서 상주(相州)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면서, 이전에 상주의 직무를 대행하던 이신(李神)을 대신케 하여 자신의 우군으로 삼으려 하였다. 당시 상주행대 견밀(甄密)은 먼저 조정을 통해 명을 받아 업성의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견밀은 원호의 반역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범준이 변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사람들과 함께 범준을 죽이고, 이신을 다시 상주의 업무를 대행하도록 추대하였다. 이후 견밀은 군후(軍侯)를 곳곳으로 파견해 원호에게 순응하는 세력과 대항하는 세력을 파악하였다.
견밀이 범준을 제거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호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아들 원관수(元冠受)와 함께 좌우 사람들을 이끌고 소량의 무제 소연에게로 도망쳤다. 원호는 소연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변론하였고, 그의 말은 자못 장렬하였다. 무제는 원호의 모습에 감동하여 그를 위왕(魏王)에 봉하고, 표용장군 진경지에게 7,000명의 군사를 주어 원호가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돕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경지가 명장으로서 활약한 대통북벌이다.
대통 2년(528년) 10월, 원호가 이끄는 양나라군이 북위를 침공해 질성(銍城)을 함락시켰다.
효기 원년(529년) 4월 12일[3], 원호가 군대를 이끌고 양국(梁國)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원호는 양국성 남쪽에서 단(壇)에 올라 제사를 지내며 불을 피우고, 그곳에서 위나라의 황제로 즉위한 뒤, 연호를 '효기(孝基)'로 선포하였다. 이에 효장제는 제음왕 원휘업을 보내 우림서자(羽林庶子) 20,000명으로 침공당한 양(梁)과 송(宋) 일대를 구원하게 하였다. 원휘업은 고성(考城)으로 진군해 주둔하였는데, 성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방비가 매우 견고하였다. 그러나 진경지가 물 위에 둑을 쌓아 올려 공격을 명하였고, 결국 고성은 함락되어 원휘업은 원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북위군을 대파한 원호는 이어서 수양(睢陽)을 공격하였다.
건무 원년(529년) 5월, 원호는 수양을 마침내 함락시켰고, 진군하여 형양(滎陽)에서 진경지의 맹활약으로 행대 양욱(楊昱)이 이끄는 북위군 70,000명을 격파하였다. 이후 진경지가 다시 기병 3,000기를 거느리고 북위의 상당왕 원천목(元天穆)을 격파하니, 호뢰(虎牢)를 수비하던 이주영의 사촌동생 이주세륭(爾朱世隆)은 호뢰를 버리고 도망쳐 퇴각하였다. 이에 효장제도 낙양을 지킬 수 없어, 수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하내(河內)로 피신하였다. 이로써 원호는 5월 25일에 손쉽게 낙양성에 입성하였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다시 고쳤다.
원호가 겨우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거듭된 전투에서 매번 승리하다가, 마침내 도읍까지 점거하고 명령을 내리며 스스로 황제로서 행세하였다. 천하의 민심은 그의 교화와 정치를 기대하였으나, 그는 스스로를 하늘이 내린 군주라 여기며 점차 교만하고 나태해졌다. 원호는 오래 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빈객과 친근한 이들을 모두 총애하며 우대하였고, 이들이 정사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더욱이 그는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향락에 빠져 군국(軍國)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원호가 거느리던 남방 병사들이 시장과 마을을 약탈하며 횡포를 부리니, 조정과 민간의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이때 그는 세금도 가혹하게 거두어 공사(公私)가 모두 불안한 상황이었다.
건무 원년(529년) 6월, 대승상 이주영이 뒤늦게 남쪽으로 진군하여 하내에서 원천목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당시 원호는 진경지를 견제하기 위해 양나라에 증원을 청해야 한다는 진경지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주영과 원천목의 군대가 낙양에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적은 병력으로 맞섰다. 진경지는 북중성(北中城)에서, 원호는 황하 남안에서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이주영과 대치하였다.
건무 원년(529년) 6월 18일[4], 이주영이 야밤에 협석(硤石)에서 몰래 황하를 도하해 원호의 군영을 습격하였다. 원호의 군대는 그대로 무너져 대패하였고, 전투 중에 원호의 아들 원관수는 이주영에게 사로잡혔으며, 진경지 또한 원호의 패주 소식을 듣고 퇴각하다가 강물이 불어 군사를 모두 잃고 승려로 변장한 채 남쪽으로 도망쳤다.
6월 23일[5], 원호는 연이어 패배하여 휘하의 기병 수백 기와 남방의 병사들 중 용맹한 자들만 이끌고 환원(轘轅)을 지나 낙양을 탈출하였다. 원호가 임영(臨潁)에 이르렀을 때,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모두 흩어졌다. 원호는 결국 임영현의 병졸들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향년 36세.
태창 원년(532년) 8월 23일[6], 효무제에 의해 원호의 유해가 옛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효무제는 원호를 사지절•시중•도독양정상은4주제군사(都督冀定相殷四州諸軍事)•표기대장군•대사마(大司馬)•기주자사(冀州刺史)로 관작을 추증해주었다.
그의 아들 원사라(元娑羅)는 동위에서 무정(武定) 연간에 북해왕 작위를 계승하였다. 훗날 제왕 고양이 효정제로부터 황위를 선양받으면서 동위가 멸망하자 작위가 강등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