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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05:43:46

이도메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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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omeneo, Re di Creta K.366

1. 개요2. 작곡과 초연
2.1. 후속 공연 및 개작
3. 작품에 대해4. 줄거리
4.1. 1막4.2. 2막4.3. 3막
5. 주요 음악6. 여담

1. 개요

파일:xl_avatar.jpg
1781년 뮌헨 초연때 이도메네오로 분장한 테너 안톤 라프[1]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같은 일급의 작곡가의 일생에서도 오직 한 번만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2]
-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 세리아. 모차르트가 24살때인 1780년에 작곡되었고 이듬해 1월 뮌헨의 레지덴츠 극장(Residenz Theater der München)에서 초연되었다.

시절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 있으나 역대 오페라 세리아 가운데 최고의 명작 중 하나이며, 극음악 작곡가로서의 모차르트의 재능과 역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모차르트 본인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 오페라 분야에서 모차르트가 남긴 최초의 걸작이자 음악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2. 작곡과 초연

모차르트 생애 항목에도 있지만 이도메네오가 작곡된 1780년은 모차르트와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불화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모차르트는 백방으로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다녔지만 이미 유럽 전역에 모차르트가 자기 고용주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새 직장을 구하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좌절의 연속을 겪고 있던 1780년 10월, 모차르트는 뮌헨으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주문받게 된다

모차르트는 이미 5년 전에 뮌헨의 전임 선제후였던 막시밀리안 3세(Maximilian III)를 위해 오페라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를 작곡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었다. 물론 취직 요청은 거절당했지만. 막시밀리안 3세가 1777년 사망한 후 후임 선제후로 즉위한 그의 사촌형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1724-1799)는 1781년 1월에 있을 사육제 시즌에 공연할 오페라를 주문하였고, 이 때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모차르트가 작곡가로 낙점된 것.

잘츠부르크에 있던 모차르트는 오페라 요청과 함께 대본 작가이자 뮌헨의 궁정작가였던 지안바티스타 바레스코(Gianbattista Varesco, 1735-1805)가 쓴 이도메네오의 대본을 넘겨받았다. 이 이도메네오는 바레스코 본인이 직접 창작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앙드레 캉프라(Andre Campra, 1660-1744)의 비극 오페라 이도메네(Idomenee, 1712 초연)에 사용된 대본[3] 을 이탈리아어로 각색한 것으로, 원작은 비극이었지만 바레스코는 등장인물을 좀더 줄이고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원작의 프랑스적인 분위기에 더해 자신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오페라 세리아 대본작가였던 피에트로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 1698-1782)의 스타일을 덧붙여 놓았다.

모처럼 오페라 작곡의뢰를 받은 모차르트는 이 기회에 명작을 써보겠다는 의욕이 넘쳤고, 일단 잘츠부르크에서 대강의 스케치를 완성한 후 12월에 아예 장기 휴가를 얻어서 직접 뮌헨으로 갔다. 하지만 뮌헨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선 대본의 작자인 바레스코가 문제였는데, 모차르트는 대본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으니 고쳐야 된다고 지적했지만 바레스코는 새파랗게 어린 작곡가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레스코에 대해 '음악 공연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있다.[4]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바레스코의 대본에 문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 2막에서 일단 퇴장했던 이도메네오가 이유없이 다음 장면에서 버젓이 나타나서 아리아를 부른다든가, 3막 막판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던 군중들이 엘렉트라와 이다만테가 아리아를 부를 때 다들 퇴장했다가 아리아가 끝난 후 다시 환호성을 지르면서 들어온다든가 하는 식의 괴상한 무대연출이 많이 있었는데,[5] 모차르트는 이런 식으로 이 심각한 오페라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또한 모차르트는 너무 대사가 길거나 관객이 지루할 소지가 있는 장면도 대폭 축소를 요구했다. 예를 들어 1막의 이도메네오와 이다만테의 만남이나 2막의 이도메네오와 아르바체의 대화에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반복된다는 이유로 대사를 대폭 축소하려고 했고 3막의 넵튠의 목소리 장면도 볼거리 치고는 너무 비중이 높다고 지적하면서 한 번 보여주고 지나가는 수준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물론 모차르트의 이런 요구에 대해 바레스코는 상당히 반발했는데, 결국 모차르트는 작가와 합의가 안된 사항은 그냥 해당 부분을 빼버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전술한 3막의 마지막 부분의 연출에 대해 바레스코와 합의가 되지 않자 29곡 엘레트라의 아리아 D'Oreste, d'Aiace(오레스테스! 아이아스!)와 30곡 이도메네오의 아리아 Torna la pace al core(우리의 중심에 평화가 찾아왔도다)를 그냥 빼버렸다.

대본도 문제였지만 가수들의 돼먹지 않은 태도 역시 모차르트를 크게 애먹였다. 특히 주인공급의 배역을 맡았던 테너 안톤 라프(Anton Raaff, 이도메네오 역)와 카스트라토 가수 빈센초 델 프라토(Vincenzo del Prato, 이다만테역)가 문제였는데, 이들은 되도 않는 자부심에 가득차서 작곡가의 말을 지지리도 안들었다. 안톤 라프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타의식을 버리지 못한 탓에 이도메네오가 주인공인데도 역할이 너무 적다고 투덜대면서 자신은 중창에 익숙하지 않으니 단독 아리아만 부르게 해달라든가 가사가 너무 많고 발음하기가 어려운 운율을 갖고 있어서 기교를 발휘하기 어려우니 가사를 바꿔 달라든가 하면서 손자뻘인 모차르트를 부단히 괴롭혔다.[6]

모차르트와 동갑이었던 델 프라토도 만만찮게 진상을 부렸는데, 신참 가수라 연기나 노래솜씨나 기대치에 한참 모자랐던 주제에[7] 모차르트의 지시에 대해 사사건건 투덜대고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 모차르트가 얼마나 화가 났냐면 당시 부친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썩어빠진 놈을 한대 패주고 싶다고 했을 정도.

이처럼 작곡가 말을 안듣는 주변 사람들을 구슬리느라 오페라 작업은 생각보다 진척이 더뎠다. 그래도 악보 자체가 대강 완성되어 있던 탓에 1781년 1월 중순 경에는 공연이 가능할 정도로 연주자들의 훈련도 어느정도 완료되었으며 바로 뮌헨 궁정에서 리허설이 이루어졌다. 모차르트의 능력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던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는 리허설을 보고 나서 '저 작은 머리에서 어떻게 이런 음악이 나오는 걸까?'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공연은 일정 문제로 잠시 지체되다가 드디어 1781년 1월 29일 뮌헨의 레지덴츠 극장에서 모차르트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초연때 부친 레오폴트와 누나 마리안네(난네를)를 비롯, 꽤 많은 지인들이 참석했으며 다행히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문제는 상연 일정이었는데, '행사용 작품'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던 이도메네오는 훌륭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밀려 있는 다른 오페라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초연 후 3회 정도 상연된 다음에 극장에서 내려가고 말았다.

2.1. 후속 공연 및 개작

모차르트가 남긴 편지를 보면 모처럼 작곡한 자신의 역작이 널리 공연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를 당시 독일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던 프랑스-글루크 스타일로 바꾸어서 공연을 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시기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와 크게 다투고 비인으로 떠나는 등 상당히 복잡한 인생사를 겪는 중이었기 때문에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모차르트가 빈에 진출해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1786년, 빈에 있는 아우어스페르크공(Prince Auersperg)의 소궁전에서 아마추어급 가수들에 의해 이 오페라가 다시 공연되었다. 비공식 소규모 공연이었지만 나름 이 오페라에 애착을 갖고 있던 모차르트는 공연을 위해 작품을 개작했는데, 가수와 대본작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덕분에 꽤 많은 부분을 고쳤다. 일단 이다만테의 음역을 카스트라토에서 테너로 바꾸고 이다만테와 일리아의 이중창 "Spiegarti non pos'io(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네, K. 489)", "non piu tutti ascoltati ... non temer amato bene"(K. 490) 등을 추가하는 한편 몇몇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삭제했다.

이후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 생전에는 빈 시절에 작곡된 명작 오페라들에 밀려서 공연되지 않았으며 다시 빛을 보기 위해서는 20세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20세기 초에 재발굴된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의 숨어 있던 걸작으로 각광받았으며 현재까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현재는 1781년 원작대로 공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작 버전의 공연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이는 1786년 당시의 공연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크다.

한편 1931년에는 이도메네오 초연 15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몇몇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 이도메네오를 공연했는데, 이 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도메네오를 자기 스타일로 개작해서 뮌헨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일종의 이벤트성 공연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공연되지 않는데, 다만 1984년 뉴욕 모차르트 페스티벌에서 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개작한 이도메네오가 공연된 적이 있다.

3. 작품에 대해

이 오페라의 가장 큰 의의는 선배작곡가 글루크가 주창한 '극과 음악의 일치'라는 음악정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극과 음악의 일치는 말 그대로 극의 분위기에 맞춰서 기쁠 때는 기쁜 음악,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연주하자는 것이다.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 라고 반문하겠지만 모차르트 당시에는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오페라계(특히 이탈리아 오페라계)는 가수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이 부각되고 가창력을 과시하는데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오페라의 스토리나 극적인 효과 등은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이 있었다. 작곡가와 대본작가들 역시 여기에 편승해서 인기가 높은 가수들을 섭외하기 위해 캐릭터의 일관성이나 스토리의 개연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수들의 입맛에 맞는 화려한 아리아를 잔뜩 채워 넣었다. 모차르트 역시 10대 시절에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나 '루치오 실라' 등의 오페라 세리아를 작곡한 적이 있었지만 이들 오페라 역시 가창경연대회에 더 가까왔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분위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8]

전술한 것처럼 이도메네오를 작곡할 때에도 모차르트는 당시의 오페라 관행에 젖어 있던 가수들 및 대본작가와 상당한 신경전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욕심이 컸던 모차르트는 이들의 불만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이런 고집스러움 덕분에 이도메네오는 완성도가 높은 명작이 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도메네오는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 의미와 발음을 최대한 살린 가사 처리, 개성있는 캐릭터, 군더더기 없고 일관성 있는 스토리, 깊이 있는 심리 묘사, 강렬하고 효과적인 관현악 등 이후 모차르트의 걸작 오페라에 나타나는 특징과 장점들이 이미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놀라운건 이렇게 원숙미가 넘치는 명작을 겨우 24살의 나이에 썼다는 것.[9]

관현악은 전형적인 2관 편성인데 목관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특히 클라리넷의 역할이 돋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주의깊게 들어보면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초연때 연출 문제로 빼버렸던 몇몇 아리아(전술한 D'Oreste, d'Aiace나 Torna la pace al core 등)나 부속음악들 역시 음악적으로 상당히 훌륭하기 때문에 그냥 버려진 컨셉으로 치부하기는 아깝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공연때에는 초연때 빠졌던 음악들을 가급적 포함시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설령 공연때 포함시키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음반으로 출시할 때는 빠진 곡들을 따로 연주해서 음반에 함께 수록하는 경우가 많다.

4. 줄거리

트로이 전쟁에서 미케네가 승리한 후 미케네에 협력했던 크레타 왕 이도메네오가 트로이 공주 일리아를 인질로 데리고 함대를 이끌고 귀향한다. 그런데 일리아를 호송하던 선발 함대가 폭풍에 난파되고 일리아는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이 때 크레타의 왕자(즉 이도메네오의 아들) 이다만테가 일리아를 구해준다. 늘 그렇듯이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문제는 이다만테에게 이미 엘렉트라라는 애인이 있다는 것이다.[10] 이다만테가 이도메네오가 지휘하는 크레타의 본 함대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오페라가 시작된다.

4.1. 1막

일리아의 방

오페라가 시작되면 일리아가 자신의 조국 트로이를 멸망시킨 그리스를 원망하는 한편으로는 자신을 구해준 이다만테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면서 원수의 나라의 왕자를 사랑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어 이다만테가 일리아의 방에 와서 일리아와 함께 온 트로이의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겠다면서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하는데, 일리아는 우리의 부모들이 사랑을 가로막고 있다고 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한다.

이다만테는 약속대로 트로이의 포로들을 풀어주려고 하자 엘렉트라가 나타난다. 엘렉트라는 이다만테의 포로해방 조치에 대해 힘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이다만테를 비난한다. 이 와중에 크레타 왕실의 대신인 아르바체가 나타나서 이다만테의 부친 이도메네오가 탄 배가 크레타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에 이다만테는 급히 해변으로 향한다. 이다만테가 떠난 후 엘렉트라는 일리아를 저주하면서 자신의 연인을 빼앗간 것을 복수하겠다고 다짐하고 퇴장한다.

장면이 바뀌면서 이도메네오가 탄 배가 폭풍에 휩쓸리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이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이 때 넵튠이 나타나서 폭풍을 잠재우고 사라진다. 이윽고 크레타 해변에 이도메네오가 부하들을 이끌고 해변에 도착한다. 이도메네오는 살아난 것에 안도하지만 자신들을 구해주는 댓가로 넵튠에게 크레타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한 것을 괴로워한다.

이 때 이다만테가 이도메네오에게 다가온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당장은 서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기뻐하는데, 문제는 이도메네오가 넵튠과의 약속에 따라 이다만테를 제물로 바쳐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도메네오는 이다만테에게 자신을 못본 것으로 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떠나 버리고, 영문을 모른 이다만테는 오랜만에 상봉한 부친의 쌀쌀한 태도에 충격을 받는다.

1막 마지막 부분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크레타 병사들이 개선 행진을 하고 크레타 여인들이 이를 환영하면서 기쁨의 춤을 춘다. 또한 병사들을 무사히(?) 돌려 보내준 넵튠을 찬양하는 합창을 부른다.

4.2. 2막

크레타 왕궁의 왕실

크레타 왕궁에 도착한 이도메네오는 자신의 측근 아르바체와 상의하면서 이다만테를 살릴 계획을 세우는데, 아르바체는 이다만테를 외국에 숨기고 넵튠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 기다리던가 다른 신의 가호를 모색해 보자고 한다. 이도메네오는 아르바체의 계획을 승인하고 엘렉트라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다만테를 아르고스로 보낼 결심을 한다. 문제는 일리아였는데, 일리아는 자신은 이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더 이상 그리스를 원망하지 않고 크레타를 자신의 조국으로 삼을 것이며 이도메네오를 자신의 아버지로 삼겠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을 들은 이도메네오는 일리아와 이다만테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다만테에게도 일리아에게도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한다. 반면 엘렉트라는 아르바체의 계획을 무척 반기면서 트로이 노예에게 빼앗길 뻔 했던 자신의 연인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이도메네오는 이다만테와 엘렉트라를 떠나 보내기 위해 그들을 시돈 항구로[11] 데려온다. 이도메네오는 배에 타기를 주저하는 이다만테를 다그치면서 제대로 경험을 쌓고 왕이 될만한 자질이 생길 때까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드디어 배가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태풍이 휘몰아치면서 바다 괴물이 나타난다. 이 괴물은 넵튠이 보낸 전령으로 이도메네오에게 왜 넵튠에게 제물을 바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4.3. 3막

크레타 왕궁의 정원

정원에서 일리아는 이다만테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한탄하고 있는데, 이 때 이다만테가 등장해서 일리아에게 바다 괴물을 잡으러 가겠다고 선언한다. 일리아는 위험하다면서 이다만테를 말리지만 그는 사랑이 거절당한 상황에서 굳이 목숨에 미련이 없다고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는데, 이에 일리아는 자신도 이다만테를 사랑하고 있다고 '드디어' 고백하고 이에 감격한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굳게 약속한다.

두 사람이 한참 분위기를 타고 있을 때 하필 이도메네오와 엘렉트라의 눈에 띄게 된다. 이다만테와 일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엘렉트라는 크게 화를 내고 이도메네오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한탄한다. 이다만테는 이도메네오에게 왜 자신을 이처럼 쌀쌀하게 대하고 멀리 떠나보내려 하냐면서 따지는데, 이에 대해 이도메네오는 왕이 되려면 마땅히 겪어야 될 경험이자 시련이라고 이야기한다. 낙담한 일리아가 엘렉트라에게 이도메네오를 말려달라고 간청하지만 엘렉트라는 당연히 이 요청을 가차없이 무시해버린다. 이어 네 사람이 모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사중창을 부른다.

이다만테는 괴물을 잡겠다면서 나가버리고, 이어 아르바체가 급하게 이도메네오를 찾아와서 넵튠을 모시는 신전의 신관들과 크레타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잠시 후 넵튠 신전의 대사제(High Priest)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넵튠이 크레타의 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분노해서 괴물을 보냈으니 이도메네오왕은 누구를 제물로 바치기로 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따진다. 결국 이도메네오는 자신의 아들 이다만테가 제물의 대상이라고 고백하고 이에 사람들이 크게 놀란다.

장면이 바뀌어서, 넵튠 신전 주위에 왕과 신관들이 모여서 신의 진노가 가라앉기를 기도하고 있다. 아르바체가 와서 이다만테가 넵튠이 보낸 괴물을 죽였다고 이야기하자 이도메네오는 넵튠의 진노가 더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어 이다만테가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자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이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은 부친과 조국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선언한다.

이다만테가 작별을 고하고 제물을 바치는 제단으로 향할 때 일리아가 이다만테를 가로막으면서 자신이 대신 제물이 되겠다고 이야기한다. 이다만테가 일리아를 말리면서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데, 이 광경을 보면서 다들 슬퍼하지만 엘렉트라만 기뻐한다. 결국 일리아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넵튠이 데려가기를 기다리는데, 이 때 넵튠이 나타나서 제물은 바친 것으로 여기겠으며 대신 이도메네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일리아는 왕비가 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넵튠이 이다만테의 용기와 일리아의 사랑에 감복해서 이도메네오의 약속 불이행을 용서해 준 것.

이에 모든 사람들이 넵튠의 너그러움을 찬양하고, 다만 연인과 왕비자리를 빼앗긴 엘렉트라는 이대로 죽어버리겠다고 비통해 하면서 사라진다. 이도메네오는 이다만테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이다만테와 일리아의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언하며, 이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합창을 부른다.

5. 주요 음악

전체 공연시간은 초연대로 공연할 경우 2시간 반 내외이며 초연때 빠진 곡들을 추가할 경우 3시간정도까지 늘어난다. 참고로 당시 카스트라토가 담당했던 이다만테역은 현재는 소프라노가 담당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다만테가 배역상으로 남자라는 것(...). 그래서 잘 모르고 보면 3각관계에 있는 이다만테/일리아/엘렉트라를 레즈비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다만 개작 버전에서는 이다만테를 테너가 담당하기 때문에 오해받을 일이 없는데 문제는 이 개작버전이 그다지 인기가 없다는 것.

이도메네오 서곡 - D장조로 진행되며 특이하게 곡이 완결되지 않고 잦아들면서 1막의 일리아의 아리아로 그대로 연결되는데, 후대의 바그너의 수법을 연상케 한다.


1막 초반 일리아의 아리아 Padre, germani, addio (아버지여, 형제여, 안녕히) - 트로이에서 포로로 잡혀온 일리아가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하필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그리스인 남자(이다만테)를 사랑하게 된 기구한 운명을 자책한다.


1막 중반 이후 등장하는 난파 장면 Pieta! Numi, pieta! - 1막의 하이라이트로 엘렉트라가 크레타 항구에서 부르는 격정적인 아리아에 그대로 연결된다 (아래 유튜브 링크에서는 엘렉트라의 아리아는 맨 마지막 부분만 나옴). 남성 6부 합창으로 난파 중인 배 위의 선원들이 2부 합창 (테너 & 베이스), 그리고 멀리 항구에서 이를 바라보는 4부 합창으로 (테너 I/II & 베이스 I/II) 구성되어 있다. 4부 합창은 무대 바깥에서 부르도록 지정되어 있다.


2막 초반 이도메네오의 아리아 Fuor del mar (태풍이 치는 바다에서는 벗어났지만) - 넵튠에게 아들 이다만테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일리아가 자기 아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리아에게도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다면서 더욱 슬퍼한다.


2막 피날레 합창 Corriamo, fuggiamo - 바다 괴물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된 항구에서 불려지는 합창곡.


3막 일리아와 이다만테의 이중창 S'io nonmoro a questi accenti (더 이상 우리의 시련은 상관하지 않겠네) - 그간 마음을 감추고 있던 일리아가 드디어 이다만테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여자끼리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3막 넵튠의 신탁(oracle) Ha vinto amore - 3막의 하이라이트로 모차르트가 작곡에 많은 애를 먹은 부분이다. 최소 4개의 버전이 있다 (목관 버전, 짧은 금관 버전, 긴 금관 버전, swelling 대신 점음표로 된 금관 버전). 모차르트가 최종 선택했다고 믿어지는 짧은 금관 버전이 보편적으로 연주된다. 아래 링크는 긴 금관 버전이다.)


3막 엘렉트라의 아리아 D'Oreste, d'Aiace (오레스테스!, 아이아스!) - 넵튠의 신탁으로 이다만테와 일리아가 결혼하게 되자 왕비의 자리를 빼앗긴 엘렉트라가 오레스테스와 아이아스가 느꼈던 고통을 이제 알겠다면서 분노와 비통함을 호소한다.[12]

6. 여담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에는 드물게 작곡 및 공연 히스토리가 자세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다. 당시 이도메네오에 올인했던 모차르트는 자기 부친 레오폴트에게 거의 일일보고서 수준으로 뮌헨에서의 생활과 공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현재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음악학자들과 모차르트 연구가들에게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항목의 '작곡과 초연' 부분이 모차르트의 다른 오페라 항목에 비해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편지를 잘 읽어보면 모차르트가 음악뿐만 아니라 극예술 자체에 탁월한 안목과 이해력을 갖고 있는 음악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재능은 이후에 작곡된 오페라에서 제대로 밫을 보게 된다.


[1] 그림에서는 젊게 보이지만 초연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2] “Idomeneo, one of those works that even a first-class genius like Mozart manages only once in his lifetime.”[3] 이 대본은 앙투앙 당셰(Antoine Danchet, 1671-1748)라는 작가가 작성했다.[4] 이에 대해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혹시나 오페라가 엎어질까봐 두려우니 작가랑 너무 부딪치지 말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라고 타이르고 있다.[5] 이는 당대의 오페라관행에 따른 것이다. 당시의 오페라는 스토리의 개연성보다는 볼거리 제공과 가수들이 무대에서 돋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6] 예를 들어 'rinvigorir' 부분을 부를 때 i가 너무 많아서 발음하기 어렵다고 투덜거렸다.[7] 그래서 모차르트가 델 프라토에게 발성부터 일일이 가르쳐야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 항목에 있듯이 모차르트는 소시적에 보이소프라노로 이름을 날렸을 정도로 성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8] 이 시기의 이탈리아 오페라들이 오늘날 잘 공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차르트 초기의 오페라 세리아 역시 이런 약점이 있기 때문에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9] 참고로 로시니가 자신의 대표작 세비야의 이발사를 쓴 것도 24살때였다.[10] 이 엘렉트라는 아가멤논의 딸인 바로 그 엘렉트라가 맞다. 설정상으로 엘렉트라는 오빠 오레스테스가 부친의 복수를 위해 친모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애인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하는데 협력한 후 크레타로 도망쳐 온 상황이었다.[11] 시돈은 오페라 설정 상으로 크레타에 있는 가상의 도시이자 항구이다.[12] 전술한 것처럼 초연 때는 대본작가와의 마찰 때문에 이 아리아가 빠졌는데, 상당히 훌륭한 곡이기 때문에 최근 공연에서는 대부분 포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