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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7:33:4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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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오페라
모차르트 오페라 개요 이도메네오 후궁으로의 도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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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번 17번 18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모차르트의 다른 작품
교향곡 제40번 교향곡 제41번 레퀴엠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 주제에 의한 변주곡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음악의 주사위 놀이 터키 행진곡 피아노 협주곡 20번 피아노 협주곡 2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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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족
2.1. 부친2.2. 모친2.3. 부인 및 처가2.4. 누나2.5. 자녀
3. 대중매체
3.1. 문학3.2. 영화3.3. 뮤지컬3.4. 게임3.5. 애니메이션3.6. 웹소설3.7. 음악3.8. 방송
4. 성격5. 마리 앙투아네트 관련6. 절대음감7. 관광지8. 콘스탄체 관련9. 리히노프스키 공작 관련10. 의문사
10.1. 전개
10.1.1. 장례식
10.2. 독살설10.3. 현대의학적 분석
11. 프리메이슨 관련
11.1. 프리메이슨 음악
12. 작품 연주13. 기타

1. 개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가족

2.1. 부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레오폴트 모차르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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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2.2. 모친

모친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1720~1778)는 찰츠부르크 태생으로 본명은 안나 마리아 페르틀(Pertl)이었으며 부친은 찰츠부르크의 공무원으로 알려져 있다.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는 종종 여행을 다닌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찰츠부르크에서 살았던 찰츠부르크 토박이였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살에 1살 위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결혼했는데 결혼식도 찰츠부르크에서 했다. 그녀 개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

생전에 7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라 그중 5명은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2]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녀가 36살에 낳은 막내였다.
  1. 요한 레오폴트 요아힘 모차르트(Johann Leopold Joachim Mozart, 1748) - 6개월만에 사망.
  2. 마리아 안나 코둘라 모차르트(Maria Anna Cordula Mozart, 1749) - 며칠만에 사망
  3. 마리아 안나 네포무케나 발푸르기스 모차르트(Maria Anna Nepomucena Walpurgis Mozart, 1750) - 2개월만에 사망
  4.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1751-1829) -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마리안네)
  5. 요한 칼 아마데우스 모차르트(Johann Karl Amadeus Mozart, 1752) - 3개월만에 사망
  6. 마리아 크레센티아 프란시스카 드 파울라 모차르트(Maria Crescentia Francisca de Paula Mozart, 1754) - 2개월만에 사망
  7.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The Mozart

그녀는 신동으로 각광받았던 막내 아들의 연주여행에 자주 동행했으며 1777년 찰츠부르크를 벗어나고 싶어했던 아들의 구직여행에도 동행하였다. 그런데 이 여행에 따라 나섰다가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결국 사망하고 만다. 향년 58세. 파리에서 구직이 잘 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쪼들렸던 모차르트는 모친의 병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모친의 사망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모차르트가 쓴 편지를 보면 이에 대해 상당히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차르트는 이 모친의 죽음을 계기로 구직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찰츠부르크로 복귀하게 된다.

그녀의 유해는 파리의 성 유스타슈 묘지(Saint-Eustache Cemetary)에 안장되었는데, 어디에 묻혔는지 오리무중인 아들과 달리 현재에도 그녀의 묘지는 잘 보존되어 있다.

2.3. 부인 및 처가

파일:kfpkhnm.png
붉은 원 안의 여자가 콘스탄체[3]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과정에 대해서는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 부분을 참고하자.

최고의 음악가답게 가만히만 있어도 숱한 여자들이 꼬이기 쉬운 위치인데도 강간불륜을 흔히 묵인하던 시대에 신기할 정도로 바람 피우거나 애인이나 단 한 명도 들이지 않고 콘스탄체 한 사람에게 충실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자금 관리 능력과 지나친 돈낭비와 도박, 사치로 인해 경제를 말아먹고 오페라 가수로 잘나갈 수 있었던 아내와 두 아들의 삶을 괴롭게 만들었다.

콘스탄체는 그간 영화 아마데우스를 비롯 각종 매체에 나온 철부지 이미지, 뮤지컬 모차르트!에서도 콘스탄체는 무식한 천출로 나온 것, 모차르트의 부친이자 콘스탄체의 시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몹시 마음에 안 들어했던 전력 때문에 남편을 말아먹은 악처 또는 남편의 음악을 이해 못하고 사치만 즐겼던 여자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는 실제 콘스탄체가 들으면 매우 억울해할 정도로 많이 왜곡된 평가이다. 또 그녀가 남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라는 평도 있었으나, 이는 모차르트 부부가 자주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사교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나온 소문일 뿐이며 실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4]

기본적으로 베버 집안의 4자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는 모두 음악가가 되기 위한 교육과 글을 쓰는 교육을 받은 교양을 갖춘 여성들이었으며,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짜로 콘스탄체가 별볼일 없는 천박한 사람이었다면, 모차르트와의 관계도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라는 위치도 있는 데다 당시엔 이혼을 향한 사회적 시선도 나빴기 때문에 이혼남으로 찍히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평생의 이해자, 동반자가 될 신부를 고르는 일에도 평소보다 더욱 까다롭게 신경 썼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체의 친정 베버 집안의 4자매는 다들 성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친딸급의 자매들. 장녀 요제파와 차녀 알로이지아는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를 휘어잡은 명가수가 되었으며[5] 3녀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언니들처럼 전업가수가 될 수 있는 성악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성악에 재능이 있어 성악가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후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를 위해 다수의 아리아를 작곡했으며(K 383, K 416, K 418, K 419, K 538) 종종 오페라의 배역도 맡겼다.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의 콘스탄체 역은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었다.[6] 또 돈 지오반니의 빈 초연 때에도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를 담당했다. 요제파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역으로 열창하여 절찬을 받았다. 셋째 딸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의 결혼으로 전문 가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모차르트의 《대미사 c단조, K. 427》를 보면 그녀가 전문 성악기 못지 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그녀가 직접 소프라노 독창을 불렀다. 모차르트가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을 작곡할 때 그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을 정도로 성악에 대한 재능과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콘스탄체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다 사교생활로 인해 모차르트 생전에는 남편 못지않은 낭비벽을 자랑했다. 벽난로를 지필 땔감이 없어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한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게 산 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사치스럽게 살았던게 문제였다.[7] 콘스탄체에 대한 후대의 비난들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콘스탄체가 당시의 일반적인 아내들처럼 집안일과 내조에 충실하지 않고 사교 모임에나 나가고[8] 남편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결국 집안이 빚에 허덕이고 남편이 일중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부부가 겪었던 자금난의 근본 원인은 사치와 당구도박에 빠져 있던 모차르트 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계속 닦달하여 과로사로 죽게 했다던가 돈을 보고 모차르트와 결혼했다는 식의 관점은 본말이 전도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9]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해 버리자 콘스탄체는 절망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간 철모르는 안방마님이었던 콘스탄체는 극강의 생활력을 발휘했다. 우선 콘스탄체는 이미 주문받은 레퀴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여러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이어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또한 남편의 작품들로 공연을 기획하여 수익을 얻기도 했다. 또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연금을 받는데도 성공했다. 이처럼 콘스탄체는 돈과 관련된 일을 잘 챙겨서 빚도 모두 갚고 생활도 금세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어느정도 여유 있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콘스탄체는 덴마크의 귀족이자 빈 주재 외교관이었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와 가까워졌고 나중에 결국 재혼했다. 폰 니센과 콘스탄체가 가까워진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은 서로 다른 내용의 두 가지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은 평소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던 니센이 먼저 모차르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도와줄 명목으로 콘스탄체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폰 니센이 콘스탄체가 세를 내놓은 집에 거주하게 되어 세입자와 세입주로 알게 되었다가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여든간에 보통 재혼생활에서 아내가 전남편에게만 몰두하면 결혼생활이 말도 아니게 망가지겠지만 이 경우는 니센 본인도 열렬한 모자르트팬이자 덕후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은 듯.

어쨌든 콘스탄체와 니센은 서서히 가까워졌고 자연히 니센은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 및 유품을 정리, 보존하고 악보를 출판하는 일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1798년경부터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 다만 공식적인 재혼은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서 출가한 후, 콘스탄체[10]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09년에야 했다. 이듬해인 1810년에 니센은 오랜 빈 주재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본국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10년간 유럽 각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생활했다. 콘스탄체 역시 1810~1820년 10년간 새 남편과 함께 코펜하겐 및 유럽 여러 곳에서 생활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Georg_Nicolaus_Nissens_gravsten.jpg
니센의 묘비.[11]

니센이 정년퇴직을 한 후, 니센과 콘스탄체 부부는 그동안 모았던 유품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기로 했고, 제대로 모차르트 연구를 하기 위해 1824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정착했다. 모차르트의 친누나인 마리안네와도 조우하였고, 마리안네가 가지고 있던 모차르트의 자료도 넘겨받게 되었다. 충분한 자료를 확보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데 착수했다. 하지만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문만 조금 작성한 채 1826년 사망했다. 이후 이 전기작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사람이 매달린 끝에 1828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한편 1826년 니센이 사망한 후 콘스탄체는 언니 알로이지아와 동생 조피에게 잘츠부르크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당시 큰 언니 요제파 베버는 1819년에 사망했고 알로이지아 베버는 1795년 남편 요셉 랑어와 사실상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12] 막내 조피는 남편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신 가수겸 작곡가 야콥 하이벨(Jakob Haibel)이 하필 니센과 같은 해인 1826년에 사망한 탓에 미망인이 된 상황이었다. 이런 정황 덕분에 알로이지아와 조피는 콘스탄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세 자매는 함께 찰츠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알로이지아는 1839년, 콘스탄체는 1842년, 조피는 1848년에 차례로 사망했는데, 조피가 사망했을 때 상속자가 없는 관계로 세 자매의 재산은 잘츠부르크시에 증여되었다.[13] 볼프강이 35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과는 대조되게 콘스탄체는 80살이라는, 당대 기준으로 장수한 편에 속한 인생을 살며 천수를 모두 누렸다.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야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이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3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서 발기했어요"라는 등의 내용을 편지에 쓰고 이웃들에게 농담 삼아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런데 콘스탄체도 천생연분답게 비슷한 답장을 보냈다. 이런 편지내용은 그 시대에 유행한 농담이었을 뿐, 두 사람이 변태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이런 섹드립들을 나중에 니센은 모차르트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정도가 심한 내용들은 살짝 편집하거나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지워버리기도 했다.[14]

이런 민망한 편지나 자료들도 일절 버리지 않고 보존에 힘썼던 콘스탄체와 니센의 노력이 없었다면, 모차르트에 대해 지금보다 아는 게 훨씬 적었을 것이다.

2.4. 누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olfgang_amadeus_mozart_1756_j_hi.jpg
7세의 모차르트와 12세의 나넬
1763년 유세비우스 요한 알펜

누나 나넬[15](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은 일찍 죽지 않고 생존한 모차르트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남동생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모차르트보다 5살 위로 어렸을 때에는 모차르트와 같이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남매 신동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시에는 여자가 전업 음악가를 한다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16], 1770년 이탈리아 연주여행부터는 남동생과 같이 다니지 않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20대 초반에 남자친구가 생겼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했다.

마리안네는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집안에서 어머니 역할을 떠맡아야 했으며 음악교사로 집안의 생계도 꾸려가야 했다, 이런 탓인지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인 32살이 되어서야 잘츠부르크 법관이었던 프란츠 폰 베르흐톨트 추 존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와 결혼하여 자신의 집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길겐(st. Gilgen)에 정착했다. 이 존넨베르크는 이미 결혼을 2번이나 했고 전처에게 낳은 자식도 5명이나 있었는데, 다만 돈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마리안네와 존넨베르크는 3명의 아이를 낳는데 첫째 아들은 외할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길렀으며 막내 딸은 1년만에 죽었다.

1801년 결혼 18년만에 남편이 죽자 마리안네는 4명의 의붓자식과 2명의 친자식을 데리고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의붓 자식들이 장성해서 슬슬 독립한데다 넉넉하게 유산을 물려받아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소일거리 차원에서 음악교사를 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복귀할 당시 이미 나이가 50살이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와 관련해서 마리안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820년 콘스탄체와 니센 부부가 잘츠부르크에 오면서 부터이다. 마리안네는 그간 며느리를 몹시 싫어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콘스탄체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모차르트 사후 두 사람은 일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런 사정때문에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에 재혼남을 데려온 콘스탄체를 처음에는 쌀쌀맞게 대했다. 하지만 콘스탄체와 니센이 자신의 남동생 모차르트의 연구와 자료수집에 열중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직접 그의 고향까지 찾아온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모차르트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악보 등의 중요한 자료 일체를 콘스탄체 부부에게 제공하였으며, 모차르트와 가깝게 지냈던 증인으로서 그의 행적을 증언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마리안네는 1825년경부터 시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1829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기 얼마 전 마리안네는 조카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계부 니센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간 희미하게 존재여부만 알고 있다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참고 링크

2.5. 자녀

모차르트 부부는 총 6명의 자녀들을 낳았지만 전술했다시피 차남과 막내아들 2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나머지 자식들은 1년 내에 모두 사망했으며 한 명은 사산했다.
  1. 라이문트 레오폴트 - 1783.6.17.~1783.8.19. 장남.
  2. 카를 토마스 - 1784.9.21.~1858.10.31. 차남.
  3.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 1786.10.18.~1786.11.15. 3남.
  4. 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 - 1787.12.27.~1788.6.29. 장녀. 다른 요절한 자녀들 중에서는 그나마 6달 동안 살아 있었다.
  5. 안나 마리아 - 1789.11.16. 사산(死産).
  6. 프란츠 사버 볼프강 - 1791.7.26.~1844.6.29. 4남.

차남인 카를 토마스(Karl Thomas Mozart, 1784~1858)[17]이탈리아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다 중도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살면서 이탈리아에 아버지의 음악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4남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음악가 및 음악 교사로 일했다. 다만 아버지가 죽기 4달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으며, 음악적으로는 당대의 음악적 조류(낭만파)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빈 고전파 풍의 구식작법으로 곡을 썼기 때문에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자세한 것은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문서로.

이 두 아들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직계는 여기서 다 끊겨버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남은 후손들은 모두 방계다.

3. 대중매체

3.1. 문학

3.2. 영화

3.3. 뮤지컬

3.4. 게임

3.5. 애니메이션

3.6. 웹소설

3.7. 음악

3.8. 방송

4. 성격

다정하고 너그러웠다. 그래서 늘 집으로 손님을 불렀다.[출처1] 다만 남아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이는 즉흥적, 충동적으로 유쾌한 성격이었는데 이런 유형은 사실 사회성이 매우 떨어지는 성격이다.[20] 모차르트는 술친구, 도박놀이 상대 등은 많았지만 속내 털어놓을 동종업계 종사자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런 결핍된 사회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다니며 성인 작곡가들과 같은 일선에 뛰어들어 그들과 경쟁하며 그 또래 유년의 경험들을 해보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21] 실제로 모차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에 묘사된 것처럼 돈 문제에 어수룩하거나 빈틈이 많은 사람이 아녔다. 도리어 돈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해 빈축을 자주 샀었고, 대주교에게 대들 정도로 한 성깔 하던 사람이었다.

모차르트는 우아한 옷을 좋아했다. 테너 가수 미하일 켈리가 회상한 리허설에서의 모차르트는 "그는 진홍빛 펠리스[22]와 금빛 레이스가 달린 삼각모를 입고 무대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출처2]

모차르트의 목소리에 대한 콘스탄체의 증언으로는 "말하는 데는 다소 부드럽고 노래에는 섬세한 테너였지만, 어떤 것이든 그를 흥분시키거나 흥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땐 힘차고 활력이 넘쳤다."[출처3]

그는 당구와 춤을 즐겼고 카나리아와 찌르레기, 개 등을 키웠다. 그리고 승마도 즐겼다.[출처4]
모차르트는 빈 음악계의 중심에 살았다. 따라서 동료 음악가, 연극 공연가등 다양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요제프 하이든과도 친구였다. 호른 연주가 로이트게프와도 친구였는데, 모차르트가 쓴 호른 협주곡 4곡은 전부 그를 위한 곡이다. 모차르트와 로제트게프는 종종 친근하고 짖궂은 농담을 주고받았다.[출처5]
그리고 마감일이 다가옴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작곡을 마무리했고, 긴 시간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 그도 스케치를 하고 난 후 작곡하곤 했는데, 베토벤의 것과는 달리 모차르트가 죽은 후 콘스탄체가 그것들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건 별로 없다.[출처6]

또,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재능을 알아보고 2년동안 무료 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훔멜은 모차르트의 한 공연에서 9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다.[출처7]

그는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대결을 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는 즉흥연주를 하거나 자신의 작품 중 여러 곡을 연주해야했다. 결과는 사실상 무승부였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에 대해 "클레멘티는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3악장 구절에서 발휘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연주는 크뢰처[29]만큼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정비공이다."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정신과 우아함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특히 그의 아다지오와 변주곡에 압도되었다."

두 사람을 라이벌로 묘사하려는 후대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들의 만남이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당시 클레멘티는 좀 더 거장적이고 현란한 스타일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그를 폄하한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출처8]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음모로 인해 그의 오페라가 올려지는데 장애물이 생긴다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특정 직업에 대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두 작곡가의 관계가 이를 넘어서 신랄했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친구나 동료로 생각했고, 서로의 일을 지지했다. 살리에리는 악장으로 임명 되었을 때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한 적이 있고, 서로 작곡을 같이 하기도 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가르치기도 했다.[출처9]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는 지저분한 유머를 즐겼다. 편지에는 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와서 그가 배설물에 집착하는 분벽음욕증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편지 해석 그는 엉덩이를 핥아라(Leck mich im Arsch) 등의 카논을 작곡해서 친구들과 함께 부르곤 했다. 슈뢰더라는 학자는 18세기에는 지저분한 유머가 훨씬 더 대중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 당시 독일의 인기 극장에서는 그런 지저분한 유머에 관한 코미디를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앨런 던데스는 그런 유머가 독일 민족 문화의 특정한 특징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 근거로 독일 민속학에서 항문에 관련된 지나치게 많은 문헌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었다. 그가 쓰거나 부른 몇몇 구절들은 독창적인 게 아니라 당대 민속과 문화의 일부거나 민요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모차르트가 심리적 병이 있었을거라고 생각했다.[출처10]

모차르트가 말년에도 고소득을 꾸준히 유지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론 해가 지날수록 모차르트의 수입은 곤두박질쳤다. 실제로 1789년 5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많은 찬사를 받은 연주회지만 정작 수입은 터무니 없이 적다."라는 글귀가 있으며, 이것은 모차르트 생애 마지막 3년과 시기가 정확히 일치한 제8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1791)이랑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시기에 수도 빈에선 경기 침체로 인해 중산층의 문화예술 소비가 크게 줄어 오페라 활동이 상당수 중단되었으며, 연주회도 상당수 흥행 실패하는 등 전반적으로 음악가 및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으로 혹독한 시기였다.

빈에서 머물렀던 시절인 1783년부터 1791년 사이 모차르트의 평균 수입을 살펴보자면, 현금 소득만 따지면 1,700 플로린, 선물 등 비금전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2,500플로린에 육박할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튀르크 전쟁 중 모차르트의 수입이 급감한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모차르트 전성기 기준 벌이에 비한 것이지 일반인들과 비해서는 많이 버는 편이었다. 특히 모차르트가 죽은 해인 1791년의 수입이 5,700플로린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는데, 이는 당시 궁정 중상급 관리 연봉 500플로린의 10배가 넘는 액수였다.

정리하자면 모차르트의 수입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으나, 전쟁이나 병약한 아내의 요양 크리 같은 당시 상황, 수입이 나아지자 바로 좋은 아파트로 이사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빵점 수준의 재무관리 수준이 맞물려 모차르트가 죽을 무렵 상당히 많은 부채를 갖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외에도 모차르트는 여성편력이 심했다는 이미지가 있고 영화'아마데우스'도 그런 이미지를 상당히 부각시켰지만 특별히 다른 여자를 사귀었거나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후술되는 아내 콘스탄체와 마찬가지로 사교모임을 즐겼던 덕분에 잘 논다는 이미지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돈 조반니를 한창 작곡 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차르트를 찾아온 자코모 카사노바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오페라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을 정도. 사실 카사노바의 행동이 모차르트가 보기에도 너무 도를 넘긴 했다[33]. <돈 조반니>를 작곡할 당시에도 '꼭 이런 부도덕한 호색한을 주인공으로 해야만 하나'하고 갈등했고, 결국 작곡이고 뭐고 다 때려칠까 하다가 "어차피 오페라의 스토리는 돈 조반니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각본가의 말을 듣고 작곡을 계속했을 정도였다.[34]

5. 마리 앙투아네트 관련

6살의 모차르트는 1차 연주여행에서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빈 궁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장난을 치다 넘어지자 모차르트보다 1살 많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35]가 일으켜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때 모차르트는 대담하게 공주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혹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당돌하게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더 큰 후에 보자"고 했다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모차르트의 당돌하고 조숙한 귀여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중에 보자고 답해줬을 가능성은 낮다. 당시 유럽귀천상혼 관습에 따르면 왕가의 자식은 일반 귀족과도 안 되고, 오직 다른 왕가의 자식과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봉신 영주나 가신도 아닌 평민 남성과 공주의 결혼이라는 건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정치적 조롱을 감당해야 하며, 왕가의 공주가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데 대한 국내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심하면 반란)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36] 게다가 당시 왕족급의 귀족들에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절대 아니라 일종의 사업이자 정치였다. 정략결혼은 오늘날에도 동서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현대의 경우에 이런저런 차별이 실존한다 해도 일단은 '모든 인간의 평등'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근세 유럽에서는 격에 맞지 않는 결혼(귀천상혼)은 아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졌음을 명심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이 악단을 꾸리자, '돈도 없는데 그런 짓을 왜 해'라고 편지를 보냈다.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의 국제전쟁과 검소한 성품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긴 통치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냥 마리아 테레지아가 당시 고작 여섯 살짜리 꼬마였던 모차르트의 귀여운 제안에 장단을 맞춰준 것에 가까울 것이다. 굳이 귀천상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정도 나이대 어린아이의 당돌하고 귀여운 청혼엔 누구라도 장난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애초에 일국의 왕이 꼬마아이가 멋모르고 하는 말에 정색하는 것도 웃긴 일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 정도 도량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6. 절대음감

모차르트가 7살이었던 때,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반음 올릴 때와 반음 내릴 때의 음높이가 다른 건가요?"라고 질문했고,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아노를 쳐주며 "그건 네가 잘못 들은 거고 반음을 올리든 내리든 반음만큼의 음높이는 일정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온음, 반음 개념을 초월하여 음을 18등분해서 들을 수 있었던 컴퓨터급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5/18반음(27 cents)과 4/18반음(22 cents)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음감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한 상대음감 능력이라 볼 수 있다.

당대 바로크 시대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표준적인 조율 방식이 아니었으며, 음계를 구성하는 비율뿐 아니라 기준음의 기저주파수 자체가 연주회 장소마다 달랐다. 구체적으로 현대음악에서 A4=440 Hz인데 17세기의 베네치아에서는 465 Hz, 18세기 프랑스는 392 Hz, 독일은 415 Hz였으며,[37] 교회는 반음[38] 낮은 튜닝을, 연주회장은 반음 높은 튜닝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현대음악에서 의미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는 엄청 괴로운 음악적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연주회 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가 매번 가는 곳마다 오케스트라를 갈아 뒤엎고 하프시코드까지 새로 두드려 맞추지 않은 이상 예민한 상대음감이었을 수 있다.

7. 관광지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더불어 관광지와 기념관/박물관을 마구 양산하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25년이나 살았던 그의 생전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잘츠부르크가 정작 그의 사후에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막대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모차르트가 이 작은 도시 하나 벗어나려고 엄청나게 발버둥 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러니. 여튼 국제 모차르트 재단 본부도 여기 있으며 음악대학의 이름은 아예 라틴어로 모차르테움(Mozarteum)이라고 지었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도시가 되면서 애처러운 입장에 놓인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전술한 요제프 하이든의 아우인 미하엘 하이든(1737~1806).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지 못해 안달을 냈던 모차르트와 달리 무려 43년간 잘츠부르크에서 충성스럽게 음악 활동을 했고, 잘츠부르크에 있던 시절의 천방지축 모차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였다. 당시 콜로레도 대주교가 모차르트를 별 망설임없이 내쫓았던 것도 미하엘 하이든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잘츠부르크 시민들 상당수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정도다. 하긴 하이든이라면 형 요제프 하이든은 유명해졌지만 미하엘 하이든은 웬만한 사람은 모르는 판국이긴 하다. 조국 오스트리아나 잘츠부르크도 이러는 판국. 이러다보니, 현재 잘츠부르크에는 미하엘 하이든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고사하고 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경인데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혹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는 모차르트 팬이 있다면, 모차르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미하엘 하이든에게 마음 속으로 안부라도 전하고 오자.

일전에 잘츠부르크는 동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도 캐치프라이즈는 '모차르트의 고향'이었다. 이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에 관련된 기념품 이것저것 많은데 특히 모차르트 초콜릿 혹은 모차르트 봉봉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 쿠겔이 유명하다. 1890년 파울 퓌르스트(Paul Fürst)라는 사람이 개발한 초콜릿으로, 오리지널 모차르트 쿠겔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내수공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지며 미라벨이나 레버 등 다른 브랜드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도 있다. 물론 오리지널은 잘츠부르크 현지에서만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많이 보이는 모차르트 얼굴 찍힌 초콜릿은 다 미라벨 같은 데서 만든 유사품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도시가 바로 프라하. 현재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머물렀거나 다녀간 곳이 모조리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되어 있다. 실제로 생애 후반에 모차르트는 오히려 빈보다 프라하에서 더 각광을 받았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비롯해서 교향곡 제38번(일명 프라하)이나 오페라 티토 왕의 자비 등의 중요한 작품들이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심지어 모차르트 사후 빈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던 반면, 모차르트가 죽은 지 일 주일 후 열린 최초의 추모식도 프라하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을 정도다. 현재에도 프라하는 모차르트 생전부터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준 도시였다는 이유로 '모차르트 도시'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도 대부분 프라하에서 이뤄졌다.

한편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에서도 해마다 음악회가 벌어지는데, 이곳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딱 하나 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여행 도중 마차의 말을 갈아타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다는 것. 실제로 이곳은 잘츠부르크가 인접한 오스트리아의 국경과도 가까운 동네이기도 하다.

독일 남서부 만하임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이 도시에 며칠 거주하는 동안 미사를 드렸다는 표지석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각 도시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우습게 보는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빈. 당연히 빈에도 모차르트와 관련된 기념시설이 넘쳐난다. 또한 모차르트 외에도 베토벤, 슈베르트 등 세계 음악사를 빛낸 여러 대작곡가들이 모두 빈에서 주요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아마 만하임이나 로텐부르크 수준으로 이들이 거쳐간 곳을 마구 기념했다가는 아예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 되 버릴 것이다.

사실 유명인이라면 이런 것은 흔하다. 베토벤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베토벤의 고향 과 일생 대다수를 살다가 간 빈이 서로 베토벤의 고향이라며 홍보하듯이 모차르트나 슈베르트,하이든 등등 유명 음악가도 여러 도시가 이렇게 홍보한다.

1991년, 그의 사망 200주기를 기념하여 전세계적인 모차르트 열풍이 불어닥쳤다. 한국의 남양유업의 꼬모란 유산균 요구르트 광고에 모차르트의 초상을 CG로 입히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했던 배한성의 '모차르트도 넘어간 맛'이라는 나레이션까지 삽입된 광고까지 나왔었다.

8. 콘스탄체 관련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양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독하게 지냈던 잉꼬커플이었지만, 파혼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1782년 봄 무렵, 어떤 파티에 참석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사람들과 내기를 걸고 게임을 했다. 콘스탄체는 내기에 져서 어떤 젊은이에게 엉덩이 크기를 재게 하는 벌칙을 받았는데, 그 모습을 본 모차르트가 크게 분노했다. 파티가 끝난 뒤 둘은 큰 싸움을 벌였고, 급기야는 파혼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다행히 며칠 뒤 모차르트의 화가 풀려서 파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9. 리히노프스키 공작 관련

베토벤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리히노프스키(1761~1814) 공작이 모차르트와도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모차르트와 리히노프스키는 같은 프리메이슨 소속으로 관련 모임에서 종종 만난 적이 있었다. 1789년 모차르트는 베를린 연주여행때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동행하기도 했다.

1789년경 공작은 모차르트에게 거액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씀씀이가 헤펐던 모차르트는 이 돈을 갚지 못했고, 공작은 이 돈을 받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오스트리아 법원은 1791년 11월 이 돈을 갚으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선고가 내려진지 한달도 안돼서 모차르트가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채무 변제도 흐지부지 되었다. 다만 모차르트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후원 차원에서 빚의 일부를 갚아주었다고 한다.

10. 의문사

10.1. 전개

모차르트는 한참 명성을 구가하고 있던 35세 나이에 급사한다. 40살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천재는 단명한다'라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 인물.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모차르트는 평균은 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평균의 함정으로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너무 높아서[39] 청년기를 맞이한 사람치고 단명한 것은 맞으므로 전체 평균에 대입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인간은 히드라처럼 전 생애에 걸쳐 사망률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만 1세 이전 사망률이 매우 높고 아동기 후반에서 청소년기 초반으로 갈 때 가장 사망률이 낮으며,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갈수록 사망률이 증가하고, 노인기에서는 예외없이 전부 죽는 형태다. (대체적으로 60세 전후가 당시 수명)[40]

모차르트는 병에 걸린 지 15일 만에 사망했는데, 주치의는 모차르트가 죽을 당시의 상태만 가볍게 기록하고 부검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고, 추측만 무성했다. 사인은 '열과 발진, 사지통(四肢痛)'.

10.1.1. 장례식

명성과는 달리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친척들과 살리에리를 포함한 일부만이 참석했는데, 눈보라가 치는 기상여건속에서 모두 빨리 돌아가 버리고 매장자 홀로 묘지로 향했다는 쓸쓸한 설이 있다. 그의 유해는 빈 외곽에 위치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묘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빈의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던 베토벤의 장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그런데 이런 모차르트의 장례는 장례비가 없어서 그랬던것이 아니다. 다만 매장지까지 아무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칙에 따라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르는 데다, 사후 묘지 관리도 좋지 않아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 시절 황제 요제프 2세계몽군주로서 사회 전반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시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장례절차에 관한 규정이었다. 요제프 2세는 전염병에 따른 피해를 막고자 전염병으로 죽었거나 죽었다고 의심되는 환자의 사체는 반드시 개인매장이 아닌 공동묘지에 묻도록 했다. 사회 고위층들이 이런 정책에 대해 반대함에 따라 개인매장을 허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나중에 잡혔지만, 저때 당시 장티푸스 의심 환자로 보였던 모차르트는 결국 법령에 의해 강제로 공동묘지행이 되었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서 모차르트는 12구 가량을 공동 매장하는 곳에 묻혔고,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한해선 영화 <아마데우스>의 묘사대로다. 하지만 이건 아내가 무슨 돈을 엉뚱한 데 쓰고 다니느라 돈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 법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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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세워진 모차르트의 가묘
앞서 설명했듯이 사진 속의 위치에 모차르트가 아직도 묻혀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며, 기록을 재조사했을 때 공동묘지의 이 자리쯤에 묻혔었다는 것만을 반영해서 세워진 가묘라고 한다. 모차르트가 묻힌 공동 매장 방식은 시신을 한 번 매장하면 끝인 게 아니라, 10년 정도 지난 후에 뼈만 남은 시신을 파내 가족이나 후견인들에게 인계시키거나 이장한 다음 또 다른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설령 진짜 모차르트의 시신이 여기 묻혔었다고 해도 현재는 이 공동묘지에 아예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후 DNA 분석을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까지 동원하는 등의 엄청난 노력을 들여 시신을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전혀 진전이 없다. 남아있는 건 적갈색인 그의 머리카락 일부분. 그 외에 모차르트의 두개골로 알려진, 묘지 관리인이 시신을 다시 파내는 과정에서 몰래 빼돌려서 보관해왔다고 전해지는 두개골이 있지만 2006년 DNA 감정결과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와서 현재까지도 논란 중인 상황이다.[41] 또한 머리카락도 진짜 모차르트의 것이 맞는지 논란이 있다.

10.2. 독살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많이 퍼져 있다. 국내에서는 영화 '아마데우스'가 크게 히트하면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설이 널리 퍼졌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살리에리가 살아있을 때부터 있었던 소문이다.[42] 또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1953년생)와 살리에리를 연기한 F. 머레이 에이브러햄(1939년생) 두 배우 나이차 때문에 실제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나이차도 많을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 둘은 6살 차이다.[43]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독살했다는 주장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희곡에서 다루어지며 1897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Mozart et Salieri)》(1897)를 작곡하기도 했다. 20세기에서는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1979)와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전술한 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들에게 살리에리 독살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피터 셰퍼의 희곡(및 영화)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의 음악활동을 방해하고 심적 압박을 가해서 죽게 만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1823년 11월, 베토벤의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44]는 당시 노환으로 투병중이던 살리에리를 만나 그 소문에 대한 진실까지 질문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살리에리는 처음에 면회를 거부했으나,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그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모셀레스는 의사와 살리에리의 딸 요청으로 그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요구대로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죽도록 싫어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죽는데 난 털끝만큼도 그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나에게 그런 오명은 반갑지 않다.
모셀레스는 베토벤에게 이걸 이야기했는데, 비서인 안톤 쉰들러[45]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를 미워하고 말이라는 칼로 그를 상처낸 범인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말했다. 이에 모차르트, 살리에리 모두에게 음악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베토벤은 "나로선 누가 범인이니 뭐니 구분할 생각이 없거니와, 살리에리를 믿는다"고 의견을 밝히며 그 소문을 못미더워했다.

또한 살리에리는 당대에는 빈에서 가장 잘나가는 음악가였으며 영화에서는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75살로 죽기 1년 전까지 비인 황궁의 악장으로 재직했을 정도로 한평생을 평온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는 당시 빈에서 19세기 초반까지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후에 대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많은 젊은 음악학도들을 가르쳤는데, 심지어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도 살리에리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서로 불편한 관계이긴 했지만 철천지 원수까지는 아니었으며 상황에 따라 서로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는 그런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보았다시피 그는 일에 매달리다가 몸 관리를 못해서 사망했으며 살리에리는 딱히 모차르트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자세한 것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항목으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당시 모차르트 살해 의혹을 받은 사람들은 살리에리 말고도 대법원장, 궁중대신들, 귀족, 다수의 음악가들도 포함됐었다. 단지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그리고 영화 아마데우스가 이를 진실처럼 왜곡했을 뿐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전형적인 가짜 뉴스의 희생자로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고전파 음악가였고, 모차르트는 낭만주의를 태동시킨 과도기에 속하는 음악가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음악 중에 낭만주의 형식을 띤 음악은 단 1곡도 없고, 이런 곡을 작곡했었단 주변 지인들의 증언도 어디에도 없다. 즉, 이 둘은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달랐던 음악가로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작품들 흥행을 시기, 질투한 편지들만 남아있는 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시기에 실제 기록들의 전부다.영상

당대에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후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낭만주의의 성격을 띤, 즉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던 작품들이었으므로 작품이 대박을 치거나 쪽박을 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례로 1791년작 《마술피리》는 초연 당시 1년간 100여 차례 공연할 정도로 대박이었고 영상, 1791년 10월 14일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와 함께 마술피리를 관람했는데, 살리에리가 "이것이 진정한 오페라다, 앞으로 계속 보러 와야겠다" 등등의 민망할 정도의 격찬을 했고 브라보를 외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는 것을 흐뭇하게 적었다. 반면 오늘날엔 불멸의 걸작으로 남아있지만, 당시엔 불과 단 5회 공연으로 막 내린[46]돈 조반니》처럼 쪽박난 작품도 있다.

반면 살리에리는 고전파 형식과 기교에 충실한 평타 치는 작품들을 꼬박꼬박 발표하였기에 믿고 보는 대중예술가적 이미지가 강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문서만 참고해도 알겠지만, 살리에리의 작품 중에서는 《돈 조반니》처럼 5회 공연만에 막 내린 쪽박 작품은 없고 대신 《마술피리》처럼 대박 친 작품도 없다. 살리에리의 작품들은 대부분 중박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다.

어쨌든 이후 낭만주의가 대세가 된 시대에 모차르트는 낭만주의 시대의 모든 음악가들의 워너비였고, 이들은 모차르트의 삶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당대에도 이미 다수의 흥행작들을 남긴 모차르트였지만, 모차르트의 추종자들은 모차르트가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라고 주장하며 당대에 응당 모차르트가 차지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빈의 궁정악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가엾게도 이들의 타깃이 돼버린 것이다.모차르트 성격상 '빈의 궁정악장'을 시켜줬대도 시키는 대로 곱게 일했겠냐만.. 카를 마리아 폰 베버 같은 음악가가 대표적으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 질투 하다못해 독살했다.'란 가짜 뉴스를 유럽 사교계에 퍼트리고 다닌 사람이다. 정보의 홍수란 요즘 시대는 가짜 뉴스가 가장 많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짜 뉴스를 가장 많이, 빨리 간파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반면 18세기~19세기엔 정보의 보편화가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므로 당시 유럽 사교계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독살했단 가짜 뉴스가 정석처럼 굳어져 버린 것.

10.3. 현대의학적 분석

2001년 전염병 전문가 Jan V Hirschmann, MD가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돼지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선모충증이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돼지고기를 날로 먹거나 덜 익혀 먹었을 경우 걸릴 수 있으며, 고열이 나고 근육통을 일으키며 쇠약해지는, 지금도 적합한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찌나 좋아했던지, 아내 콘스탄체에게 돼지고기를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내가 지금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알겠소?
바로 포크 커틀릿이지. 어찌나 맛이 좋은지!
나는 당신의 건강을 축원하며 먹는다오.

모차르트가 병에 걸리기 44일 전에 보낸 편지. 선모충증의 잠복기는 약 50일이다. 비록 선모충증 이론이 모차르트의 증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병의 진행 과정을 고려해 볼 때, 특히 선모충 감염의 최종 단계인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오랜시간 관심을 끌고 온갖 설이 난무하는 주제로, Faith T Fitzgerald, MD는 Mozart의 사망원인에 대해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하여 논문도 발표했다. 위의 BBC 기사에서 Dr. Fitzgerald는 선모충증 이론이 '150개의 가설더미 위에 그냥 하나 더 얹은 것 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의 진단은 "acute rheumatic fever, with carditis, polyarthritis, erythema marginatum, and possibly, chorea"라고 한다.[47]

모차르트의 가계에서 어떤 단명에 관한 유전적 요인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의 누나인 마리안네, 아버지 레오폴트, 그리고 그의 아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가 전부 환갑을 넘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 학자간에서 이견이 그나마 없는 죽음의 원인으로는 모차르트 그 자신이 몸을 막 다루었다는 사실이 있다. 모차르트는 주스가 되었든 물이 되었든 술이 되었든 과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결정타는 마지막 해 1791년, 오페라 2곡을 동시에 작곡하면서 레퀴엠까지 떠안은 결과 나타난 과로였다.

모차르트 부검 결과에는 '속립진열(粟粒疹熱: 발열과 발진을 동반한 급성 질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병으로 인한 증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여동생이 전하는 기록이다. 그녀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크게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밤색 액체를 뿜은 뒤 쓰러졌다.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한 사인의 추억 7화에서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는 모차르트가 어린 나이에 순회 공연을 다니다 성홍열에 걸린 기록을 들어 이 때 연쇄상구균에 의해 걸리는 성홍열이 제대로 치료되지 않았고[48], 그게 이후 류머티스열로 발전한 것이 사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성홍열은 심장 판막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데, 이 상태에서 성홍열의 원인인 연쇄상구균에 또 감염되면서 심장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혔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울혈성 심부전과 감염성 심내막염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11. 프리메이슨 관련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49] 회원이었고, 자신이 속한 지부의 Master Mason이 되기까지 헌신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50] 말년에 모차르트의 경제 상황이 넉넉지 않았을 때 그는 프리메이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51], 모차르트 사후 모차르트의 가족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또한 프리메이슨은 모차르트의 음악 활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마술피리를 통해 누설하여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당시 프리메이슨 서약에는 "나는 정화시키며 비밀을 지킨다. 어기면 내 목을 자르거나 혀를 내 머리에서 뽑는다."라는 조항이 있긴 하였다. 그러나 마술피리의 총책임자인 에마누엘 쉬카네더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고, 그는 1812년에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뜬다. 그래서 모차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보인다.

사실 18세기 당시든 21세기 현재든 실제로 존재한 조직으로써의 프리메이슨은 세계정부 운운하는 음모론 떡밥과는 전혀 다른, 그냥 세계구급(모차르트 당시에는 전 유럽급) 규모의 신사들을 위한 사교 클럽이다. 굳이 특징을 찾아보자면 귀족계층의 살롱을 중심으로 하던 이전 시대의 사교계에 비해 귀족은 아닌 신사계층(재산, 또는 학식을 갖춘 상위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젊은 나이부터 고압적이고 오만한 귀족들과 잦은 충돌을 벌여왔던 모차르트가 '대등한 관계'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오스트리아의 프리메이슨 입장에서도 모차르트와 같이 대단한 명성을 가진 유력인사의 가입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즉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는 것은 그냥 "모차르트는 당대 오스트리아(빈)의 지식인, 교양인 및 재산가들과 자주 교류했다"의 한가지 형태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프리메이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 역시 프리메이슨과 같은 사교조직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상부상조였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사업가나 기술자, 법률가등의 단원이라면 클럽 내에서 얻은 인맥을 통해 서로 직업, 사업상의 도움을 주고받을 것이고, 명성은 있지만 돈은 잘 못 버는 학자나 예술가 단원이 있다면 재산가 단원들이 그들에게 경제적 보조를 해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곡을 하나 쓰면서 그동안 자신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삼아 '이 곡은 미하엘 후흐 베르크의 도움으로 쓰여졌다' 라고 한마디 달아놓으면 이는 재산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명예로운 일이 되는 것. 더 나아가 클럽 활동이 음악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역시, 프리메이슨 내에서는 당대의 다른 예술가나 지식인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으니 그 관계에서 긍정적인 피드백 역시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것.

당시 프리메이슨 서약에 "나는 정화시키며 비밀을 지킨다. 어기면 내 목을 자르거나 혀를 내 머리에서 뽑는다."와 같은 조항이 있다는 것 역시, 괜히 음모론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교 활동을 하면서 교류하다 보면 당연히 서로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될 것인데, 그런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프리메이슨에 신비주의적 면모가 상당히 섞여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시대 배경상 현대인의 기준에서 신비주의적, 오컬트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당대 기준으로는 합리적 지식의 일부였기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마술피리와 관련된 프리메이슨 음모론 역시, 프리메이슨에 대한 음모론 떡밥을 이미 줏어먹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어낸 새로운 음모론일 뿐이지 딱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는 엄연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생을 살았으며, 딱히 오컬트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교회의 프리메이슨 금지령이 오스트리아까지 미치기 전이었기 때문에, 빈의 사교계 일원들은 자동파문을 걱정할 필요 없이 프리메이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모차르트가 죽은 지 3년 후인 1794년, 프리메이슨 결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결국 사라지고 만다.[52]

11.1. 프리메이슨 음악

그는 프리메이슨을 위해 상당한 수의 작품을 작곡했고, 이들 상당수가 작품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프리메이슨 음악들은 형식적이고 율동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음악들 모두가 프리메이슨을 위하여 작곡된 곡들은 아니다. 이중에는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사용된 음악들도 포함되어 있다.프리메이슨 음악 재생 목록[57]

12. 작품 연주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지휘자로는 네빌 마리너, 카를 뵘 등이 있다. 특히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상당한 양의 레코딩을 남긴 카를 뵘 같은 경우는 아직도 대다수가 폐반되지 않아서 구하기도 쉬운 편이다.[58] 시대연주 관련해서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등도 있다.

모차르트의 건반음악은 비교적 간단한 노트에도 불구하고 난이도가 악랄하기로 유명하다. 악보 읽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간단한 만큼 한 음도 헛되이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연주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모차르트 곡은 한 음 틀리면 티가 확 나는데다 기계적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음악을 페달도 밟지 않고 감정을 살려서 연주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쇼팽 에튀드를 암보하는 음대 입시준비생에게 모차르트의 소품을 들이밀었더니 욕을 먹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59]

모차르트의 음악을 백조에 비유한 이들도 있다. 잔잔한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수영하는 백조의 다리는 쉴틈없이 바둥바둥거리고 있다나? 이런 표현을 돌직구로 느끼고자 한다면 그 간단하다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을 들어보면 되겠다.

피아노를 조금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차르트의 곡들은 옥타브가 많다거나 하지 않다. 손이 작아도 무리없이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장 음악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악곡들이 연주하기 힘든 것은 트릴과 어마어마한 노트들 때문.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항상 즐겁고 가볍게,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모차르트의 악곡들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런 느낌이 필요하다. 마치 날아가듯이 연주해야 듣는 사람이 모차르트 곡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냥 가볍고 빠르게 치다 보면 음이 모조리 빠지고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모차르트의 악곡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낌을 살려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건반을 둥글게, 정확히 누르는 타건법, 그리고 손가락과 손목에 무리한 힘을 싣지 않고 자유자재로 치는 법, 악보에 표현된 이음줄과 붙임줄[60]을 정확히 구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모차르트 악곡은 거의 페달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며 베토벤 이후의 악곡에서 느껴지는 페달을 사용한 장엄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음줄 등의 악상 기호를 정확히 표현해야만 느낌을 살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많은 연습과 훈련 위에 통통 튀는 느낌으로 연주하는 것이 모차르트 악곡 표현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옥타브 이상으로 손가락을 벌릴 필요가 없어 손이 작아도 연주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61] 경쾌하고 산뜻하게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내면의 깊이를 담아 연주해야 하기 때문인지, 모차르트의 스페셜리스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여류 피아니스트들이 많으며, 모차르트 피아노 음악의 명반을 꼽을 때 주로 거론되는 음반도 여성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것들이다.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클라라 하스킬, 잉그리드 해블러, 마리아 조앙 피레스, 우치다 미츠코, 알리시아 데 라로차 등이 모두 여성 피아니스트들이다. 물론 프리드리히 굴다, 발터 기제킹 등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남긴 명반들도 많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그의 후배들인 베토벤, 리스트, 쇼팽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방식으로 연주했다가는 본연의 느낌을 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들은 울림을 중시하고 기교를 부린다는 생각으로 연주하기 보다는 순수하게 음표에 집중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모차르트의 곡들을 기교적 측면에서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연주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모차르트는 일부 파이프오르간 작품도 남겼는데, 《환상곡 f단조 K. 608》 같은 경우는 오르간 전공자들 입장에서 난이도가 헬이라고 한다. 비록 대중적으론 알려지지 않은 곡이지만, 베토벤슈베르트대위법을 연구한적이 있는 음악사적으로 유서깊은 곡이다. 약간 바흐스러우면서도 여기저기 모차르트 특유의 오페라풍 극적 효과나 반음계적 진행이 등장하고 있다.

연주자로서의 모차르트는 즉흥 연주를 많이 했다. 출판된 악보에 간단하게 표현된 노트는 그냥 기본적 멜로디를 표기한 것일 뿐, 본인이 연주할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덧붙여서 야단법석일 정도로 화려한 애드리브를 펼쳤다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의 연주를 들리는 대로 적어놓은 종이 조각이 전해지는데, 음표가 엄청나게 많다. 또한 모차르트의 악보는 고쳐쓴 흔적이 거의 없다.[62] 한 마디로 머리 속에 있는걸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대중적이면서도 기억에 오래남는 선명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작곡한 곡에 조바뀜이 계속 일어나는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는 등 청자에게는 굉장히 감성적으로 다가오지만, 연주자에게는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기교를 요한다.

13. 기타

파일:attachment/오스트리아 실링/schilling46.jpg* 유로화 이전 오스트리아 5000실링 지폐에 얼굴이 들어가 있었다. 이 지폐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지폐들 중 하나로 손꼽히며, 거래 가격도 높은 편에 속한다. 오스트리아에서 발행되는 1유로 주화에도 이 사람의 얼굴이 들어간다.


[1] 공교롭게도 그녀의 딸 마리안네도 잘츠부르크 토박이로 살았고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2] 요절한 아이들 중 제일 오래 산 첫째가 생후 6개월이고, 4명은 백일도 못 넘겼다. 한국에 백일잔치, 돌잔치라는 풍습이 괜히 생긴 게 아닌 거다.[3] 1762-1842. 장수한 덕에 사진이 발명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초상화의 시대에서 살았지만 위의 사진은 1840년에 촬영된 것. 다만 현재 원 안의 인물이 콘스탄체가 맞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4] 심지어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프란츠 사버로 똑같다는 이유로, 이 막내아들이 사실은 쥐스마이어의 아들이라는 정신나간 주장도 있었다.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는 유전자 감식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닮았다.[5] 두 사람을 위해 모차르트가 작곡한 아리아나 오페라의 배역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가수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장녀 요제파는 마술피리 초연에서 '밤의 여왕' 배역을 맡아 그 유명한 아리아 'Der Hölle Rache'를 부르기도 했다.[6] 다만 알로이지아가 초연 때 실제로 이 배역을 맡았는지는 불확실하다.[7] 애초에 당시에 벽난로를 갖춘 집 자체가 상당히 비쌌다. 땔감이 없었던 건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했던 상황이었을 뿐이지, 계속 그렇게 살았던 게 절대 아니다. 또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출 생각을 한다는 것도 진짜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생각해 내기 힘든 아이디어이다.[8] 모차르트 부부는 집안일을 해줄 사람을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귀족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다. 심지어 이 부부는 요리사까지 고용했다.[9] 모차르트는 당대 최고의 인기 음악가 중 하나로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었다. 모차르트 부부가 빚더미에 앉은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버는 족족 펑펑 써댔기 때문이다. 임대료가 비싼 집에 살면서 사람들을 고용하고 아들도 비싼 기숙학교에 보내고, 허구헌날 파티에 가니 아무리 벌어도 감당이 될리가...후술되는대로 콘스탄체가 필요할땐 생활력을 발휘했다는 걸 감안하면, 어차피 남편이 돈을 잘 버는데다 아직 새파랗게 젊으니 경제적으로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듯 보인다. 빚이 있어도 금방 벌어서 갚을 수 있으니.[10] 재혼 후에도 콘스탄체는 콘스탄체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11] 묘비에 Gatte der Witwe Mozart(모차르트 부인의 남편)라고 씌어있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모차르트에 열중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12] 정식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1795년 별거한 후 다시는 남편과 만나지 않았다. 한편 요셉 랑어는 1800년경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하면서 세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1831년 사망했다.[13] 유일한 혈육이었던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두 아들은 조피가 사망하기 전에 사망했다.[14] 이런 니센의 지워버린 구절들은 후대에 기술의 발전으로 다행히 복원이 되었다.[15] 나넬은 어렸을 때의 애칭이며, 성인이 된 후에는 마리아 안나 또는 마리안네로 불렀다. 이 항목에도 이런 점을 반영하였다.[16] 모차르트와 교환한 서신에 보면 나름 작곡도 한 것 같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녀의 작품은 없다.[17]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아들이 이 사람일 것이다.[18] 모차르트 사진을 색상 반전시킨 것. 한국어 기준 트르차모.[출처1] (출처: 스티븐 이설리스(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 베토벤이 스튜 그릇을 던져 버린 이유는?) - 애덤 스토어 그림 - 고정아 옮긺)[20]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들은 보통 주변에선 노이로제 환자 정도로만 취급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21] 모차르트에겐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 동지는 없었고, 자신이 잘 보여야 하는 음악가,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음악가 단 2종류의 동종업자들만 있었을 뿐이다.[22] 털로 안을 댄 외투[출처2] 출처: 영어 위키백과(모차르트: 외모와 성격)[출처3] 출처: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출처4] 출처: 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출처5] 출처: 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 영어 위키백과(모차르트: 외모와 성격)[출처6] 출처: 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외모와 성격)[출처7] 출처: 영어 위키백과(요한 네포무크 훔멜)[29] 독일의 옛 동전[출처8] 출처: 영어 위키백과(모차르트: 외모와 성격)[출처9] 출처: 영어 위키백과 (안토니오 살리에리:모차르트와의 관계)[출처10] 출처: 영어 위키백과 (모차르트: 외모와 성격)[33] 흔히 카사노바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것이 '매력적인 바람둥이, 능란한 난봉꾼' 정도이고 모차르트 역시 '향략적으로 놀기 좋아하고 여성 편력도 심한 한량'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대강 비교하면 둘이 비슷한 캐릭터 아니냐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물론 모차르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지만 놀기 좋아하는 것이 범죄는 아니다. 또한 아내 이외의 여성 편력이 있다는 증거도 안 나왔으니 남녀관계의 신의도 나름 지킨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카사노바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는것처럼 사기에서 강간까지 온갖 범죄를 쉬지 않고 저지르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범죄자였고, 흔히 카사노바의 방탕이라 하는 매춘, 사기성 연애등은 그가 숱하게 저지르던 다른 범죄들에 비하면 차라리 참아줄만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즉 카사노바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올려치고, 반대로 모차르트의 이미지는 턱없이 내리쳐놓고 보면 두 사람이 비슷한 수준의 인물처럼 보인다.[34] 베토벤조차도 "모차르트 오페라의 유일한 흠은 대본"이라며 다폰테를 까기도 했다.[35] 흔히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어 이름이고, 원래 오스트리아인이므로 본명은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였다.[36] 귀천상혼은 국가 차원에서 성문법으로 금지하던 것은 아니었고 가톨릭 교리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위'로 엄청난 조롱과 치욕을 각오해야 했다.[37] 문서 링크[38] 이게 평균율에서처럼 f2과 f1가 반음 차이라면 f2/f1=2^(1/12)인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39] 위 문단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모차르트의 자녀들도 6명 중 2명만 성인이 되었다.[40] 인간의 생존률/사망률은 I형 생존곡선을 따른다.[41] 단순히 DNA가 맞지 않았다고 모차르트의 두개골이 아니다라고 단정짓기도 곤란한 것이 감정 결과 이 두개골은 30-35세 가량의 남성의 것이며, 생전의 모차르트처럼 치아 상태가 좋지 않고 두개골에 골절이 있는 등(모차르트는 죽기 1년 전에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그로 인해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비슷한 특징을 여러 가지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DNA 감정도 모차르트의 외할머니와 조카로 추정되는 유골에서 채취한 샘플로 감정했는데 이 두 사람 모두 모차르트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심지어 외할머니와 조카도 서로 DNA가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서, DNA 감정에 사용된 유골이 진짜 모차르트의 친족 유골이 맞는지조차도 논란이다.[42] 영화에서도 살리에리는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서 모차르트의 죽음에 공헌한 거지 독살은 안 했다.[43] 사실 두 배우의 나이 차이 때문에 그렇게 보일뿐 영화에서도 모차르트가 대여섯 살 때 살리에리는 아직 앳된 10대 소년으로 설정(?)했다곤 하나 영상1 영상2 살리에리 아역배우 Martin Cavina가 노안에 덩치도 커서 유년 시절 장면들 보면 초딩들 사이에 대학생의 느낌을 주며 상당히 어색하다. 이후 본작의 주제 '천재에게 열폭 하는 수재 이야기'로 인해 밀로스 포먼 감독이 '의도적으로 유년 시절을 대비시키려고 살리에리가 어린애들과 눈 가리고 유치하게 술래잡기하는 장면 넣었구나'란 느낌을 주며 이질감 없이 넘어갈 뿐이다.[44] Ignaz Moscheles, 1794~1870. 그도 음악가로 살아있을 때 꽤 인정받긴 했지만, 지금은 듣보잡되어버렸다.[45] 1795~1864. 그도 음악가이긴 했지만 베토벤의 비서로 유명하다. 베토벤 연구가인 레이너드 솔로몬이나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는 쉰들러를 베토벤이 왜곡되도록 연구를 가로막은 악당이라고 비난했다. 자세한 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 문서로.[46] 영화 〈아마데우스〉에선 살리에리의 비겁한 술수로 5회 공연만에 막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47] 대충 번역하자면, 심근염, 심내막염, 다발관절염, 경계성홍반, 무도증을 동반한 급성 류마티스열. 류마티스열은 아직도 위생이 좋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선 흔한 질환이고 물론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도 보편적인 질환이었다.[48] 지금도 성홍열은 존재하는 질환이지만, 항생제만 먹으면 바로 치료가 가능하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에는 당연히 항생제가 존재하지 않았다.[49] 18세기에는 프리메이슨은 현재의 인식과는 다른, 귀족 중심의 지적인 엘리트 사교문화의 한 형태였다.[50] 하이든도 모차르트의 권유로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으나, 도중에 탈퇴하였다.[51] 그 중 프리메이슨 지부의 재무 담당이었던 미하엘 후흐 베르크에게 상당히 많은 신세를 졌다.[52] 요제프 2세가 프리메이슨이 필요 이상으로 확장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놓은 '프리메이슨 칙령'에 의해 단체의 힘과 결속력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쇠퇴해오고 있었다.[53] 마리에 테레지아의 요청으로 온 프리메이슨 회원이자 광물학자인 이그나츠 폰 보른 백작을 환영하기 위하여 지어진 곡이다.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에서 자라스트로의 모델을 이 백작으로 설정했다.[54] 합창이 있는 버전과 없는 버전 2개가 있다.[55] 잘 알려진 프리메이슨 작품으로 모차르트 이 작품에 프리메이슨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56] 모차르트 사후에도 프리메이슨 장례식에서 자주 사용되었다.[57] 프리메이슨을 위한 곡 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자주 연주된 음악도 포함되어 있다.[58]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사용된 음악은 네빌 마리너 지휘인데 비해 시중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모차르트 음반은 대부분 카를 뵘 지휘곡이다. 동일한 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전체적인 뉘앙스가 꽤 다른 편이다.[59] 쇼팽의 곡도 한 음 틀리면 티가 나는데 바흐와 모차르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60] 의외로 모차르트 악곡은 이 이음줄 표현이 정말 중요하다. 이음줄 하나는 곡의 느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61] 모차르트 작품이 요구하는 터치 특성상, 오히려 손이 작고 손가락이 가늘어야 미스터치가 덜 나고 좀 더 표현이 쉽다는 의견도 많다.[62] 고쳐쓴 흔적이 없다고 해서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곡을 썼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실제로 매우 분석적으로 곡을 썼다고 한다.[63] 다만 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신성 로마 제국 해체 전까지는 독립된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바이에른 관구에 속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관구가 따로 있었으며 오스트리아 대공국 전체(현대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쥐트티롤고리치아, 트리에스테)가 속했다.[64] 반대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정치를 한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 사람 취급한다.[65] 실시간으로 문서를 긁어가면 수정은 바로바로 되지만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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