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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1:45:12

이그나시오 소코

이그나시오 소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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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27px-UEFA_Euro_1964.svg.png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우승 멤버
}}} ||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파일:소코 레알 마드리드.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이그나시오 소코
Ignacio Zoco
본명 이그나시오 소코 에스파르사
Ignacio Zoco Esparza
출생 1939년 7월 31일
스페인국 가르데
사망 2015년 9월 28일 (향년 76세)
스페인 마드리드
국적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84cm / 체중 81kg
직업 축구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주발 오른발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에스페란사 (? / 유스)
CD 오베레나 (1957~1959)
CA 오사수나 (1959~1962)
→ CD 이루냐 (1959 / 임대)
레알 마드리드 CF (1962~1974)
경영 레알 마드리드 CF (1994~1998 / 대표)
레알 마드리드 CF (2014~2015 / 명예 회장)
국가대표 25경기 1골 (스페인 / 1961~1969)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
4.1. 사망
5. 기록
5.1. 대회 수상
6. 소코를 향한 말, 말, 말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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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소코는 나바라의 가르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에스페란사에서 뛰었고, 1957년에 지역의 아마추어 팀인 CD 오베리나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9년에는 CA 오사수나로 이적하며 이때부터 미드필더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1.1. 레알 마드리드 CF

그리고 1962년에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경력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아만시오 아마로, 루시앙 뮐러와 함께 당시 '저승사자 군단'이라고 불리던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첫 시즌에는 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이후 1965년까지 팀의 4년(소코가 뛴 때부터 세면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1965-66 유러피언컵에서 주장인 프란시스코 헨토를 기점으로 우승하며 1960년대 Ye-yé 마드리드에서 미드필더로 뛰며 팀의 활력소가 되었다.

1960년대에 Ye-yé 마드리드라고 불리는 레알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용감한 젊은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었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12시즌 동안 레알에 헌신하면서 7번의 리그 우승, 1번의 유러피언컵, 2개의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을 했다.

그러다 1971년에 프란시스코 헨토가 은퇴하며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되었다.[1] 이후 은퇴한 1974년까지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소코 이후에는 아만시오 아마로가 주장이 되었다.

그리고 레알에서 치른 마지막 경기가 꽤 드라마틱했는데 그 이유는 1973-74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전이 바로 엘 클라시코였기 때문이다. 경기 결과는 4:0 대승이었고, 소코는 후반 39분에 라몬 그로소와 교체되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한편 경기 후에 3주장 라몬 그로소의 양보 덕분에 소코는 용감한 몸짓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아름답게 은퇴했다.
통산 434경기 17골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알 마드리드 레전드에 등록되었다. #

2.2. 국가대표 경력

1961년 4월 19일에 카디프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한편 출전 당시 2부 리그의 CA 오사수나 소속으로 출전하며 이미 장래성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그러다 1963년 12월 1일에 벨기에전에서 전반 22분에 동점골을 넣었으나 결국 2:1로 패배했다.

그리고 1969년 2월 23일에 벨기에를 상대로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2.2.1.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던 소코는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명단에도 들었다.

첫 경기 헝가리전에서 오른쪽 더블 볼란치로 출전하며 팀의 2:1 승리에 기여했다.

결승 소련전에서도 같은 포지션으로 출전했다. 그리고 후반 초반에 이고르 치슬렌코가 스페인 수비수 3명을 제치자 치슬렌코를 넘어트렸다. 그러나 주심은 경기를 계속 진행시켰고, 2:1로 승리하며 첫 유로 우승을 했다.

2.2.2.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소속 팀 레알에서 유러피언컵 우승도 거머쥔 소코가 이번에는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 참가하며 이 대회가 첫 월드컵이 되었다.

1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선발 출전했고 팀은 2:1로 패배했다.

2차전 스위스전에서는 비야롱아의 2-5-3 포메이션에서 센터백에 가까운 위치에서 뛰었다. 그리고 팀은 2:1로 승리했다.

3차전 서독전에서 주장 프란시스코 헨토가 나오지 않자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다. 하지만 팀의 2:1 패배를 막지 못하며 결국 3위로 탈락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당시 미드필더 치고는 큰 키인 184cm로 피지컬을 이용한 플레이를 펼쳤다. 또한 대단한 기술은 없지만 경기장에서 중요한 존재감과 상대의 게임을 파괴하는 훌륭한 능력을 가진 대단한 힘을 가진 선수였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때로는 센터백으로도 뛴 만능 선수였다.

그리고 자신이 놓친 공에 피해를 주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공격에 합류하는 냉철하고 원활한 선수다. 그는 그의 충성, 정직 및 헌신으로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4. 은퇴 이후

은퇴한 해인 1974년에 싱어송라이터 마리아 오스티스와 결혼했다. 그리고 은퇴 후에도 소토는 레알의 선수 협회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여전히 레알 마드리드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이후 1994년 1월 13일에 미겔 앙헬 곤살레스를 대신해 레알 1군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1997-98 시즌까지 맡았으며 시즌 후에는 막 은퇴한 첸도가 새로 맡았다.

2014년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사망한 후에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장이 되었다.

4.1. 사망


2015년 9월 28일에 마드리드에서 백혈병으로 인한 오랜 투병 끝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 # #

그의 시신은 라스 파스 데 알코벤다스 장례식장으로 옮겨졌고 9월 30일에 팜플로나의 산 호세 시립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레알 구단의 대표는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였으며, 장례식에서 프란시스코 헨토, 비센테 델보스케, 아만시오 아마로, 파친 등이 참여했다. #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와 선수단은 월요일에 훈련을 잠시 멈추고 소코에게 경의를 표했다. 알바로 아르벨로아는 트위터에다 "축구와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이그나시오 소코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D.E.P.[2]"라는 트윗을 올렸다. #

결국 소코 역시 레알의 명예 회장인 도중에 사망했고, 다음 명예 회장은 프란시스코 헨토가 되었다.

9월 30일에 레알 구단에서 소코를 추모하기 위해 검은 완장을 차고 나올 것이라고 했다. #

그리고 10월 7일에는 라리가에서 추모 영상을 올렸다. #

나바라에서 소코 가족에게 추모 선물을 제공한 후, 아내 마리아 오스티스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집에 있는 것이 매우 좋았다. 비록 내가 마드리드에 살고 있지만 땅이 부르고 있다. 말은 없고 감정만 있을 뿐이다."는 말을 했다.

5. 기록

5.1. 대회 수상

* 레알 마드리드 CF (1962~1974)

6. 소코를 향한 말, 말, 말


이그나시오는 훌륭한 선수였고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빨리 배우고 싶어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첫날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철학을 이해했다.
호세 산타마리아

그는 훌륭한 팀메이트이자 좋은 친구였다. 그는 정말 훌륭한 선수 중 한 명인 환상적이었다. 'Ye-yé'팀은 독특했다.
마누엘 산치스

7. 여담

* 레알 마드리드에서 레전드 대우를 받고있는 선수지만 정작 이 문서는 2022년 7월 말에 만들어졌다.


[1] 레알은 1군에 입단한 순으로 주장단을 결정하는데 소코가 제일 오랫동안 1군에 있었어서 주장이 되었다.[2] 영어의 R.I.P.와 같은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