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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6:56:52

이사벨라 버드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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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파일:1681199193450.jpg
성명 이사벨라 루시 버드
Isabella Lucy Bird[1]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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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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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생 1831년 10월 15일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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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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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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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요크셔, 보로브리지 홀[2]
사망 1904년 10월 7일 (향년 72세)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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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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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에든버러
부모 에드워드 버드 (부친) 도라 롤슨 (모친)
배우자 존 비숍 (1881년 결혼)
종교 개신교(성공회)
직업 지리학자, 작가, 탐험가
소속 영국 왕립 지리학회

1. 개요2. 일생3. 한국 관련 이야기들4.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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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지리학자. 영국 왕립 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기도 하다. 초상화

2. 일생

1831년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캐나다미국 각지를 여행하며 기록한 자신의 여행기인 『미국의 영국여인』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45쇄를 찍을 정도로 1856년 영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노예 제도에 대해 비판하고[3] 원주민들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

30대 이후에는 상당한 우울증을 앓았고,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뉴질랜드, 호놀룰루, 샌드위치 섬[4]을 다녀오고 로키산맥의 요양소에서 몇 달을 보냈다. 1875년과 1879년 자신의 미국 경험을 바탕으로 『샌드위치 섬에서의 6개월』, 『로키산맥의 어느 여인』을 간행했다.

40세가 넘으면서부터 대학에서 지리학 공부를 했다. 1878년 일본 제국을 방문하며 홋카이도에서 아이누족의 생활상을 관찰하고 영국령 홍콩, 광둥성, 말레이 반도를 답사한 후 귀국해 『알려지지 않은 일본』(1880)과 『황금의 체르소니즈와 그 곳에 이르는 길』(1883)을 출간했다.

1881년 51세 때 10살 연하이자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의사 존 비숍과 결혼하였으나, 남편 존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단독(丹毒)으로 고생하다 1886년에 병사하였다.[5]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여행을 다녀 해외에 있었기에 남편과 같이 있은 적이 없다보니 자식은 없었다. 1889년 58세의 나이로 중동을 답사하고 인도스리나가르로 가서 사재(私財)를 털어 남편을 기리는 ‘존 비숍 기념병원’을 세웠다. 이후에도 티베트, 터키, 페르시아, 쿠르디스탄, 바그다드, 테헤란을 여행하였다.

1892년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 되었고, 1893년 '몽골리안 민족들의 국가와 지리를 민족적 특징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조선으로 떠나기로 하고 1894년 2월 말 조선에 입국했다. 이후 4년 동안 고종명성황후를 만나는 등 한반도를 답사하며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1898)[6]을 발간했다. 1898년《양자강 상류지역》을 간행한 후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 모로코를 거쳐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후 아틀라스 산맥에 등정하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해야했다.

1904년 다시 청나라 답사를 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병세가 약화되어 1904년 10월 7일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숍은 임종 때까지 여행의 의욕을 잃지 않았기에 사망하던 순간까지도 런던의 하역 창고에서 당장 배편에 실을 수 있도록 여행 트렁크를 준비해 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일본 여행기를 그린 '이상한 나라의 버드'라는 만화가 있다.

3. 한국 관련 이야기들

그녀는 조선에 왔던 몇몇 선교사들과 더불어 당대 조선 말의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겨 서양, 후세에 전한 외국인이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조선인들을 우호적으로 본 듯 하다.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조선인들이 몽골, 중국, 일본인보다도 더 키가 크고 잘생겼다고 저술했으며, 초기에는 조선의 위생 환경과 생활 양식에 대해 기겁을 했지만 나중에는 "17미터 폭의 넓은 새 도로가 생겼으며 ‘좁은 오솔길은 없어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도로 때문에 사라지고 없었다. 도로에서는 쓰레기 때문에 겪던 고충이 사라졌으며 (작업 청소부에 의해 도시 밖으로 치워지기 때문에), 확 트인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꾀죄죄하던 상점 대신 유리로 된 진열대가 있는 상점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구 가옥과 하수 시설의 정비, 가옥 외관의 정비 등을 꾀함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라고 대폭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7] #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호평을 내렸다.
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한국인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하다. 한국인들은 스코틀랜드식으로 말해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를 상당히 타고 났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한국인의 능숙하고 기민한 인지능력과 외국어를 빨리 습득하는 탁월한 재능, 나아가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한국인들이 훨씬 좋은 억양으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그러나 그녀가 방문했던 시기는 서양 제국주의 시대로서 동양을 지배 대상으로 여겼던 때였고, 조선인에 대한 우호적 인식과는 별개로 당시 조선의 국가 체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서술을 많이 했다. 하층민을 착취하는 양반 계급을 '허가받은 흡혈귀' 라고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8]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중이었던 일본과의 비교가 많은데, 그래서 비숍의 저술은 일본에서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로 악용됐다.

그녀가 조선에 갔다온 기행문에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라고 썼었다. 요즘식 표현으로 서울 공화국을 지적했던 셈이다.

또한 조선 여성들의 성생활이나 풍속에 대해서 "조선의 상류층 여성(양반 계층)들은 평생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정절을 지키지만, 하류층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곧바로 재혼할 만큼 성생활이 자유분방하다."라고 기록했다.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8년(을미사변 3년 후)에 출간되자마자 유럽과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을미사변은 당대에도 국제사회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는데, 현대처럼 각 나라에 언론사 주재 특파원이 있던 시절도 아니라서 서양에는 전신이나 인편 등으로 관련 소식만 전해져 있었을 뿐 자세한 전말은 나와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의 상류사회, 특히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전말이 고스란히 적힌 르포가 당대 최고의 여행저술가에 의해 발간되어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9] 이는 비숍 자신이 명성황후를 비롯한 당시 조정과 친밀히 교류하고 있었던 것을 배경으로 했던 결과였다.

4. 참고 항목



[1] #[2] Boroughbridge Hall. #[3] 영국의 노예제도는 1822년 폐지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856년으로, 노예제도(+기타 연방주들 간 갈등)로 인해 남북전쟁이 일어난 시점이 출간 4년 후인 1860년이다. 즉 당대에는 현재진행형인 문제 제기였던 셈이다.[4] 현재의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가 아니라 하와이 제도의 다른 이름이다. 정확히는 하와이에 도달한 제임스 쿡이 샌드위치 백작을 기려 하와이에다 샌드위치 섬이라고 이름붙인 것. 이 당시는 하와이 왕국이 미국에 병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비숍은 서양식으로 샌드위치 섬이라고 불렀다.[5] 직접적 원인은 수술하던 중 환자의 고름이 눈에 튄 것이었다고 한다. 현대에는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수술 집도의는 보안경을 쓴다.[6] 국내에는 신복룡 교수가 번역한 판본과 이인화 교수가 번역한 판본(제목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로 나왔다)이 있다.[7] 출처[8] 다만 영국도 당시 식민지인 착취나 아동노동력 착취같은 착취 체제가 만연한 편이였다.[9] 1895년에 발생했었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엄연한 독립국가의 군주가 사는 궁궐에 무단으로 무력을 행사하여 황후를 살해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높았다. 특히나 유럽 열강들은 군주제가 현역이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국가간 이해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결코 곱게 보지 않았다. 이 일로 일본은 주한 일본대사인 미우라를 본국에 소환하게 되는데, 유럽 측 비난여론이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묵살했을 가능성이 높다.