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8-30 20:18:02

위성공


파일:위2 전서체.png
위 국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희성 위씨(姬姓 衛氏)
초대

강숙
제2대

강백
제3대

고백
제4대

사백
제5대

첩백
제6대

정백
제7대

기백
제8대

경후
제9대

희후
제10대

공백
제11대

무공
제12대

장공
제13대

환공
제14대

주우
제15대

선공
제16대

혜공
제17대

검모
제18대

혜공
제19대

의공
제20대

대공
제21대

문공
제22대

성공
제23대

위군 하
제24대

성공
제25대

목공
제26대

정공
제27대

헌공
제28대

상공
제29대

헌공
제30대

양공
제31대

영공
제32대

출공
제33대

후장공
제34대

반사
제35대

위군 기
제36대

출공
제37대

도공
제38대

경공
제39대

소공
제40대

회공
제41대

신공
제42대

성공
제43대

성후
희성 자남씨(姬姓 子南氏)
제44대

평후
제45대

사군
제46대

회군
제47대

원군
제48대

위군 각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위(衛)나라 22,24대[1] 국군
성공
成公
희(姬)
위(衛)
정(鄭)
아버지 위문공(衛文公) 희훼(姬燬), 희벽강(姬辟疆)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00년
재위 기간 음력 1차: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32년
2차: 기원전 631년 ~ 기원전 600년

1. 개요2. 생애
2.1. 재위 초기
3. 진 문공 사후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22,24대 군주. 위문공의 아들. 위군 하의 형. 위목공의 아버지. 위성공 대에 수도는 초구(楚邱)였는데, 제구(帝邱)[2]로 천도했다.

2. 생애

2.1. 재위 초기

위성공 원년(기원전 634년) 가을, 아버지 위문공을 안장했다. 12월, 위성공은 거나라, 노나라와 화해를 주선했다. 12월 계해일, 위성공은 노희공, 거나라 군주와 도 땅에서 회맹했다. 이것은 위문공 대의 우호 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위성공 3년(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은 송(宋)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위성공이 그 말을 씹었다. 진(晉)나라 군대는 남쪽 황하를 건너 우회하여 송나라를 구원했다. 진(晉)나라는 위(衛)나라를 칠 군대를 모집했다. 위나라의 대부들은 그것에 대비하라고 했으나 위성공은 그것을 무시했다. 대부 원훤은 위성공을 치니 위성공은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진문공이 위나라를 쳐서 차지한 땅을 송나라에 주었다. 이것은 진문공에게 위문공, 위성공 부자가 무례하고, 송나라를 구하는데 협조하지 않은 까닭이다. 위성공은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대부 원훤은 공자 숙무를 섭정으로 세워 천토지맹(踐土之盟)에 참가했으나 위 성공은 숙무를 의심하던 차에, 누군가가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말을 하니 위성공은 귀국하는데, 선봉대가 과잉충성으로 숙무를 죽여버렸고 위성공은 그것을 보고 슬퍼했다. 그 일로 진 문공은 대로하여, 위 성공을 감금했고, 위나라 측에서는 위성공의 동생인 공자 하를 군주로 올렸다.

2년 뒤, 위성공은 주 왕실에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진문공을 알현했는데, 진문공은 위성공에 대한 한을 풀지 못해 위성공을 독살하려고 했다. 이때 위성공은 주 왕실에 뇌물을 바쳐 독을 약하게 해 죽음을 면했다. 이후 주양왕[3]이 진문공에게 위문공을 봐줄 것을 요청하니 진문공은 결국 위성공을 복귀 시켜주었다. 위성공은 귀국 후 대부 원훤을 죽이고 위후 하를 내 쫓았다. 위성공이 복위했다.

3. 진 문공 사후

위성공 12년(기원전 623년), 위성공은 진(晉)나라에서 진양공(晉襄公)을 알현했다.

위성공 35년(기원전 600년), 위성공이 죽고 그 아들 공자 속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목공이다.

[1] 망명하였다가 다시 복위하였다[2] 지금의 복양현, 즉 삼국지의 연주 동군 복양현.[3] 위성공과 이름자가 鄭으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