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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5:03

윤미래/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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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논쟁의 이유

1. 개요

한때 '대한민국 5대 여성 래퍼는 윤미래, T, 타샤, GEMINI, 그리고 조단 엄마다'[1]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에게 윤미래는 '한국 최고의 여성 래퍼'라고 불리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힙합 음악은 역사가 짧기도 하고 대중들에게 여전히 생소하기도 하여 여성 아티스트의 참여가 현저히 드물었고, 거기다가 동시기의 힙합의 본토 미국에서조차 여성 래퍼 중에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Salt-N-Pepa, Da Brat, 로린 힐, 릴 킴 그리고 미시 엘리엇 정도였을 정도로 결코 넓은 저변을 지니고 있지 않았었다.

일단 윤미래를 현 시점에서 래퍼로서 평하자면 한국 힙합 1세대 래퍼라는 점과 한국 힙합 초창기의 여성 래퍼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또한 대중적으로 성공한 래퍼도 적었던 시기에 나온 대중적인 래퍼 중 한 명이다 보니 한국의 모든 여성 래퍼들은 좋든 싫든 윤미래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문제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여성 래퍼는 꽤 오랫동안 윤미래 뿐이어서 잘하냐 못하냐의 기준도 윤미래를 두고 논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했던 치타, 타이미, 릴샴 역시 이러한 풍토는 옳지 않다고 인터뷰에서 직접 비판한 적도 있다. 몇몇 리스너들은 윤미래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힙합계에서 인정받은 리미가 진정한 한국 여자 래퍼 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리미는 얼마 안가서 래퍼로서의 활동을 접었다.

윤미래는 커리어를 오래 이어왔고 적어도 R&B나 발라드 장르의 보컬로서는 상당한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잘 알려진 여러 히트곡을 남겼기에 대중 가수로서는 절대적인 위치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래퍼로서는 증명되지 못한 거품이라는 의혹 역시 끊이지 않는다. 윤미래는 미국 출생으로 어릴 적 미군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짧은 시간 거주한 것을 빼고는 줄곧 미국에서 살았으며 한국 나이로 15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나마도 한국에 와서도 외국인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툰 편이다.[2] 따라서 가장 많은 지적을 받는 부분으로 데뷔 후 꽤 오랫동안 한국어 랩 가사를 직접 쓰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여기서 한가지 명확하게 짚고 가야 할 점은 윤미래가 가사를 아예 못 쓴다거나 랩 실력 자체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서툰 한국말로 인해 영어로 가사를 쓰면 남편인 JK가 번역해주었던 것이고[3] 애초에 영어 랩은 예전부터 수준급이었다. 다만 본인이 직접 쓴 한국어 랩 가사로 인정 받은 곡이 없다는 점에서 해당 논쟁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4]

그래서 업타운 시절에는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한국어 랩 가사로 인해 온갖 음악 관련 웹진에서 혹평을 들은 적도 많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래퍼가 자신의 가사를 못 쓴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외국이었다면 고스트라이터로 찍혀서 커리어 통째로 묻혔을 일이다. 당장 2010년대부터 현재까지 미국 힙합 메인스트림의 상징으로 군림하는 중인 드레이크부터 고스트라이팅을 한다는 이상한 루머가 퍼지면서 '넌 가짜 래퍼다'라고 디스를 크게 당하기도 했고 닥터 드레는 다른 래퍼나 작사가가 가사를 다 짜서 넘겨준다는 이유만으로 그 걸출한 명성과 음악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데뷔한 지 30년이 훌쩍 넘어가는 긴 세월동안 '래퍼'가 아니라 '프로듀서'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만큼 자체적으로 작사가 가능한가에 대한 여부는 힙합과 다른 대중가요 장르를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일각에서는 '그래도 윤미래가 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대필은 아니지 않느냐' 라는 이야기로 반박하는 이들도 있으나, 랩 가사를 쓰는 것은 타자기로 수필을 저술하는 행위가 아니고 엄연히 '고도의 음악적 기술'이다. 어느 타이밍에 라임을 배치하고 언제 강세를 주거나 흘릴 것이며 이런 멜로디나 비트에 맞춰서는 레이백을 줄 것인지 아니면 속사포를 할 것인지 일일이 래퍼가 그 컨셉과 구조를 머릿속으로 정하고 입으로 뱉어보기도 하고 듣고 첨삭도 하면서 진행을 해내가는 것이다. 이렇기에 래퍼에게 있어서 랩 작사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소양이라는 것.

그런데 가사를 쓰지 않고 남한테 전부 작사를 맡긴다는 것 부터가 이미 래퍼에게 있어서 생명이나 다름없는 라임플로우 창작을 남에게 맡겼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나 진배없다. 록밴드로 따지면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다른 사람이 대신 만든 기타 연주를 가지고 커리어 내내 카피만 해서 녹음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이런 사람을 '록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대우할 수 있는가? 아마 록 매니아들이 들으면 소름이 확 돋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윤미래의 노래 작사 저작권은 대부분 타이거 JK 앞으로 등록되어 있다. 단순히 감수, 틀린 것을 살짝 교정하는 것을 떠나 아예 다른 이가 새로 써준 랩을 대신 불러주는 것 부터가 아주 심각한 결점이라는 것.

한국 힙합 초창기에 영어랩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래퍼들의 트렌드였으니 윤미래만 꼭 집어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대표적으로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만 봐도 초창기에는 김진표가 대신 써 준 한국어 가사를 불렀으나 얼마 안가서 본인이 자신의 한국어 작사실력을 키워 본인이 직접 작사를 하고 음악성을 인정받았다.[5] 설령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여겨질 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에는 그랬다 정도의 평가일 뿐, 현재의 평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결정적으로 윤미래는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만든 한국어 랩으로 채운 제대로 된 힙합 명반을 단 한 개도 낸 바가 없다.

랩으로 메이저 기획사에서 full-length 앨범을 발매했으며 충분한 판매량을 확보했으니, 대중적인 히트곡이 있다는 것은 다른 여자 래퍼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범접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다만 이에 관해 순수하게 랩으로 승부를 낸 히트곡이 없다는 점도 지적사항으로 꼽히고 있다.[6] 제이지의 Empire of state 사례를 들며 어줍잖게 반박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본인이 힙합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이지는 이미 본토에서 Niggas in Paris등을 비롯한 순수랩 히트곡을 여러 보유하고 있는 레전드 래퍼이고, 결정적으로 제이지의 디스코그래피와 음악적 역량은 고작 Empire of state 하나로 대표될 정도로 절대 호락호락한 래퍼가 아니다. 당장 Empire of state보다 한참 전에 나온 제이지의 커리어 하이 앨범들인 Reasonable DoubtThe Blueprint는 롤링스톤 명반 리스트에 들어가 있으며 특히 The Blueprint는 당시 빌보드 1위를 달성했을 정도로 상업적 성과와 평론 모두를 사로잡은 앨범이었다. Reasonable Doubt는 나스의 Illmatic, 비기의 Ready to Die와 함께 1990년대 뉴욕 힙합씬을 대표하는 붐뱁 클래식 중 하나로 평가되고 The Blueprint는 투팍과 비기로 대표되는 동서부 갈등 이후의 힙합씬, 그 중에서도 뉴욕 힙합을 이 앨범을 통해 새롭게 그려냈다는 찬사까지 받을 정도이다. 애초에 Empire of state 자체도 알리샤 키스와 피처링으로 기획된 노래인지라 혼자서 후렴을 보컬로 때운 검은 행복같은 사례와는 비교하기도 힘들다. 차라리 굳이 비교하자면 니키 미나즈의 Superbass 같은 노래랑 비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참고로 그 니키 미나즈도 초창기 앨범의 곡을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바람에 '지나치게 상업 지향적' 이라며 매니아들한테 까였었다.

윤미래가 적어도 한국 힙합씬에서 미국 힙합씬의 제이지 같은 위상과 대우로 비교되려면 적어도 자기가 직접 작사한 순수랩 히트곡은 물론이거니와 롤링스톤 명반 차트를 한국으로 로컬라이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같은 가장 권위높은 평론 차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서 본인이 낸 힙합 앨범 한 두 장 정도는 순위권에 올려줘야 가능해진다. 당장 한국에서 이런 위상을 가진 래퍼는 찾기가 힘들며 많이 봐줘야 누명이란 걸작과 다음절 라이밍을 활성화한 업적, 대중적인 히트곡도 가진 버벌진트나 슈프림팀에서의 상업적 성과 및 래퍼 중에서도 현재 가장 높은 앨범 판매량과 에넥도트라는 명반을 내어 역시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센스 정도를 제외하면 찾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수 많은 한국 래퍼중에서도 버벌진트와 이센스를 뽑은 이유는 둘 다 '한국의 롤링스톤 명반 차트'라고 불리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앨범을 올렸던 것과 동시에 순수 힙합 뮤지션이자 래퍼로서 메인스트림 성공도 맛봤던 공식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한국 래퍼의 표본이기 때문이다.[7][8] 그럼에도 '이들의 래퍼로서의 국내 커리어와 위상을 본토의 제이지랑 비교한다'는 명제가 나오면 아무리 한국 힙합을 애정하는 팬들조차도 당연히 갸우뚱해질 것이 뻔하다.

몇몇 이들은 미국 데뷔하면 성공할 래퍼 1순위로 윤미래를 꼽기도 한다. 그러나 윤미래 스타일은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파워풀하게 내지르는 스타일에 정박 위주의 랩이라 싱잉랩과 멈블 등으로 어마무시하게 다양해진 요즘 미국의 주류 스타일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때문에 윤미래가 미국에 진출해도 더 현란한 플로우와 래핑을 구사하는 래퍼들이 즐비한 본토에서 굳이 윤미래의 랩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리스너들도 많다. 또한 이는 바꿔 말하면 윤미래가 기존에 안주하고 트렌드 연구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9][10]

윤미래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래퍼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래퍼라는 명제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중음악 관점에서 윤미래를 평가하면 분명 대중들에게 성공한 래퍼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음악적인 상업성만 따졌을때 나올 수 있는 평이다. 윤미래가 뛰어난 래퍼로서 인정받기 원한다면 매니아들에게도 인정받을 만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건 어느 나라를 가도 마찬가지이다. 로린 힐이나 미시 엘리엇같이 오랫동안 하드힙합팬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의 특징은 단순한 상업적 성공만이 아니라 결과물의 음악적 완성도도 증명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국적 성별을 떠나 모든 래퍼들이 이제까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해왔다. 오버그라운드에서 상업적이라고 비판받았던 니키 미나즈 역시 여러 가수들과의 콜라보와 거기에서 보여준 독보적인 래핑, 점점 발전해가던 힙합 작업물을 통해 본인의 능력치를 증명하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다른 래퍼들 역시 다 그래왔는데, 꼭 윤미래에게만 예외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이 명제를 그대로 적용해 음반 판매량과 음원 순위로만 래퍼들의 능력을 평가한다면, 이미 한국 음악시장에는 윤미래보다 훨씬 높은 판매량과 음원성적을 보여주는 자칭 래퍼들이 수두룩 하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본인이 직접 작사도 한다. 당장 한류 열풍을 타고 전성기 시절 윤미래의 흥행성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어마무시한 상업적 성과를 올리는 요즘 아이돌의 랩 담당 멤버들은 본인 파트 랩 가사는 자기가 쓰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래퍼로서 치명적인 핸디캡을 안고도 어떻게 한국 최고의 여성 래퍼로서 각인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결론만 말하자면 결국 동 세대 여성 래퍼중에서 혼자 살아남았고 그 체제가 꽤 길었기에 사람들 머릿속에서 1위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흑인이라는 독특한 스토리, 혼혈 외모 버프가 분명 있었으며, 한국 힙합의 고참이자 대부격인 남편 타이거 JK 없이 그냥 솔로 래퍼였다고 치면 지금처럼 추앙받고 있었을지는 의문. 즉, 전성기 이후엔 본인 역량이 제자리 걸음이거나 퇴보했더라도 부부 래퍼라는 이름으로 명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음악 외 조건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살아남았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자면 애초에 시작이 래퍼가 아닌 댄스 그룹 멤버였을 뿐더러, 업타운이나 타샤니 활동을 비롯해 R&B 위주 솔로 앨범의 히트로 기반을 착실히 다져놓은 상태였기에 실패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덜어놓은 상태에서 '여성 래퍼로서의 솔로 앨범'이라는, 한국 음악계에서 보기 힘든 동시에 상업적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말 그대로 맨 땅에 랩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당시의 렉시나 Foxy, MC 혼, 예솔, Steady B를 비롯한 동시기 여성 래퍼들의 경우 저런 시도를 할 상황 자체를 만들 수 없었다. 끽해야 MC 혼이나 예솔처럼 그룹에 묻어가거나 인디 레이블에서 소규모로 EP 찍어내는 정도. 스테디 B의 경우에도 1집을 낸 게 이름 알리고 거의 10년 후인 2009년이었으니 말 다 했다. MC 혼[11]은 DICE라는 인디 밴드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본업은 아니고, 랩하던 시절 인지도가 낮다가 댄스 가수로 전향한 1집에서 '애송이'가 히트치며 엄청나게 이름을 알린 렉시는 말할 것도 없다.

윤미래가 데뷔한지 10년 넘게 흐른 2000년대 시점에서도 '여성 솔로 래퍼'는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실력 논란이 있긴 했지만 온갖 마케팅을 하고도 욕만 한 바가지 먹고 실패를 맛본 타이미를 보면 자명. 웬만큼 간 큰 기획사 사장이 아닌 이상 아무리 인디에서 찬양받던 이라고 해도 '여성 솔로 래퍼'라는 카드에 섣불리 지원해줄 엄두를 못 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허나 2010년대에 들어선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한국 힙합씬의 저변이 넓어지고 대중들 사이에서도 크게 인식되면서 성공적으로 데뷔하여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완성형 여성 솔로 래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언프리티 랩스타를 통해 주목받거나 혹은 커리어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한 제시, 헤이즈등의 아티스트들이 대표적이며 씬 내부와 매니아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서 저변을 넓힌 재키와이, 스월비, 릴 체리, 윤훼이 등이 등장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윤미래가 가지고 있던 단점인 자체적인 작사 불가능과 래퍼로서의 미비한 힙합 디스코그래피를 데뷔시기부터 메꾸며 한 단계 진일보한, 정말 제대로 된 래퍼로서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윤미래에게 있어서는 '1세대 대표 여성 래퍼' 타이틀은 몰라도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 힙합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는 점차 멀어져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 동안 쌓아온 경력과 위상덕에 여전히 존경받는 1세대 아티스트로 남겠지만 더 이상 정점의 자리를 현역으로 독점하기에는 힙합 아티스트로서 더 실력있고 완성이 된 후배들이 넓어진 씬에 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인 것.

이 외의 윤미래의 성공 요인을 꼽아보자면 음악적인 지원이다. 즉, 노래나 랩을 아무리 잘 한다 한들 좋은 곡을 만들어줄 이가 없으면 말짱 황이라는 것인데, 윤미래에게는 업타운에서 같이 활동했던 정연준을 비롯해 박근태, 방시혁 같은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손에서 '하루하루', '참을 수 없어', '경고', '시간이 흐른 뒤 (As Time Goes By)[12]', '메모리즈' 같은 명곡들이 쏟아져나왔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들이 만들어낸 숱한 히트곡들을 생각하면 그 위상이 얼마나 후덜덜했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정작 윤미래의 최근 행보는 OST 팝 발라드 위주의 디스코그래피[13]로 힙합과는 꽤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이며 간간이 힙합이라고 나오는 노래들은 오히려 후렴 부분 훅에 무게가 실리는지라 일부에서는 순수하게 랩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최고의 여자 래퍼라고 일컬어지는 상황.

결국 오랜만에 나온 앨범 Gemini2 에서는 잔뜩 혹평만 받고 말았다. 보컬은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완전히 탑클래스지만 랩은 더 이상 뛰어난 수준도 아니고, 발전은 커녕 퇴보한다는 평가만 받았다. 거기다 랩 실력은 둘째치고 여전히 부실한 작사능력과 미약하기 그지 없는 앨범의 내러티브는 매니아들 조차 등돌릴 정도로 실망스러운 결과물만 안겨줬다는 평이다. 힙합 전문 리뷰 사이트 리드머에서는 앨범의 퀄리티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하였다.링크

그나마 장점이라면 기량적인 측면에서 흑인 특유의 하드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량. 소위 말하는 땜삥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사운드를 때리는 파워가 아득히 다른 래퍼들은 따돌리고도 남는 수준이며 이 때문에 화려한 플로우나 랩 스킬을 보여주지 않아도 청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호평받는 부분. 또한 가창에서도 발휘되는 특유의 파워풀한 발성은 랩에서도 돋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위치에 대한 평가와 능력에 따른 평가는 엄연히 달리 이루어져야 하는데, 윤미래는 전자가 후자에 대한 평가마저 뒤덮고 있는 상황이라 힙합씬의 비중이 점점 커져가고 뿌리내리는 현 시점에서 재정립이 필요하기는 하다.

2월 21일 나온 주노플로의 곡인 <Statues REMIX (ft. Bizzy, Double K, Dok2, Tiger JK, Yoonmirae)>에 피쳐링진으로 참여하였는데, 한국어 가사는 없지만 독보적인 라임과 발성으로 아직도 발전하고 있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대중의 반응 또한 대부분 호평이 가득하다.

종합하자면 1세대 힙합인들 중에서도 당시로선 흔치 않은 여성으로서 일궈낸 노력과 그것으로 얻어낸 인기 및 위상에 대한 리스펙은 충분히 필요하며 인정되지만, 지금까지도 압도적인 넘버 원 여성 래퍼라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고 평가받는다. 더욱이 2000년대 후반부터는 래퍼로서의 커리어보다 발라드, R&B 타입의 보컬 커리어를 훨씬 더 자주보이는지라 순수한 의미에서 래퍼로서의 평가는 꽤 떨어져가는 편. 세월이 흐르면서 윤미래를 세대 교체 시킬만한 완성형 후배 여성 래퍼들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중이다.

윤미래를 짧게 평가하자면 보컬로서는 최고, 래퍼로서는 1세대 출신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 인기를 유지해온 여성 래퍼이지만 작사 실력 미흡과 힙합씬을 만족시킬만한 웰메이드 작업물이 없다는 것을 봐도 전반적으로 미완성된 프로토 타입의 래퍼라고 볼 수 있으며 이제는 래퍼라기 보다는 보컬 위주의 올라운더 대중가수화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 논쟁의 이유

사실 윤미래에 대한 래퍼로서의 평가가 원래부터 이렇게까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윤미래가 처음 데뷔했을 당시 한국에서 힙합의 입지는 지금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는 수준이었고,[14] 따라서 대중적인 호응도 지금보다 컸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거기다 솔로 데뷔했을 당시엔 지나친 외국 여성래퍼들(특히 로린힐)에 대한 레퍼런스나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다' 는 이유로 관련 매거진에서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특유의 땜삥이나 느낌, 발성 때문에 기대하고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고, '아직은 미약하지만 포텐이 많은 가수' 정도가 딱 그녀를 바라보던 업계의 시선이었다.

게다가 윤미래는 업타운 당시 '래퍼'가 아닌 '보컬'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온전히 래퍼라고 여기는 시각도 당시엔 희미했다. 이 때문에 솔로 당시 래퍼로 나온다고 했을 때 오히려 놀랍다는 시각도 있었다. 당시 그녀의 랩실력은 완전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음에도,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기대주 정도의 시각으로 보았지, 지금처럼 거장급으로 평가를 내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 윤미래의 성과물은 기대에 못미쳤으면 못미쳤지, 대단한 무언가를 남겼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당장 그녀가 이후 냈던 솔로 앨범들도 대부분 싱잉과 랩이 비슷한 비중으로 담겨 '온전한 힙합 앨범' 으로 보긴 무리가 있었고, 이후 활동했던 타샤니 역시 당시로서는 잘봐줘야 '중박' 수준으로 무언가 임팩트를 크게 남긴 행보를 걷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녀가 활약했던 타샤니는 힙합 '컨셉'의 여성 듀오이지, 각잡고 힙합을 하는 그룹도 아니었고 윤미래는 오히려 보컬 포지션에 가까웠으며 힙합풍의 댄스뮤직 듀오 느낌이 아주 강했다. 지금와서 '경고'나 '하루하루' 같은 노래들이 스테디 셀러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상위 항목에 서술되었듯, 당시로서는 오히려 묻힌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쯤 윤미래가 무브먼트 멤버들과 교류가 많아지고,[15] 각종 관련 행사와 인터뷰에서 남편인 타이거 JK를 시작으로 개코, 개리, 타블로등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래퍼들이었던 다른 무브먼트 멤버들이 윤미래를 추켜세워주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레 평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래와 함께 공연하면 다른 멤버들이 비교될까봐 무대 못선다', '미래가 랩하면 기가 죽는다'라던가와 같은 이런 이야기들이 TV와 인터넷을 통해 떠돌고 '윤미래 본인의 어린 시절 스토리 + 흑인 핏줄 + 한국 1세대 힙합 그룹 멤버'라는 백그라운드와 합쳐져 함부로 범접하면 큰일나는 거물 여성 래퍼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당시엔 힙합씬이 협소했고 그 중에서도 인지도 있는 여성 래퍼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윤미래는 그들의 칭찬과 올려치기로 만들어진 다소 인위적이고 급조된 위상을 그대로 받아먹을 수 있었다. 당시 대중들도 지금처럼 앨범 작업물에 대한 디테일한 평가가 래퍼의 위상을 좌우한다는 걸 잘 알지 못했던터라 "오.. 윤미래가 랩 시원시원하게 하는 건 알았는데 주변에서 저렇게 칭찬하는 거 보니 진짜로 최고인가 보네"라고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서 갑자기 윤미래의 과거 곡들이 스테디 셀러처럼 언급되더니, 3집 발매 전후부터는 순식간에 레전드 래퍼로 추앙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타이거 JK와의 결혼이나 '한국 5대 여성 래퍼' 같은 밈들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면서 지금의 윤미래의 부풀려진 위상을 만들어줬다는게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윤미래의 과거 히트곡들은 완전한 랩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고, 최고의 여성래퍼로 추앙받는 와중에도 단 한 번도 본인이 직접 쓴 가사를 통한 완성된 명반으로 무언가를 증명한 적은 없다. 일례로 이센스의 'The Anecdote'나 피타입의 'Heavy Bass'처럼 소위 씬 내부에서 크게 인정받는 래퍼들은 고퀄리티의 결과물로 자신의 역량과 존재감을 인정받았다. 반면 윤미래는 저런 과정 자체가 정말 없었다. 때문에 다른 래퍼들과 달리 여전히 검증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여성 래퍼'라는 희소성과 동료 래퍼들의 칭찬과 같은 능력외 요소들이 그녀의 평판에 영향을 준 것으로 봐야 한다.

이 때문에 2010년대를 넘어서 2020년대에 이른 지금은 '윤미래 좀 신격화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힙합 매니아들 사이에서 상당히 거론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윤미래 이름 석자 잊어야 국힙이 발전한다.'는 글에 동감댓글이 수십개가 달릴 정도.링크 사실 이런 상황을 본인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워낙 여성 인재풀이 없었던 당대 한국 힙합계에서 그나마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보니 본의 아니게 거품 논란까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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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에이션으로 서정권씨 아내, 서정후씨 며느리로 넣는 사람이 있다.[2] 아마 그 당시 인종차별 때문에 한국 학교를 다니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외국인학교를 다녔지만 그 곳 안에서도 백인 학생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차별로 인해 매우 힘들었다고 하였다.[3] Get It In 싱글부터는 본인이 직접 한국어 가사를 쓰고 있다.[4] 가위바위보 같은 곡처럼 단독 한국어 랩 작사 곡도 나오고 있지만 곡에 대한 평은 좋지않다.[5] 타이거JK가 본인등판에서 1집부터 한국어 가사는 본인이 썼으며, DJ Shine이 김진표와 타이거 JK에게 한국어 가사를 대필받은 것이라 밝힘.[6] 대표곡이라고 꼽히는 '검은 행복', 'Memories', '삶의 향기들'은 대부분 후렴부 보컬 훅에 무게가 더 실린 노래이며, 순수하게 랩으로 승부를 본 노래는 없다.[7] '엥? 왜 여기에 XX는 없어?', '왜 얘네가 들어가는데 얘네는 못들어감?'이라는 리스너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을텐데 평론과 상업성을 다 잡은 다른 래퍼들도 분명히 많지만 의외로 아주 확실하고 공식적인 기록이 불분명한 것이 대부분이다. 버벌진트와 이센스는 멜론같은 음원 차트 상위권 히트곡이나 그 해 가장 높은 힙합부문 앨범 판매량, 메인스트림 방송사의 시상식 수상같은 공식적으로 대외 활동이 꽤 성공한 기록들이 있어서 이걸로 상업적 성공을 데이터로서 측정이 가능하고 이와 동시에 순수 래퍼로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힙합 앨범을 랭킹에 올린, 진짜로 둘 다 해낸게 기록으로 남은 유이한 장본인들이다.[8] DJ soulscape는 래퍼가 아닌 엄연히 힙합 프로듀서이자 비트메이커로서 앨범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랭킹에 올렸으며 가리온은 상업적 성과나 대외적 활동면에서 성적이 너무 약한 편이고 랩 뮤직으로 랭킹에 오른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DJ DOC는 상업성에서는 버벌진트와 이센스를 가볍게 압도하지만 그들의 작업물을 순수 힙합이라기엔 1990년대의 댄스 뮤직 요소가 여전히 강하게 남았던 시대의 유산인지라 순수한 래퍼로서의 성과라고 보기는 어렵다.[9] 가리온의 MC 메타가 말했듯 음악 트렌드에 영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는 래퍼로서 자기 관리에 소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10] 스눕독의 비판은 개성없이 천편일률적인 플로우(주로 트리플렛 플로우)로만 랩을 하는 후배들에 대한 비판이지 '트렌드에 민감하지 말라는 의견이 아니다. 다른 영상에서는 오히려 젊은 친구들의 놀이와 유행을 존중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링크.[11] 그래도 2000년대 초반에는 에이스로 손꼽히며 MBC 음악캠프나 케이블 음악 채널에도 종종 등장했었다.[12] 참고로 이 곡의 코드 진행은 당시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알 켈리의 'I believe i can fly'의 코드 진행과 똑같다고 한다. 멜로디가 달라서 표절은 아니고, 당시엔 알앤비 장르 자체가 익숙하지 않던 상황이다 보니 레퍼런스로 삼은 걸로 보인다. 성시경이 자신의 라디오에서 알 켈리 관련 이야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13] 태양의 후예 OST인 <Always>가 윤미래의 곡이다.[14] 애초에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힙합 시장 파이가 커질 수 있었던 건 '쇼미더머니'의 영향이 제일 컸다. 해당 프로그램을 부정적으로 보는 현역 음악가들 조차 시장을 키웠다는 점은 하나같이 인정할 정도.[15] 업타운과 불화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면서 자연스레 다른 무브먼트 크루들과의 교류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