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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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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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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5aadb><colcolor=#fff> 아르헨티나 공화국 제40대 대통령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 데페론
María Estela Martínez de Perón
파일:Isabel_Perón_con_el_bastón_y_la_banda_presidencial.jpg
출생 1931년 2월 4일 ([age(1931-02-04)]세)
아르헨티나 라 리오하
재임기간 제40대 대통령
1974년 7월 1일 ~ 1976년 3월 24일
당적 [[정의당(아르헨티나)|
정의당
]]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
[[스페인|]][[틀:국기|]][[틀:국기|]](2000~)
배우자 후안 페론(1961년 결혼, 1974년 사별)
약력 아르헨티나 부통령
아르헨티나 대통령
정의당 대표
서명
파일:Firma_Isabel_Perón.svg

1. 개요2. 생애
2.1. 정치인이 되기 전2.2. 후안 페론의 부인으로서2.3. 부통령 및 대통령으로서2.4. 실각 및 망명
3. 기타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이자 대통령. 세계 최초여성 대통령이다.[1] 1931년 2월 4일생. 현재 [age(1931-02-04)]세.[2]

이사벨(Isabel)은 본명이 아니며, 본명은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 데페론(María Estela Martínez de Perón)[3]. 이사벨은 가톨릭에 귀의했을 때 얻은 세례명이인데, 공식석상에서 자기 세례명을 본명처럼 사용하고 서명도 이사벨이라고 할 정도로 세례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 외에도 이사벨리타(Isabelita)라는 별명도 있다.

2. 생애

2.1. 정치인이 되기 전

아르헨티나라 리오하에서 1931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 카르타스(María Estela Martínez Cartas).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여읜 탓에 그의 집안은 재정적으로 넉넉치 못했고, 이 때문에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나이트클럽 댄서로 활동하면서 아르헨티나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서른 살이었던 1961년에 파나마에서 당시 망명 중이었던 후안 페론을 만났고, 그가 이사벨에게 반하면서 이사벨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4] 후안과 이사벨이 교제하게 되면서 이사벨은 직업을 그만두고 망명 생활을 하던 후안을 따랐고, 마드리드에 살면서 당시 미혼 남녀의 동거를 허락하지 않던 스페인의 법 때문에 1961년에 결혼하게 되었다.

2.2. 후안 페론의 부인으로서

후안 페론은 1955년에 있었던 군사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상태였지만, 그를 대신한 군사정권은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여 국내의 민주화 운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안 페론 역시 민주화 운동을 호소하며 망명 중에도 아르헨티나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안은 아르헨티나에 귀국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이사벨은 후안의 부인으로써 군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중재를 도맡아 스페인과 아르헨티나를 자주 오가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3년에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그 해 5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페론을 지지하는 정당연합 '정의자유전선'의 엑토르 캄포라(Héctor Cámpora)가 당선됨으로써 후안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캄포라는 대통령이지만 좌파 페론주의자로써 정의자유전선 내 우파 페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에, 페론주의 세력은 좌우가 서로 학살까지 벌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에 캄포라는 좌우 페론주의자 모두를 통솔할 수 있는 페론을 대통령으로 출마시키기 위해 부통령 비센테 솔라노 리마(Vicente Solano Lima)와 함께 대통령을 사임했고, 이에 따라 9월에 다시 대선이 치러졌다.[5] 정의자유전선은 후안 페론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그는 아내인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사벨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은 후안을 빼면 이사벨이 페론주의 내 모든 파벌을 아우를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2.3. 부통령 및 대통령으로서

1973년 9월 대선에서 후안 페론은 62%라는 득표율로 무난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에 따라 이사벨 역시 부통령으로써 직무를 개시했다.

후안은 이미 이 시기에 고령이라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지경까지 갔고 결국 임기 1년도 못 채운 채 1974년 7월 1일에 사망했다. 이에 따라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라 아르헨티나에서는 그의 별명이 La Presidente('대통령'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명사에 여성형 정관사를 씌운 것)였다.

그러나 이사벨은 남편만큼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낮은 지지율을 회복해 보기 위해 국민의 인기가 높던 에바 페론의 계승자를 자처했고 외국에 있던 에바 페론의 유해를 아르헨티나로 송환하는 등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아울러 이사벨은 당시 사회복지부 장관이자 페론주의 우파에 속한 호세 로페스 레가(José López Rega)를 신임해 페론주의 좌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당시 페론주의자들의 정의당은 말만 한 당이었지 사실상 좌우가 나뉘어진 한지붕 두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 두 세력의 대립은 말싸움이나 정쟁 수준이 아니라,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수준이었다. 경제정책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후안 페론이 말년에 제정해놓은 노사정 협약에 사측이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노사 갈등이 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인플레이션율도 수십% 가량 상승했다.[6] 더불어 기록적인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기록하게 되자 1975년에 호세 로페스 레가가 추천하여 경제장관이 된 셀레스티노 로드리고(Celestino Rodrigo)는 페소화를 50% 평가절하하고 임금과 물가를 동시에 상승시키는 충격 요법을 도입했지만 이는 오히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페론주의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 중 하나였던 노조연맹 CGT가 총파업을 벌이는 굴욕을 당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호세 로페스 레가는 실각하고,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어 사실상 망명을 떠났다.

이후 정치적 혼란과 폭력은 더 심해졌다. 좌파와 우파 간 갈등은 경제위기를 계기로 더욱 심해졌으며, 이사벨 페론이 집권한 첫 15개월 동안 정치적 폭력으로 700명 이상 사망했다. 그러자 1973년 실권 이후 잠시 세를 잃었던 군부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쿠데타 소문이 정계에 횡행했고, 1975년에 이사벨이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인사를 군 수뇌부에 임명해 군을 통제하려 하자 공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쿠데타는 이사벨을 고까워했던 군부조차도 시기상조라 생각했던 돌출행동이었기에 이사벨은 군부와 손잡고 쿠데타를 진압했지만, 이를 계기로 이사벨 페론은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을 고까워하는 군부에 점차 실권을 내주는 실책을 범했다. 군부는 겉으로는 이사벨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지만 1976년이 되면 언론에서조차 쿠데타 가능성을 공공연히 거론할 정도로 이사벨의 입지는 취약해졌다.

2.4. 실각 및 망명

결국 1976년 3월 24일에 호르헤 비델라 육군 총사령관이 미국의 암묵적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당일 외부에서 직무를 수행했던 그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에야 쿠데타 움직임을 눈치채고 헬기를 통해 대통령 관저로 복귀하고자 했으나, 헬기는 관저가 아닌 인근 군 공항으로 날아갔고 군부는 그 자리에서 그를 체포하고는 대통령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는 군사정권이 들어서 더러운 전쟁을 비롯한 온갖 인권유린과 경기침체, 포클랜드 전쟁 패배 등 이사벨보다도 못한 실정이 벌어졌다.

실각한 이사벨 페론은 부패 혐의로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나, 1981년에 망명이 허락되어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망명한 후에도 지하에서 활동하던 정의당의 대표직[7]을 유지하였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며, 1983년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대선이 치러질 때 정의당 내 아직 많이 있었던 지지자들로부터 대통령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였고 귀국하지도 않았다.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스페인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고 알폰신과 대립하던 야당과의 회담을 몇 번 주선하는 등 정치 활동을 안 했던 것은 아닌데, 1985년에 정의당 대표직을 사임한 이후로는 정치와 연을 완전히 끊고, 스페인 국적을 얻어 이중국적 상태로 마드리드에 계속 눌러앉았다.

2006년 스페인 경찰에 체포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이루어졌던 사건사고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집권기에 벌어진 반체제 인사의 의문사 사건을 방조[8]했다는 혐의로 스페인 정부에 송환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2008년 스페인 법원에서 송환을 거절하면서 풀려났다.

3. 기타


[1]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는 1960년 집권한 스리랑카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2] 현재 생존 중인 아르헨티나전직 대통령 중 최고령이다.[3]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4] 후안 페론은 두 번째 아내였던 에바 페론(에비타)이 1952년에 죽은 뒤 큰 상실감에 시달렸다.[5]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동시에 궐위 상태인 경우 선거를 다시 치렀다.[6] 다만 이사벨의 집권기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실업률은 가장 낮았던 시기 중 하나인데, 이는 오일쇼크로 인해서 소련 정부의 재정이 풍족해지며 아르헨티나 농산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임기 초반의 국유화 조치로 일자리가 일단은 많이 늘었던 것에 기인한다.[7] 이 자리는 후안 페론이 죽은 1974년에 대통령직과 함께 승계받은 것이다.[8] 재임 말기 이사벨은 군부, 극우 인사에 이래저래 휘둘리면서 좌파 인사, 반체제 인사의 의문사 사건이 여럿 있었는데, 이를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다.[9] 영적 나치즘이 국가사회주의로 들어가기 이전에는 따로 분류되었었는데 이전 설정에서 해당 이념은 게임 세계관에서 국가사회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극단주의 이론으로 영적인 메시아 사회나 순수한 혈통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개인이나 사회, 국가마저도 이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봐서 게임 내의 파시스트나 국수주의 파벌 심지어 일반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도 해당 이념을 숭상하는 인물이나 군벌들을 정신이상자로 보는 수준이였다. 현재는 국가사회주의로 포함되어서 국가사회주의 안에 있는 극단적인 파벌들로만 정리되었다.[10] 포트레이트의 이상한 선글라스는 합성이 아니라 진짜로 쓴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