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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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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14일~1986년 4월 15일 (향년 68세), 충청남도 당진시 출생.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여담5.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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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군인.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대통령표창) 수여.

2. 생애

1917년 충청남도 당진군(현 당진시)에서 태어났다. 예산농업학교(현 국립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를 재학하던 중 1935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하였다. 1936년 김원봉 휘하 조선혁명당에 입당했다가 곧 항저우에서 조직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937년 중산대학에 들어갔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한국독립당에 복귀하였고, 중국중앙군관학교 15기를 임관하였다.

1940년 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전속부관직을 맡았고, 동년 9월 17일 총사령부 참모로 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였다. 1941년에는 광복군 고운기 휘하의 제2지대에서 지달수, 고시복과 함께 복무하였고, 중국군 중위 신분으로 한광반 1기 훈련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장가구 일대에서 초모 활동을 전개하던 중 현지에서 포섭한 교포 중 한명인 최준이 일본 헌병대에 자수하는 바람에 일본에 압송, 오구라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광복군에 합류해 최용덕 휘하에서 김광언, 이성가와 북평 잠편지대에서 활동하였고, 이성가, 김영오와 귀국길에 올라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군번 00036번으로 부위(지금의 중위)로 임관하였다. 1947년 경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에 들어가 학생부장을 맡았다.[1] 1950년 육군보병학교 학생연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6.25 전쟁을 맞이해 훈련조교, 후보생을 집결시켜 서울특별연대(보병학교혼성연대) 연대장으로서 제1보병사단에 합류해 문산 전투, 고랑포 전투, 김포반도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7월에는 제9연대장으로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에서 활약했고, 제25연대장[2]으로 안강-기계전투에 참가했으나 북한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근무중 무고로 인해 적전비행 죄목으로 투옥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재전 등 휘하 장교들의 탄원으로 석방, 복직했다. 1953년 남부지구 전투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빨치산을 토벌하는 등 후방 치안에 앞장서다 이용문 장군의 순직을 목도하기도 했다.

전후 1954년 한신, 박정희와 함께 준장으로 승진하였고 [3][4], 제25사단장, 육군보병학교교장, 육군 정훈감, 육군 감찰감을 역임하였다. 1959년 12월 소장 진급이 내정되었으나 법무감 김완룡 준장에 밀려 진급되지 못했다. 당시 국방부에서 내정된 사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이 지적되어 문제되었다. 1961년 8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1962년 이성가 소장 후임으로 육군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국방대학원에 입교했고, 1965년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 1967년 예편하였다.

예편 직후 한국수자원공사 이사, 한국전력 이사, 대한중석 감사, 삼성중공업 고문을 역임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 4월 15일 별세했다. 향년 68세.

3. 가족관계

딸인 유혜란씨는 피아니스트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독일에서 유학을 하였다. 귀국 후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손자인 유형민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해 공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4. 여담

“국토통일 성업을 완수할 때가 오면 외견(外見)은 비록 노병이되 계급 불요(不要),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성스러운 마음으로 서슴지 않고 사랑하는 나의 1군에 복귀해 여러분들 앞에 서서 싸울 각오가 돼 있습니다.”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준 창군(創軍)에 참여한 광복군 출신 중에서 가장 내 기억에 남는 창군 원로는 유해준(兪海濬)장군(군영·소장 예편·작고)이다. 유장군은 일제 치하에 충남 예산농고 재학중 단신으로 중국에 건너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전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 국군 창군에 참여하고 우리 군대에 크게 공헌한 분이다.
그러나 이분의 군인으로서의 생애는 비극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감히 이분을 `비극의 장군'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조국 광복이라는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와신상담(臥薪嘗膽), 천신만고(千辛萬苦)로 왜적과 싸웠으니, 당연히 개선장군으로 돌아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광복군과 마찬가지로 무장해제된 채 사인(私人)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군인으로서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통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강직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군생활의 처음부터 끝까지 상사들의 질시와 미움을 받아 파면·복직·투옥 등 부침(浮沈)이 되풀이됐다.
나는 신임장교로서 이분 휘하에서 소대장 및 대대참모를 했다. 이분의 고매한 인품과 인격은 많은 부하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그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 애국충정에서 우러나온 훈시·훈화는 모든 청년장교에게 감동을 주었음을 물론, 곧 지침이요 가르침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초급장교 시절이라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본받고자 애썼고 그 때문에 나의 장교생활도 그분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그 분이 안강·기계지구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근무중 무고(誣告)에 의해 적전비행(敵前非行) 죄목으로 투옥,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을 때 나는 한낱 초급장교의 몸으로 감히 당시의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에게 구명복직을 위한 탄원서를 낸 바 있다.
유장군은 연대장 시절 문란했던 보급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관사에서 소용되는 쌀을 일일이 충남 당진의 시골 본가에서 가져다 지낼 정도로 공사(公私)를 명확히 구분한 분이었다. 이분은 그 뒤로 1967년 8월 1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다가 꼭 30년이 되는 군생활을 마치고 명예롭게 전역했다.
나는 당시 1군 작전참모로 있으면서 말년에 한직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지내던 그분의 모습과 많은 장병들 앞에서 말한 전역사(轉役辭)의 끝 대목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토통일 성업을 완수할 때가 오면 외견(外見)은 비록 노병이되 계급 불요(不要),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성스러운 마음으로 서슴지 않고 사랑하는 나의 1군에 복귀해 여러분들 앞에 서서 싸울 각오가 돼 있습니다.”
우리 군은 창군 초기 미군정 당국의 주도 아래 과거 군 경력만 있으면 출신·성분을 크게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영입했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자진 입대, 일본군 또는 일제가 만든 괴뢰국 군대인 만주군 출신으로 수많은 우리나라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앞장서서 색출·고문·탄압 한 무리도 포함됐다.
그리고 이들이 오히려 한평생을 망명의 땅에서 악전고투한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보다 더 출세가도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해준 장군 같은 지사들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모순이요, 불의로 비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기자 < [email protected]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3. 06. 09 00:00

5. 참고 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제6권
광복군 출신 비극의 장군 유해준. 국방일보, 그때 그 이야기, 온고지신, 이재전, 2003년 6월 9일자.


[1] 해당기사에 따르면 최주종, 이성가 등 군사영어학교 동기들이 함께 가입하였다. 이 중 최주종은 월북 후 재월남하여 군에 복귀하지 않은 상태였고, 기사에 나온 박임항, 이형석, 박영준 등은 1948년 경 육군사관학교 특 7기, 8기로 임관하였다. 따라서 이성가 등과 함께 중간에 군에 나와 족청에서 활동했다가 1948년 경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2] 당시 휘하 중대장에 채명신이 있었다. 채명신의 증언에 따르면 살생유택을 강조하였다고 한다.[3]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서 장성진급이 매주 늦은 편이었다. 참고로 한신,박정희는 육사2기.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대다수 한국전 개전당시 대령/중령급에 있었으며 한국전 초기,중기를 지나며 대부분 장성급이 되었으나 유해준 장군은 부침을 많이 겪어 진급이 늦었다.[4] 유해준의 경우 임관 후 군에서 나와 족청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어 동기들 보다 진급이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진급에 있어 이 사안을 고려해 육사 특별반 출신들과 비슷하게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5] 다만 이성가 장군은 신성모의 보증으로 입교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당시 신성모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위명이 꽤 있었고 상선사관 출신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