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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 |||
출생 | 1615년 11월 5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구) | |||
사망 | 1648년 8월 18일 (향년 32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 |||
묘소 |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이브라힘 영묘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1] | ||
1640년 2월 9일 ~ 1648년 8월 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아흐메트 1세 | |
어머니 | 쾨셈 술탄 (출신: 그리스) | ||
형제자매 | 오스만 2세, 셰자데 메흐메트, 셰자데 지한기르, 셰자데 오르한, 셰자데 셀림, 무라트 4세, 셰자데 하산,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휘세인, 셰자데 카슴, 셰자데 쉴레이만, 아이셰 술탄, 파트마 술탄, 하티제 술탄, 게브헤르한 술탄, 한자데 술탄, 에스마 술탄, 자히데 술탄, 아티케 술탄, 아비데 술탄 | ||
배우자 | 투르한 하티제 술탄 (출신: 우크라이나 / 러시아) | ||
하티제 무아제즈 술탄(출신: 폴란드 왕국 - 유대인 추정) | |||
살리하 딜라슙 술탄(출신: 세르비아 추정) | |||
텔리 휘마샤 술탄 (1647년 결혼 / 1672년 사망) (출신: 체르케스) | |||
사츠바을르 술탄(출신: 체르케스) | |||
쉬베카르 술탄(출신: 아르메니아) | |||
자녀 | 메흐메트 4세, 쉴레이만 2세, 아흐메트 2세, 셰자데 무라트, 셰자데 셀림, 셰자데 오스만,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지한기르, 셰자데 오르한, 윔뮈귈쉼 술탄, 파트마 술탄, 게브헤르한 술탄, 카야 술탄, 베이한 술탄, 아티케 술탄, 아이셰 술탄, 비잔 술탄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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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18대 술탄이자 12대 파디샤.2. 생애
2.1. 어린시절
1615년에 태어났고, 2년뒤 아버지가 죽자 23년 동안 갇히게 된다. 선황이자 형인 무라트 4세가 이브라힘을 제외한 형제들을 모두 처형하는 바람에 무라트 4세의 제위 기간 내내 불안한 시절을 보냈다.[2]2.2. 재위
어머니이자 태후인 쾨셈 술탄의 보호로 살아남아 파디샤로 즉위한 이브라힘은 제위 초반에는 대재상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보좌를 받아 제국을 잘 통치했다.[3] 그러나 간신들이 득세하고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처형된 후 엇나가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두통과 정신병이 그를 괴롭혔다.[4]휘마샤(텔리 휘마샤 술탄)라는 여인을 총애하여 사실상 본부인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을 놔두고 휘마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런데 이브라힘은 휘마샤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방 하나를 흑담비 모피와 이집트에서 난 진귀한 보물을 방안에 가득 채워 그녀에게 선물했다는 소문과 이브라힘이 누이들에게 휘마샤를 상전처럼 모시게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머니 쾨셈 술탄과의 사이는 점점 악화됐다.
결국 1648년, 쾨셈 술탄의 재가를 받은 정변으로 황위에서 축출되고 유폐당했다가 결국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는 삼촌 무스타파 1세 옆에 묻혔다.
2.3. 크레타 공방전
1644년 가을, 몰타 기사단이 메카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술탄의 하렘 여인들이 탄 배를 나포해 몰타로 돌아가는 길에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인 크레타 섬에 정박해 보급을 받고 간 일이 터지면서 베네치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베네치아는 크레타 섬 주둔군 책임자를 총살하기까지 하며 오스만 제국에 저자세를 보였으나 하렘 여인들이 납치당한 일로 단단히 분노한 이브라힘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결국 이 전쟁은 이브라힘이 폐위된 후에도 계속되다가 1669년 베네치아가 크레타 섬을 오스만에 넘기면서 종전되지만 오스만도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력에 큰 후유증을 입게 된다.
3. 여담
- 뚱뚱한 체형의 여성을 좋아했다는 설이 있다. 후궁 중 쉬베카르 술탄이 엄청난 거구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 형 무라트 4세 시대에 하마터면 황통이 끊길 뻔했지만 이브라힘은 8명의 배우자를 뒀고 아들도 많이 낳았기 때문에 농담삼아 오스만 제국의 두번째 창건자라는 소리도 듣고 있다.
[1]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2] 야사에 따르면 무라트 4세는 오스만 황실의 혈통을 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머니 쾨셈 술탄과의 갈등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3] 무스타파 파샤에게 국정을 일임하고, 자신은 잠행을 다니며 민심을 살피다가 이건 뭔가 아닌 것 같다 싶은 게 눈에 띄면 재상을 불러다가 적당히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식이었다. 이 무렵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조치가 선제 무라드가 제정했던 커피 금지령을 폐지한 것.[4] 형이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도 간당간당한 상태로 10년 넘게 불안에 떨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